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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Apr 30. 2024

큰 배를 멈추게 한 대형 문어

태양은 가득히, 리플리 증후군


눈보라가 휘날리는 북대서양.

‘HAPPY LATIN’ 호는 거친 파도를 헤치고 캐나다 핼리팩스를 향해 가고 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항해하며 하루 세 번 어김없이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어~ 심심해. 뭐 재미있는 거 없나?"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일항사가 밥 잘 먹고 나서 기지개를 켜며 툴툴댄다.

군대나 비슷하게 배에서도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 눈에 총기를 띄기 마련이다.

"쵸사님은 초등학교 동창과 결혼하셨다면서요?"

내가 멍석을 깔아주자 갑자기 일항사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날 연애할 때 남포동에서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를 보고, 자갈치 시장에서 꼼장어 구워 먹고, 할매 회국수집에서 매워서 쩔쩔매며 개운하고 뜨거운 멸치 육수로 속을 다스리던 이야기 등이 계속 나왔다.

나도 한 뻥 하잖아.


전에 타던 고물 잡화선이 여천 삼일 항에서 화학 비료를 가득 싣고 파푸아 뉴기니로 갈 때였다.

겨울 회색빛 바다는 거친 파도와 함께 고물선의 진로를 더디게 한다.

평상시 12노트의 느린 속력으로 가는 배가 파도에 밀려 롤링 피칭하며 겨우 7~8노트로 위태롭게 항해했다.

취권처럼 흔들흔들 일주일 정도 항해하니 북회귀선을 통과하였다.

필리핀해에 들어서 파도도 수그러들고 대기 온도가 올라가 에어컨을 틀고 겨울옷도 반소매로 갈아입었다.


일요일 점심을 먹고 사관 식당 휴게실에서 마작판이 벌어졌다.

벽돌 섞고 쌓는 소리와 올랐을 때 패로 탁자를 때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정적을 깬다.

마작은 매너와 집중이 필요한 아주 재미있는 게임이다.

판을 먹을 때와 섞을 때 외에는 양손을 탁자 위로 올려서는 안 되고 할리우드 액션 몇 번 하면 퇴출 대상이다.

그리고 머리싸움이라 상대 패를 읽지 못하면 이길 확률이 아주 낮다.

잘 되는 날은 패를 받아 정리하는데 벌써 두세 틀이 맞고, 패 몇 개 바꾸지 않았는데 방이 가고, 뜨면 원하는 패가 올라온다.


배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타던 배에서는 절대 판돈이 크지 않았다.

돈 잃고 기분 좋은 사람 없으니 칩 하나에 돈 백 원 수준으로 잃어봐야 몇만 원이고 그나마 딴 사람이 맥주를 다.

중국 배는 판돈이 커서 가진 돈 다 잃으면 집을 잡히거나 심지어는 마누라까지 담보로 잡히기도 한다.

그렇게 딴 사람은 배에서 내리고 남의 부인을 데리고 살기도 한단다.

부원 식당에서는 훌라나 고스톱을 치거나 비디오를 보고, 또 장기나 바둑을 두는 등 간간이 들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소란하다.


파푸아 뉴기니에 가려면 마의 마리아나 해구 부근을 지나야 한다.

평균 수심이 7~8천m이고 가장 깊은 곳이 만 천m 정도이다.

지상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산을 갖다 넣어도 한참 남을 정도로 깊고 아직 그 속을 잘 모른다.

바닷물 색도 푸르다 못해 거무튀튀하다.

그 속엔 과연 어떤 생물이 살고 있을까?

일요일에 당직 선원과 자는 선원 외에는 그렇게 식당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배가 섰다.

경험 많은 기관장은 벌써 이상 징후를 감지했는지 불안한 기색이었다.

아니, 마의 마리아나해구에서 웬일이람?

선내 마이크로 당직 이항사의 다급한 외침이 들린다.

"선장님, 우리 배 주위에 아무것도 없고 기관실에도 이상이 없다는데 갑자기 배가 섰습니다."

기관장과 일기사는 방송 소리 나기 전에 벌써 부리나케 기관실로 뛰어갔고 캡틴과 나는 브리지로 올라갔다.

"캡틴, 기관실엔 별 이상이 없는데 엔진이 섰네. 희한한 일이시. 똥배라 스크루가 빠졌을까? 선미로 가 봅시다."

기관장의 방송에 급히 선미로 갔다.


선원들이 선미에 모여 배 밑을 쳐다보는데 캡틴이 몸을 긴 밧줄로 묶고 입에 칼을 하나 물고 바다로 뛰어들 준비했다.

평소 해군 유디티 간부 출신으로 마산 시내 하수구 똥물 속에서 며칠씩 잠도 자며 지옥 훈련을 받았다고 자랑하던 캡틴이 직접 스크루를 확인할 모양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듯이 아열대 바다에는 상어와 물뱀이 득실대 위험하다.

그런데 항해 중에 고래나 큰 거북이는 봤어도 상어 등지느러미를 배 가까이에서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상어가 큰 배 근처에는 먹을 게 없으니, 학습효과로 안 오는가?

