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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Apr 29. 2024

북해 겨울 바다에서 먹는 냉면

미쳐서 살다가 제정신이 들어 죽은 돈키호테


함부르크와 브레머하펜에서 자동차와 중장비를 가득 싣고 북해 한 바다에서 대서양을 향해 쉼 없이 항해하고 있는 ‘HAPPY LATIN’ 호.

갑판 위를 거칠고 사나운 파도가 하얀 물거품을 내며 사방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나는 항해하면서 폭풍우에 미쳐 날뛰는 바다를 보았고, 검푸른 성난 바다도 수없이 봤다.

미친 파도의 북태평양에서 '한진 인천' 호가 사라지기 일주일 전에 나란히 항해했었고, 남지나해에서 바다에 떨어진 선원을 살려준 거북이와 비슷한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변덕스러운 바닷속에서 나 자신도 보았다.

학창 시절 늦가을에 북한산 단풍 속에서 그 낙엽을 밟으며 남희와 동기들끼리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던 성냥갑보다 작게 보이는 건물과 좁쌀만큼이나 작아 보이던 차 그리고 그 속을 개미같이 분주히 움직이는 인간을 보며 삶을 생각하고 호연지기를 웠듯이 거친 바다는 항상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대자연은 항상 거기 그렇게 도도히 있었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날씨가 차가운데도 선원들이 모처럼 냉면이 먹고 싶다 해서 주방에서는 육수와 고명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의 최고 요리사 조리장 영감님은 특유의 유머와 달변으로 사회에서 있었던 무용담과 전에 배 타면서 재미있었던 이야기로 주방을 늘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오늘도 역시 일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설을 풀고 있었다.

나는 본사에 특식 신청서를 작성하기 위해 조리장을 만나러 갔다가 이들의 재미있는 이야기에 발목이 잡혔다.

“그러니까 말이지 캐나다나 미국 스트립 바에서 맥주를 마실 때 보면 양놈들은 맥주 한 잔 시켜놓고 종일 앉아 있잖아. 우리 대한국민 마도로스들이야 어디 그러나. 한잔에 오 불 하는 맥주를 계속 마시잖아. 한 번은 스트립 쇼하던 예쁜 아가씨가 내가 계속 비싼 맥주를 시켜 먹으니, 서비스로 내 테이블에 가까이 와 바로 코앞에서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거야.”

조리장의 말에 쿡과 싸롱이 일손을 놓고 침을 흘리며 동시에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안 입고요? 냄새 안 나요?”

“팁 끼워줘야 하는 거 아녜요?”

둘이 묻자, ‘냄새는, 자석들아. 선수들이 다 먹고살려고 하는 짓인데 향수 냄새밖에 더 나겠냐? 가만있어봐라, 숨이나 좀 쉬고. 글고 일하면서 들어라. 손으로 듣냐?’라고 너스레를 떨다가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국장님.

나도 인사하며 다.

일하고 계시는데 죄송해요, 브라질에서 숯 싣고 오다가 불나고, 큰 사고 없이 하역 마쳤다고 선주가 위로금과 특별 부식비를 줄 모양인데 특식비로 얼마를 청하면 좋겠어요?”

내가 말하자, 조리장이 싱글벙글하면서 대답했다.

“안 그래도 지금 양년 야그하고 있었는데, 양놈 선주들은 확실히 뭔가 다르단 말이시. 아~ 말해 뭐해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그럼, 일인당 백 불 쳐서 한 천 불 주라 하십쇼. 선원들 좋아하는 참치회와 소갈비 원 없이 먹으라 하게요.”

“알았어요. 캡틴께 그렇게 보고할게요.”

나는 웃으면서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통신실로 올라갔다.


우리가 거친 북해를 항해하는 이 시간에 남희는 독일 어느 땅을 헤매고 있을까?

전화 한 번쯤 올 때가 됐는데...

돈키호테의 묘비명에 쓰여 있다는 말과 같이 자기 삶에 미쳐서 사는 남희.

언제나 행복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녀와의 많은 추억...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위대한 능력이라지.

늘 그랬듯이 통신실에서 혼자 남희를 생각하며, 전문을 타전하고, 본사에 보낼 서류와 캐나다 입항서류를 작성하고 있는데 주방에서 냉면 퍼지기 전에 먹으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파도가 많이 칠 때는 머리가 아파서 밥맛도 별로 없다.

그리고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바닷바람에 연돌에서 뿜어져 나오는 덜 연소한 매연이 시도 때도 없이 선내로 들어온다.

그래서 더 멀미가 나기도 한다.

그래도 단체 생활하면서 때 되면 먹어야지.


사관 식당에 들어가니 주방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싸우는 듯 소란한 소리가 났다.

