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이 무섭구나
4년 전쯤 남편의 은퇴가 다가오면서 걱정되는 일 중 하나가 아침과 점심 식사였다. 우리 나이 때 주부들이 흔히 하는 농담인 (그러나 심각하게 사실인) 삼식이 때문이 아니라 나 혼자 즐기던 아침과 점심밥 시간이 영원히 날아갈 버릴 위기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난 혼자 먹는 밥이 즐거웠다. 친정엄마는 그저 밥이란 식구들이 와글와글 어울려 먹어야 맛있지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이랑 밥 먹는 걸 별로 내켜하지 않으셨던 걸 보니 말 그대로 식구랑 먹어야 하는 모양)를 입에 달고 사시지만 삼십여 년 지루하게 되풀이된 주부의 일과에서 내게 그나마 유일한 즐거움이 혼자 하는 아침과 점심 식사였다.
뭘 먹느냐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제 남은 반찬에 찬밥도 좋고, 바싹 구운 식빵에 버터 한쪽도 좋고, 뭐든 쟁반에 차려 텔레비전 앞에서 먹는 여유 있는 아침이면 그걸로 되었다. 점심은 좀 다르게 어떤 날은 일부러 반죽해 떠 넣은 수제비도 먹고 멸치 다시 물까지 넣은 떡볶이도 먹고 김장김치랑 참기름을 넣어 비비는 김치말이도 좋고. 비슷한 듯 하면서 달랐던 남편에 맞추지 않고, 골고루 영양가 있게 챙기던 아들에게 처럼 신경도 쓰지 않고 편하게 상을 차렸다. 친구는 너 혼자 먹자고 새로 뭘 만드냐며 신기해했지만 난 그런 시간이 참 좋았다.
어쨌든 내 입맛에 맞게 해먹는 혼자만의 식사시간이 날아갈 순간이 닥친 셈이다. 그리고 드디어 맞닥뜨린 삼식이와 삼식을 함께 해야 하는 그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우선 일어나자마자 바로 뭔가를 먹는 게 고역이었다. 식구들 밥 준비하고 다 먹고 나간 다음에야 내 밥을 먹었는데 눈 뜨면 바로 '아침 먹자' (경상도 남자 티를 팍팍 내며)하는 남편과 상을 차려 밥상머리에 앉으면 머리도 띵하고 정신은 아직 이불속에 있는 듯한데 밥을 억지로 넘겨야 하는....
남편은 식성이 그리 까다롭지도 않고 간단한 준비는 혼자서도 잘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밥 먹는 사이사이 일어나 챙길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라 그것도 아주 성가스러웠다. 그나마 다행히 예전 주말이면 먹던 빵과 주스 간단한 달걀 요리 정도로 먹자고 남편과 합의를 보았다.
그럼에도 점점 시간이 갈 수록 밥 먹는 일이 숙제처럼 되어갔는데 몇 달이 지나 조금 숨통 트일 상황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 버릇대로 일찍 일어나던 남편이 점점 무(無) 출근에 익숙해져 늦잠을 자기 시작한 것. 그런 날이면 행여 깰까 봐 조심조심 내 밥을 요리조리 챙겨 살금살금 소리 안 나게 먹어치웠다. 실실 웃음을 흘려가며. 똑같은 빵에 똑같이 버터 발라 커피랑 마시면서도 그 스릴 있는 시간이 왜 그리 달콤한지. 그리고 그런 날이면 늦게 일어난 남편은 자기 손으로 대충 아침을 챙겨 먹어 난 한결 여유가 생겼다.
혼자 밥 먹는 게 좋다 해서 내가 이상하다든지 우리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본 것은 없다. 오히려 같이 먹는 게 괜찮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30여 년 남편은 출근하고 난 아이랑 남았고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는 혼자 먹는 아침이 당연했다. 그게 내 오랜 일상이었으니 흐트러진 요즘이 이상하고 적응이 안 되는 건 당연한 것 같다. 그런데 이 부적응을 남편에게 이해시키는 번거로운 일은 하기 싫다. 자기가 같이 있으면 좋은 줄 아는 사람이니.
때론 정말, 모르는 게 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