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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May 03. 2024

캐나다 밴쿠버 비시

흐르는 강물처럼


배를 타는 사람들은 밴쿠버를 그냥 밴쿠버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국에도 밴쿠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할 분도 계시겠지만, 목적지가 미국 워싱턴 주에 있는 밴쿠버냐,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 있는 밴쿠버냐에 따라서 입항 준비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밴쿠버에 들어가려면, 우선 선원들 미국 입국 비자를 받아야 한다.

입항하기 전에 영국에서 발간된 포트 엔트리라는 책을 보고 해도 변경된 것 등도 미리 주문한다.

글쓴이는 Vancouver Wa.이라고 표기하는 미국 워싱턴 주 밴쿠버 항에도 화물을 실으러 몇 번 들어갔고, Vancouver B.C.라고 말하는 캐나다 밴쿠버 항에도 참 많이 입항했었다.

캐나다 밴쿠버가 아마 단일 항구 수출 물동량으로는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배를 처음 탈 때 일본에서 출항하여 처음 기항한 곳이 밴쿠버 비시였고 그 후로도 셀 수 없이 많이 곡물, 유황 그리고 원유를 실으러 들어갔다.


한겨울에 북태평양의 거친 파도를 뚫고 밴쿠버 아일랜드에 도착하면, 시차와 파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울창하고 푸르른 침엽수와 함께 멀리 보이는 그림 같은 집들이 반긴다.

그리고 외항에 닻을 내리고 포트 컨트롤의 입항 지시를 기다린다.

캐나다는 입출항 서류와 모든 서류, 상품에 영어와 프랑스어 두 개가 쓰여있다.

프랑스 이민자들의 후손을 포용하기 위해 공용어가 두 개가 되었다.

퀘벡, 몬트리올 지역이 프랑스어를 많이 쓴다.

그런데 본토 프랑스어와는 많이 바뀌었단다.


박할 때 종종 낚시한다.

한쪽에선 통닭을 넣은 게 틀을 던져놓고 시간 정도 지나면 건져 올려 큰 놈만 잡아 일용할 양식으로 짭짭한다.

낚시를 던져서 상어가 올라오는 곳은 종 쳤다.

왜냐하면 상어가 설치는 곳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겨울에 입항했을 때 엄청 많은 선박이 대기하고 있었다.

내륙에 내린 폭설로 화물열차가 운행할 수 없어 많은 선박이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타고 있던 배도 예외가 아니라 한 달을 외항에 떠 있었다.

그때 운이 좋게 배가 도다리 밭에 앉았다.

낚시를 던지면 냄비 뚜껑만 한 도다리가 줄지어 올라왔다.

당시는 회를 먹을 줄 몰라 잡은 고기로 매운탕도 해 먹고 소금 뿌려서 구워 먹었다.

얼마나 많이 잡았는지 선원들 먹고 남은 고기는 소금물에 간해서 선미에 빼곡히 널어 꼬들꼬들하게 말렸는데 항해할 때 두고두고 먹었다.

게도 많이 잡아 삶아서 배불리 먹고 남은 놈은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두어 드럼은 족히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캐나다는 느슨한 거 같이 보여도 법을 어기면 가혹하게 대하는 나라이고 그곳은 낚시도 면허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선원들이야 태평양 건너 왔다가 화물만 실으면 팽하니 떠날 사람들이니 그냥 낚시한다.

배를 타는 동안 밴쿠버 비시에 그리 많이 들어갔건만, 단 한 번도 선원들이 면허 없이 낚시해서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배에 올라오는 관리들도 못 본 척 그냥 자기 볼일만 보고 갔다.




밴쿠버에서 찍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브래드 피트의 풋풋함과 함께 낚시의 매력이 잘 표현됐다.

온통 초록빛인 대자연을 배경으로 낚시하는 몸짓은 발레리나의 슬로 모션을 연상케 한다.

밴쿠버 BC는 적어도 낚시꾼들에게만큼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낚시터로 여겨진다.

은 강과 호수가 천지고, 서쪽으로는 바다가 있으며 물 반 고기 반일 정도로 낚싯대를 던지면 입질한다.

손맛을 아는 이들에겐 밴쿠버가 축복이고 행운이다.

그런데 BC 주의 낚시 법규는 상당히 까다롭다.

잡을 수 있는 어종과 크기, 어획량이 정해져 있다.

그리고 낚시 면허가 있어야 한다.

민물낚시와 바다낚시 면허가 따로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주변 청소만 잘할 수 있으면, 누구나 밴쿠버에서 낚시를 즐길 수 있다.


캐나다 사람은 거리를 걷거나 대중교통을 타고 가다 발을 밟거나 부딪치면, 밟힌 사람이 먼저 미안하다고 말한단다.

출입구에서 만나면 서로 양보하다가 못 지나간다나.

그렇다고 글쓴이 말 믿고 부딪치거나 발을 밟고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고 어영부영하다가 조 터지는 건 책임 못 진다.


6.25 전쟁 때 캐나다 참전 용사 이야기다.

6.25 참전 용사 앨프레드 콤과 더글러스 윌슨은 지금 휠체어에 의지해서 산다.

1951년부터 3년 남짓 콤은 소총수로, 윌슨은 정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두 참전 용사가 알지도 못하는 가난한 나라 한국에 가게 된 동기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전쟁 중 가장 힘든 것은 한국인들의 처참한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것이었어요."

콤이 말하자 이어 윌슨이 전쟁 중 다친 손을 보이며 말했다.

"캐나다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한국을 못 본 체할 수 없었어요. 나에겐 이 다친 손이 진짜 훈장입니다."

두 퇴역 군인은 참혹했던 당시 한국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했다.


두 병사는 한국 정부 초청으로 방한했을 때 한국이 발전한 모습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감격했다고 한다.

그들과 동료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 너무나 행복했다고 말하며,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한국을 위해 기꺼이 싸우겠다고 했다.

자기들 선택에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는 당연한 선택이었는데 한국인이 그들을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말을 마쳤다.


세상은 이런 분들이 있어서 돌아가는 모양이다.

어려울 때 도움을 받고 때가 되어 갚을 경우 이상적인 인간관계일 것이다.

은혜를 준 사람에게 직접 되갚을 수 없을 때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베푼 경우는 바로 잊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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