식사 중인 사관들에게 가볍게 눈인사하고 무슨 일인가 주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갑판장과 조기장이 양푼을 서로 뺏으려고 싸우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조리장이 웃으며 냉면을 큰 그릇에 담아 먹어야 제맛이라고 영감들이 양푼 가지고 싸우고 있다나.

애고, 이 배고파 부대들.

뱃속에 거지가 들었는지 만날 밥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다는 선원들.

그런데 보통 선원 대빵들이 아그들 보는데 밥그릇 갖고 싸우긴...

하긴 장기 항해하다 보면 웃을 일도 별로 없지.

내가 웃으며 갑판장에게 ‘보승 영감님이 양보하시죠. 남방 영감님이야 만날 밑에서 기름 묻히고 사시는데 갑판장님이 한 번 더 갖다 드시면 되죠.’라고 말하니, 갑판장이 입이 삐죽 나오면서 조기장에게 양푼을 양보했다.

그냥 나오기 뭐해서 한마디 더 했다.

오늘 저녁에 일과 끝나고 직장 영감님들과 내 방에서 맥주 한잔하자고 말하고 사관 식당으로 돌아오니 안 선장님이 한마디 거들었다.

“저 영감탱이들 전에도 냉면 먹을 때 양푼 갖고 싸우더니 또 그러네. 어이 국장, 이번 소모품 청구할 때 양푼 몇 개 더 신청하소. 그리고 싸우지 말고 양껏 먹고, 남기면 벌금이라고 해요. 삼항사는 얼른 먹고, 냉면 남긴 선원 이름 적어와요.”

캡틴의 말에 사관들 모두 미소 지었다.

모처럼 우리 캡틴이 웃겨쓰.

캡틴이 나보고 말했다.

“국장, 맛있는 냉면 얼른 드소.”

“네, 날씨도 찬 데 뭔 냉면이래. 저 어렸을 때 겨울에 먹을 게 없어 만날 냉면 아니면 수박화채나 떠먹고 살았는데...”

내 대답에 사관들이 잠깐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 또 폭소가 터졌다.

지금은 먹고사니즘에 바빠 잊혔지만, 우리가 더 젊었을 때 하늘의 별과 날아가는 새를 보고도 미소 지으며 살던 시절이 있었듯이, 먹는 것도 좋고, 또한 작은 것에도 양보하고 감사하며 웃을 수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서양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은 책이라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노벨 연구소는 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고 평했다.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은 경우가 별로 없기에 결말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돈키호테는 고향 라만차 마을에 돌아오자, 병이 생겼다.

그래서 유산을 자신의 시종 노릇을 했던 산초와 가족들에게 모두 주고 세상을 떠난다.


풍차를 거인으로 생각해서 공격하고, 비가 와 우산 대신 놋대야를 뒤집어쓰고 가는 이발사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황금투구를 내놓으라고 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듯 칼로 포도주 자루를 베고 자기가 벤 거인의 목을 보라고 외친다든지, 목동과 양 떼를 보고 기사와 군사로 착각해서 양을 죽여 목동에 두들겨 맞는 등 읽는 이에 웃음과 복선을 생각하게 해 준 장면들.

결투에서 이긴 기사가 미친 돈키호테를 치료하자고 하자, 그가 우리에 주는 즐거움이 제정신인 돈키호테가 보여주는 허당보다 더 클 거라고 주위에서 만류하기도 한다.

죽기 전에 열정이 식어 제정신으로 돌아온 돈키호테는 정상인처럼 행동하며 조용히 살다 쓸쓸히 눈을 감는다.

묘비명에 ‘미쳐서 살다 제정신이 들어 죽었다’는 글귀가 전설이 되었다.


주인공 돈키호테가 여행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해프닝을 그린 전편은 귀족과 기득권을 때리는 풍자로 대박을 터트렸다.

정작 세르반테스는 당시 빚에 쪼들려 이미 저작권 일부를 팔았기에 큰돈을 벌진 못했다.

게다가 그가 받은 인증서가 카스티야 지방에서만 유효한 이라 리스본이나 다른 지방에서 나온 해적판이 카스티야로 역수입되기도 했었다.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출세작조차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다.

작가 세르반테스는 늘그막에 수녀원에서 허드렛일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그곳 무덤에 묻혔다.

소설에 다양한 음식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와 지금도 스페인에선 매년 돈키호테 요리대회를 연다고 한다.

또한 중세 스페인 요리를 재현하는 데 아주 중요한 가치가 있는 소설이라고 한다.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는 인간을 햄릿형과 돈키호테형 두 가지로 분류했다.

햄릿은 숙부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지만, 생각은 많은데 행동은 는 형이다.

이런 유형은 실수하지 않지만, 시기를 놓치기 쉽다.

반면 돈키호테형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일단 지르는 으로 보았다.

이런 유형은 엄청난 일을 해내기도 하지만, 시행착오를 많이 겪을 수 있다.

나는 햄릿형일까, 아니면 돈키호테형 인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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