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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Apr 27. 2024

글루미 선데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임, 마작


“국장, 오늘 일요일인데 모처럼 ‘오션 노블’ 호에 가서 손 좀 풀까?”

남희를 이른 아침에 함부르크 공항까지 바래다주고 ‘HAPPY LATIN’ 호에 쓸쓸히 돌아오니 안 선장님이 말했다.

늘 그렇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거나 떠난 자들의 서글픔이란 뭔가 다른 것에 몰두하면 빠른 일상으로 돌아올 수가 있다.

그래, 노느니 염불한다고 안 되는 머리로 자꾸 생각해 봤자 거기서 거기지 별거 있나.

우리들의 풋사랑은 나이만큼이나 순수했다.


“좋지요. 기관장님이나 다른 사관들은요?”

내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하자, 캡틴이 ‘오늘 밤 출항하니까 다들 바쁘다네, 우리 둘이 가세.’라고 말했다.

입은 옷차림에 남희가 걸쳤던 바바리를 입고 캡틴을 따라나섰다.

은은하게 풍기는 남희의 체취.

갑자기 마음이 또 싸하다.

캡틴은 남미에서 자주 쓰고 다니던 솜브레로 모자를 쓰지 않고 쌀쌀한 날이라 멋쟁이 중절모를 쓰고 파이프를 입에 문 채 부두로 내려왔다.

화물 당직 중인 선원들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안개 낀 함부르크 BLG 자동차 전용부두를 나란히 걷는데 풍채가 좋은 안 선장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놈의 마도로스라는 직업은 이별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힘이 드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환상이라도 남지만, 이루어진 사랑은 남루한 일상이 될 수도 있지. 그래 나미 씨는 잘 보냈소?”

캡틴의 말에 가슴이 살짝 메었다.

“네, 화장실 간다고 하고 함부르크에 왔다네요.”

“그래, 참 대단한 아가씨일세.”


내 마음을 읽었는지 캡틴은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오션 노블’ 호는 국적선이라 동문이 많겠어요?”

내가 묻자, 캡틴이 천천히 걸으면서 말했다.

“음, VHF로 통화해 보니 선, 기장들이 다 아는 사람이오. 캡틴은 해사 출신으로 선장 경력도 많고 나이도 나보다 좀 더 위일 거요.”

“그래요? 이맹기 해군 참모총장 출신이 사장이었던 코리아 라인 말고는 요즘 해사 출신 캡틴 보기 힘들던데요. 기관장님은요.”

“응, 3년 후배인 모양이오. 나 4학년 될 때 입학했다니 날 모르지는 않을 거요. 내가 간부 생도를 했으니.”

“하, 그래요? 반갑겠군요.”

“우리들이야 동문에 대해 한두 마디 하면 쫙 나오지. 국장 동문은 어떻소?”

가까워지는 ‘오션 노블’ 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저는 선배 중의 한 명이 배를 탄다 하고, 동기 중에는 혼자 배를 타요. 저도 참 별나죠. 판자촌 출신에 바다 구경도 변변히 못 해본 놈이 배를 탄다고, 하하하.”


‘오션 노블’ 호에서 선, 기장으로 보이는 늙수그레한 두 분이 우리를 마중하려고 현문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서로 반갑게 두 손을 잡고 인사하며 사관 휴게실로 들어갔다.  

“일단 앉아서 점방이나 펼치고 이야기하시죠?”

깐깐하고 빈틈없게 보이는 노블 호 캡틴이 자리를 안내하면서 말했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두 캡틴은 마주 보고 앉고 기관장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안 선장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학교 다닐 때 선배님은 정말 위풍당당했죠.”

“허허허! 자네도 이제는 후배들이 줄줄이 있는 베테랑 기관장이구먼, 뭘 그래요.”

“그래도 선배님 소문은 대단했죠. 미국에서 외국인으로서 영국 제독 출신 다음으로 2번째로 무제한급 선장 자격증을 따셨다고 동문 간에 화제가 많이 됐었죠. 정말 우리 해운계의 전설입니다.”

“아, 그거야 별거 아니네. 미국 선장은 한국처럼 정년이랄 게 없다 보니 보험이라 생각하고 딴 걸세.”

캡틴이 계면쩍게 웃으며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자, 그럼, 선을 정할까요.”

노블 호 캡틴이 패를 다 쌓은 마작 위로 주사위를 던지며 말했다.

선을 정하고 ‘동’ 바람부터 시작되었다.

언제 해도 가슴 설레는 마작.

처음 배울 땐 잘 때도 천장에 마작 패가 보였다.

재미로 따지면 이에 견줄만한 오락이 있을까?

중국의 독재자 마오쩌둥이 마작을 금지하려고 많이 노력하였으나 막지 못했다.

강경한 법과 카리스마의 싱가포르 리콴유 수상 역시 자국인들에 마작을 못 하게 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그만큼 중독성이 강한 게임이다.

역전 지게꾼도 한다는 화투, 52장으로 하는 카드놀이와 104개를 다루는 한국 마작 중 어느 것이 더 경우의 수가 많겠는가.

전에도 말했지만, 마작은 조패의 예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이 만든 오락 중에 최고의 경지일 것이다.

