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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김샜다

by 대은



엄마 심부름을 해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맑고 청명하고, 아파트 마당엔 갖가지 색의 영산홍이 한가득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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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 끝마다 새로 나온 연두순 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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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래비 지각생 배롱나무에까지 새 순이 피어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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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봄의 절정이다.


처질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내 기분은 사흘 째 밑바닥 신세다. 집에 가기 싫다. 보통 이 정도면 집 둘레 한 바퀴라도 도는데 이번 주 내내 컨디션 최악이라 그것도 귀찮았다.


'카톡'하는 소리에 휴대폰을 보니 아들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말을 걸어왔다. 오호라,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네가 내 기분을 좀 펴줘야겠구나 싶어 얼른 전화를 걸었다. 뭐 하냐니까 뭔 세금 계산해 보고 있단다. 이런저런 얘길 하다 본론을 꺼냈다.


-내가 요즘 할머니 때문에 살 수가 없네.

-왜 그러셔?

-사흘 내내 출근 도장 찍고 있어.

-어! 할머니 뭔 일 있으셔?

-아니 괜히 이런저런 심부름시키면서 매일 보자 하시네. 그러고 나면 부려 먹었다고 밥 사준다고 야단이시고.

-음, 할머니 외로우시구나.

-그런데 난 바빠 코에서 더운 김 나게 뛰고 있는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에이 엄마 힘들겠네.

-거기다가 얼굴만 보면 자꾸 볶잖아. 너 언제 장가보낼 거냐고,


설렁설렁 박자 맞추고 추임새 넣던 아들 녀석이 조용해졌다. 전엔 '내가 원흉이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 하더니 이젠 그것도 없다.


-그 옛날 이모랑 엄마 빨리 시집가라고 달달 볶은 거 생각만 해도 화딱지 나는데 왜 내 아들 가지고 또 그러시는지 모르겠어. 그만하시라 해도 그때뿐이고 얼굴만 보면 되풀이하니 너무 짜증 나잖아. 어젠 저녁 먹으면서 듣기 지겨우니 그만 좀 하셔하면서 싸웠네.


속에 쌓인 게 둑 터지듯 와르르 쏟아지는데 말하다 다시 생각하니 더 짜증이 났다.


내가 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전엔 여자도 배우고 사회새활도 해야지, 난 다시 태어나면 절대로 결혼 안 한다 단언하던 엄마가 돌변을 했다. 우리 나이로 스물셋 언저리가 되자마자 '여자는 무조건 결혼을 해야지'로 슬로건을 바꿔 걸고 날 달달 볶기 시작했다. 하다 하다 안 되니까 한 살 아래 여동생을 걸고넘어졌다. 유먕 신랑감들이 좋아하는 음대생인 데다가 자그맣고 예뻐 인기 만발인데 너 때문에 시집 못 가게 생겼다고, 여기저기서 선 보자 하는데 너 때문에 못 하고 있다고.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땐 속으로 뜨끔, 이거 어쩌나 걱정이 안 되진 않았다. 그래도 버티다 스물여섯에 결혼을 했다. 그런데 그러자마자 여동생을 볶기 시작했다.


중매쟁이를 앞세워 선도 보이고, 여기저기 소개도 받게 했지만 나랑 달리 깐깐하고 의심이 많았던 동생은 죄 고개를 저었다. 결국 서른에야 떠밀려 질질 끌려가듯 결혼을 했다. 그러니 나나 동생이나 엄마의 '결혼' 타령은 정말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이젠 내 아들 가지고 날 못살게 하기 시작하다니. 아이구!


아파트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하소연을 쏟아내고 있는데 문득 아들이 말을 끊는다.


-엄마, 엄마

-응

-있잖아. 그냥 네 하면 안 돼?

-뭐?

-그냥 네, 엄마 알았어요 그러면 안 되냐고. 매번 그렇게 싸우려고 하지 마시고. 난 할머니 그러시면 재밌던데. 그러게 말이에요, 제가 왜 장가를 못 가나 모르겠어요 난 그러잖아.


김이 팍 샜다. 이런 나쁜 녀석.


-어떻게 그래? 에미라는 게 하나도 안 급하게 저러고 앉아 있다고, 그러니 애가 장가를 못 가고 있지 이런 소리나 하는데. 중매쟁이 내세워 아들 장가보낼 생각을 해야지 태평추니로 앉아 있다 그러는데.


-잘 됐네, 할머니가 그러시면, 맞네 엄마,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난 중매쟁이 찾으러 나가요, 하고 집에 와.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참~~


김도 샜지만 아들 데리고 엄마 흉보고 있는 내 꼴도 우스워 그냥 아이고, 참내~~ 소리만 하다 전화를 끊었다. 첫 손주로 그저 예쁘다, 최고다 소리만 듣고 자라 그러나 이 녀석은 할머니한테만은 마냥 말랑 풍선이네. 그럼 매사 파르르 하는 난 사랑을 못 받고 컸나? 그랬나? 그런데 이 녀석은 왜 김새게 만드는 거야? 그런데 김샌 게 방귀 뀌듯 푸시식한 건가? 바늘에 찔려 빵 하고 터지며 새버린 건가? 아아아, 봄날 나른한 기운은 그러잖아도 기력 딸리는 날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아무렴 어때, 어쨌든 다행이다. 미운 엄마 생각이 봄바람과 함께 점점 날려가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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