그런데 사람이 물속에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스크루가 빠졌는지 아니면 떠다니던 와이어나 밧줄에 감겼는지 직접 들어가 볼 테니 상어가 보이면 얼른 밧줄을 잡아당겨요."

중년의 전직 유디티 대원이 비장한 각오로 나이프를 입에 물고 세상에서 제일 깊은 바닷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선원들은 냄비나 양푼에 숟가락 등 소리 낼 만한 것을 하나씩 들고 긴장해서 배 밑을 쳐다보고 있다.

온통 푸른 하늘과 태양 가득히 반사된 하얀 바다에 눈이 부셔서 제대로 뜰 수가 없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슴 졸이는 순간이 지나고, 스크루 쪽에서 갑자기 검은 먹물이 올라왔다.

아니, 웬 검은 물이야?

선원들이 상황 판단을 못 해 당황하고 있는데 선장이 수면 위로 솟구쳐 올라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함을 쳤다.

"야~ 엄청나게 큰 문어가 스크루를 감았네. 일단 죽였으니 밧줄 하나 더 내려요."

선원들이 모두 달려들어 밧줄을 끌어 올리니 다리가 어른 몸통만 하고 빨판이 솥뚜껑만 한 거대 문어가 올라왔다.

캡틴은 이미 줄을 잡고 올라왔고 엔진을 돌리자 쿵쿵 소리가 나며 스크루가 힘차게 돌아간다.


잡아 올린 문어 다리 살을 조리장이 칼로 조금 베어 맛을 보더니 짜단다.

그래서 스팀 솥에 설탕 한 포대를 넣고 다리 토막 하나를 삶으니 이건 가죽보다 더 질기네.

그래서 아주 잘게 썰어 젓갈을 담갔다.

바다 전설에 나오는 괴물 크라켄 문어는 거대한 배를 침몰시키고 선원도 잡아먹는다고 한다.




프랑스 미남 배우 알랭 들롱이 스타로 뜨게 된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미국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를 각색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리플리는 부잣집 아들인 친구를 죽이고 자신이 그 친구인 것처럼 살다가 자신이 정말 그 부잣집 아들이라고 믿어버린다.


영화가 흥행하고 리플리 증후군이란 말이 나왔다.

리플리 증후군은 자신이 꿈꾸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으며 거짓말과 행동을 계속하는 인격 장애를 뜻한다.

요즘에는 인터넷에서 타인을 사칭하고 타인이 자신인 양 거짓말을 반복하고 그것이 정말로 실제 자신이라고 믿는 정신병도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한다.

사이버 리플리 증후군은 성취 욕구는 강하지만 무능력하여 열등감, 피해 의식 등에 시달리는 사람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행동으로 절도, 사기에 살인 등 큰 범죄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역사상 유명하고 심각한 리플리 증후군 환자는 이미 있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네 번째 딸 아나스타시야 로마노바 공주가 죽었다.

폴란드 여인 샨코프스카는 자신이 로마노바 공주라고 우기다가 독일 법원에서 차르의 딸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도 미국으로 건너가 개명하고 자신이 황제의 딸 로마노바 공주라고 주장했고 심지어 그녀의 자식들도 그렇게 믿었다.

유전자 감식 결과 거짓으로 드러나자, 자식들이 크게 충격받았을 만큼 평생 자신을 차르의 딸 로마노바 공주라고 철저히 자부하고 살면서 자식들까지 세뇌한 샨코프스카가 중증 리플리 증후군이었다.


우리나라에선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던 한 여학생이 SAT 만점을 받고 하버드와 스탠퍼드 대학에 동시 합격했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취재 결과 거짓으로 드러났다.

또 동국대 신 모 교수는 교수 임용 및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 선임 과정에서 예일대 박사학위와 학력을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이 사건을 ‘재능 있는 리플리 씨’ 책 제목에 빗대어 ‘재능 있는 신 씨’로 표현해서 리플리 증후군이 우리나라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재주 많고 머리가 비상하지만 가난한 청년인 톰 리플리가 친구 필립이 자기를 개무시하고 계속 모욕을 주자 그를 살해하고 바다에 버리면서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그 뒤 리플리는 신분 세탁을 하여 필립 행세를 하며 돈을 빼내 부자가 되었지만, 필립의 친구 프레디에게 들통나자 또 그를 죽이고 죄를 필립에게 덮어 씌운다.

완전범죄가 되어 톰은 필립의 애인 마르쥬의 마음도 얻어 멋지게 사는 듯했으나 필립의 시체가 발견되고 리플리는 체포된다.

‘태양은 가득히’나 원작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이 거짓말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리플리 증후군 환자는 아니다.

폭력성을 동반하는 이상 심리 소유자 사이코패스나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르며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소시오패스 범죄자라고 할 수 있다.


김수미 누나가 TV에서 나 들으라고 '이 새끼는 입만 벙긋하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와!'라고 일갈했듯이, 나도 뻥인지 진짜인지 헷갈리며 비몽사몽간에 살고 있으니 리플리 증후군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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