일명 개패라고 하는 일구잡패 오합지졸이 모여 있어도 상대방 패를 읽으면서 방을 만들어가는 재미란 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가 없다.


“어~ 라틴 호 통신장님은 바바리 벗고 하시지?”

노블 호 캡틴이 말하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애인이 입다가 간 옷이라 냄새가 좋아서요, 앤 덕에 끗발이 날 것도 같습니다.”

내 어눌한 대답에 모두 폭소를 터뜨리고 기관장이 물었다.

“애인이 독일에 살아요?”

안 선장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국장 통신과 동기가 방송국 오퍼레이팅 엔지니어 출신인데 독일 특파원으로 나와 있대요.”

모두 놀란 눈으로 나를 다시 쳐다보고 ‘대단하시네.’라고 중얼거리며 자기 패로 눈을 돌린다.

얼른 내 패를 보고 세 고참 마도로스들이 버리는 패를 보며 무슨 방으로 가는지 짐작해 본다.

당근, 만수 패를 버리고 가면 통수로 방을 만드는 거고 통수 패를 버리면 그 반대 아니겠는가.

1, 9와 잡패를 버리고 가면 단요 쪽으로 가는 거고, 중구난방으로 버리면 개패로 치또이나 방 만들기 힘든 패를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하이네켄을 한 캔 따서 입에 대며 어느 쪽으로 갈지 생각해 본다.

몇 판 하면서 손이 풀리니 내 손이 날아다닌다.

발을 꼬고 앉아서 왼팔은 무릎 위에 편하게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패를 만지작거리며 노 선, 기장의 버린 패와 표정을 번갈아 쳐다보고 포커페이스로 미소 짓고 있는 나.

조패할 때와 판이 끝났을 때 외에 마작판 위에 양손이 올라가는 건 비 매너로 조심해야 한다.

보통 마작을 할 때 고개를 숙이고 자기 패만 보다가 방이 가야 비로소 고개를 들어 판을 보는 경향이 많은데 그런 마작은 서툰 초보가 하는 것이다.

본인 패는 대충 맞춰놓고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버리나 보면서, 상대방이 넘쳐서 나오는 걸 주의 깊게 봐야 한다.

화기애애한 것이 아니고 화기애매해졌다.

웃고 즐기는 가운데 칩이 오고 가야 재미가 있는데 모든 칩이 안 선장님과 내 앞에 쌓였으니 다른 두 사람은 재미가 없을 수밖에.

노블 호 선기장의 칩이 거의 바닥나고 ‘북’ 바람이 끝나자, 판도 끝났다.


노블 호 캡틴이 말문을 열었다.

“‘HAPPY LATIN’ 호 국장님은 젊은 사람이 마작을 그렇게 잘하시오?”

상기된 얼굴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처음 배우길 잘 배웠고, 제 애인이 미다스 손이거든요. 그 손 만지고 왔더니 이렇게 잘 되네요.”

우울한 일요일이 될 뻔했다가 남희의 체취와 미다스의 손을 생각하면서 유쾌하고 즐거운 하루가 되었다.




남희가 음악 공부하고 싶다는 헝가리의 고도 부다페스트에서 실화를 영화로 만든 ‘글루미 선데이’에서 주인공의 대화가 생각난다.

‘당신을 잃고 살아가는 것보다 당신의 반이라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할 거 같다.’는...

그래, 남희!

함부르크에서 당신과 그렇게 다시 오지 않을 멋진 밤을 보내고 헤어졌지만, 그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오.


글루미 선데이의 원제는 헝가리어로도 ‘슬픈 일요일’이란 뜻이다.

당시의 우울한 시대상과 맞물려 많은 사람의 자살을 부른 노래와 영화로 유명하다.

영화는 노래가 실제로 작곡되었던 1935년의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을 둘러싼 세 남자의 이야기가 나치의 전운과 함께 펼쳐진다.

1936년 프랑스 파리의 레이 벤추라 오케스트라 콘서트홀에서 ‘글루미 선데이’를 연주하던 드럼 연주자가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여러 명이 따라 자살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레코드로 발매된 당시 8주 만에 헝가리에서 이 노래를 듣고 187명이 자살했다고 한다.

모방 자살이 급증한 베르테르 효과 못지않았다.


이 곡의 작곡자인 레조 세레스는 연인을 잃고 슬픈 마음으로 이 곡을 작곡했는데 추운 겨울에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작곡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가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유머가 풍부했으며 그에겐 아름다운 연인 헬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레조는 헬렌과 헤어지자, 실연의 아픔을 견딜 수 없었고 그때 작곡한 노래가 바로 ‘글루미 선데이’였다.

그는 이 노래를 작곡한 후 몸과 마음이 점점 굳어져 마침내 두 손가락만으로 피아노를 연주해야 했고 악보조차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고소 공포증이 있어 높은 곳에 가지 않던 그였지만 희한하게도 고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죽음의 순간, 그 또한 ‘글루미 선데이’를 듣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헝가리 정부는 이 곡의 연주를 금지했고, 프로이트는 이 노래의 정신분석학적인 의미를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다.

뉴욕타임스는 ‘수백 명을 자살하게 한 노래’라는 헤드라인으로 특집 기사를 실었다.

아이러니하게 이 영화가 이전 100년 동안의 영화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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