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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May 02. 2024

핼리팩스발 보스턴행 완행 화물선



핼리팩스 항의 첫인상은 평온하고 조용한 느낌이었다.

하역 중에 혼자 산책하러 나갔다.

언덕이 많아 어디 서 있든지 바다와 푸른 하늘, 건물이 조화되어 아름답게 보인다.

세컨드핸드 스토아가 보여 들어가 구경했다.

예쁜 그릇과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살림 용품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난 꼭 필요한 것 아니면 물건을 잘 사지 않는다.

배를 타면서 미니멀 라이프가 몸에 밴 탓인지 빨랫감 줄이고 갈아입을 옷만 있으면 되고, 내일 먹을 것만 있으면 굳이 사서 재어 놓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넘치는 것은 과감히 남 주거나 버린다.

작은 핸드 캐리어 하나만 있으면 내 짐 다 넣고 가뿐히 옮겨 다닐 수 있다.

코르덴 상의가 보여 골라봤다.

영화나 잡지에서 외국 젊은이들이 입는 팔꿈치에 가죽 조각을 붙인 코르덴 상의를 나도 입고 싶었다.

여기선 색깔도 적당히 바래고 마음에 들었다.

아주 싼 가격에 사서 걸치고 나오다 오페라하우스가 보여 입구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오페라를 직접 본 적이 없어, 학생 때 연극을 보던 작은 무대보다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큰 무대를 보고 싶었다.

덴마크에서 상륙했을 때 우연히 오페라하우스에 갔는데 끝날 때가 다 되어 입장이 안 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대신 영화관에 가 킬링필드를 봤었다.


대항해시대 귀족의 부인이나 딸이 입던 우아한 복장에 멋진 모자를 쓴 여인들 포스터가 몇 장 붙어 있고, 쓰여 있는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입장권을 끊고 들어갔다.

넓은 무대와 많은 객석이 있어 만족하고 무대 쪽으로 가는데 손님은 많지 않았다.

앞쪽의 빈자리에 앉으니 정말 근대 유럽 귀부인 복장과 화장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음악에 맞춰 나비처럼 사뿐사뿐 춤을 추며 나왔다.

그리고 모자와 옷을 하나씩 벗어던졌다.

걸친 옷 반쯤 남기고 음악이 바뀌면서 조명도 어두워졌다.

토끼 같은 웨이트리스가 드래프트 맥주를 한잔 가지고 왔다.

그리고 선수가 발레리나처럼 춤을 추며 나머지 옷도 하나씩 벗어던진다.

아, 뭐야? 스트립바와는 또 다른 진화된 극장 무대 식 스트립쇼네.

여인의 화려한 목도리에서 떨어진 작은 깃털 하나가 내 앞에 하늘하늘 내려앉았다.

손으로 집어 코에 대보니 여인의 진한 향수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북대서양에서 거친 파도와 유빙에 시달렸던 스트레스가 단번에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핼리팩스 부두 역사 지구는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때 설립된 무역회사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북미에서 오래된 부두 중 하나이다.

영미 전쟁 때 미국 선박을 상대로 약탈전을 벌인 해적선인 사나포선들이 정박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사나포선은 정부에서 교전국의 선박을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준 민간 소유의 무장 선박이다.

보수가 따로 없는 대신 나포한 화물을 가질 권리가 있어 해적선이나 마찬가지인데 20세기 들어 사라졌다.

건물 내부에는 각종 상점과 레스토랑이 있고 수공예품이나 노바스코샤 주 전통복 등 기념품을 판매하며 레스토랑에선 직접 제조한 노바스코샤 맥주를 맛볼 수 있다.

노바스코샤는 '뉴 스코틀랜드'란 뜻이다.

마도로스가 많이 드나드는 항구는 현금이 흥청망청 움직이니 유흥 문화도 발달하기 마련이다.

주변에는 해산물 레스토랑과 바, 스트립쇼 하는 곳이 몰려있다.


대서양을 건너온 백만 명이 넘는 이민자들이 핼리팩스 21번 부두 이미그레이션을 통해 입국했다.

캐나다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이곳으로 이민 온 사람의 후손이란다.

그곳에 기념박물관을 만들어 이민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전시물과 당시 이민자들의 인터뷰, 영상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고 1층의 특별관에는 식민지 시절 원주민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다.

빨간 머리 앤을 쓴 캐나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이곳 달 하우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신문사에서 일했단다.


캐나다는 러시아 다음으로 영토가 넓다.

남한의 백 배 가까이 된다.

국가별 명목 GDP 순위가 세계 10위 권으로 세계 최상위권 경제 대국이다.

자원도 풍부하고 석유 매장량 또한 세계 3위권이란다.

영연방 회원국이지만, 옆에 붙어 있는 미국 판박이라고 봐도 된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광활한 땅 탓에 길거리에서 곰, 들소나 순록을 마주칠 수 있다.

이때 야생 동물을 자극하지 말고, 천천히 뒷걸음치고 절대 뒤돌아 뛰면 안 된단다.

캐나다 중서부의 오지인 키티마트 항에서 상륙 나갔다가 정말 곰 새끼를 만난 적이 있다.

막상 곰과 마주치니 천천히 뒷걸음치기는커녕,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우샤인 볼트보다 빠르게 뛰어 배로 도망왔지.


보통 자동차 전용선보다 겸용선이 하역이 더 오래 걸린다.

그래도 몇 시간이면 하역을 마치고, 입항해서 하루를 못 채우고 출항해야 했다.

또, 뱃고동을 길게 울리며 아름다운 스트립 댄서의 기억을 뒤로한 채 핼리팩스 항을 떠나 330여 해리 떨어진 보스턴 항을 향해 간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뱃고동만 울리고 떠나가는 새벽 화물선, 핼리팩스발 보스턴행 완행 화물선.


우리가 가수처럼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고 댄서처럼 춤을 잘 추지 못해도 기죽을 필요가 없다.

반대로 우리가 잘하는 것이 그들에겐 젬병일 수 있다.

그러니 넓게 생각하면 세상은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지금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고, 내가 있는 이곳이 제일 좋은 곳이라 생각하고 살면 세상 부러울 게 뭐 있겠는가?

나 없으면 세상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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