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덕스러운 날씨다. 이래서야 봄이 온전히 마음 놓고 오겠나 싶었는데 그래도 꽃은 피고 나뭇가지 끝엔 연두순이 매달렸다. 벚꽃 풍경이라면 꿀리지 않을 여기 아파트 마당에도 산수유, 매화에 이어 연분홍 꽃이 피어나고 있는데 지난 주말 비소식이 있었다. 동네 커뮤니티 회원들은 채 피기도 전에 떨어질 꽃이 아깝다고 한밤중까지 꽃구경 나들이를 한다고들 야단이었다. 도서관에서, 번역하는 분의 강의를 듣고 밤늦게 집으로 오면서 밤벚꽃을 봤지만 그래도 아쉬워 다음 날, 아침을 먹으며 남편더러 오후 비가 오기 전 꽃구경 나가자고 했다. 그래봐야 멀리 못 간다. 워낙 어디 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인 데다 요즘 무릎이 시원찮다고 극도의 엄살을 부려 (젊은이들 줄임말로 '할많하않'이다) 그냥 동네 한 바퀴 슬렁슬렁 걷자는 말이었다.
뒷짐 지고 천천히 걸을 요량으로 나갔는데 웬걸 첫 발 떼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아유 아까와 어째? 금방 꽃 다 떨어지게 생겼다 싶은 게 비는 아랑곳 않고 꽃 걱정만 되었다. 남편은 준비해 나온 우산을 재빨리 폈지만 난 그냥 걸었다. 아파트 안 벚나무 아래를 걷는데 지난가을 무자비하게 가지치기 한 탓에 꽃나무 모양새가 영 작년만 못했다. 게다가 바람이 부니 그나마 맺혔던 꽃도 금방 떨어져 바닥이 온통 분홍빛 꽃밭이 되어 가고 있었다.
비가 안 왔으면 바람에 하늘하늘 날리는 꽃잎이라도 봤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에 손바닥 가득 꽃잎을 얹어 들여다보다, 허공에 날려보다 하고 있는데 문득 남편이 중얼거렸다.
-난 벚꽃이 별로네.
-왜?
-너무 허망해. 활짝 폈다 싶음 이틀도 못 가 확 져버리더라고. 그게 뭐야.
-ㅋㅋㅋ
꽃구경 나들이도 한번 안 나가면서 무슨 지는 꽃 타령은. 재작년 이맘땐 막 꽃이 피어나는 걸 보고 시집에 갔다가 이틀 후 올라왔더니 전날 비에 몽땅 져 버려 무척 속이 상했었다. 그때 올해 꽃은 망했다고 억울해했는데 아무 말도 없었던 남편도 속으론 아쉬웠나 보다. 그러면 제대로 꽃을 보러 가던가.
혼자 속으로 툴툴거리긴 했지만 지는 꽃잎에 허무해지기는 나도 마찬가지. 비 때문에 날리지 못하고 바닥에 뭉쳐 있는 분홍 더미가 애처로웠다. 우린 아파트를 돌다 길 건너 공원으로 가서 마음껏 활짝 핀 목련도 보고, 명자나무 꽃도 보고, 야광나무 꽃도 (검색해서 알았음) 보면서 한참 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보면 볼수록 마음이 스산해졌다. 날도 흐리고 간간이 비가 떨어지고 바람이 부는 탓도 물론 있었겠지만 우리가 꽃에 해당하는 나이가 아님을, 지는 꽃잎에 오히려 더 가까운 나이임을 새삼 느껴 그런지 점점 마음이 시들해졌다. 둘이 서로 참 아쉽다고, 그래서 허전하다며 다시 길을 건너 집 쪽으로 돌아오는데 길 가 모인 사람들이 어수선했다. 무슨 일인가 서서 봤더니 누군가 쓰러졌는지 여러 사람이 몰려 어떤 사람을 부축을 하고 팔을 주무르고 있었다.
'어머나 어째 누가 쓰러졌나 봐~~ 괜찮아얄텐데~~'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다른 사람이 뛰어 오며 구급차가 왔다고 알려줬다. 내 뒤편 주차장에 앰뷸런스가 도착했고 거기서 내린 서너 명의 구급 대원들이 이동형 침상을 들고 급히 뛰어 왔다. 남편이 얼른 다가가 침상에 환자를 눕히는 동안 사람들 비 맞지 않게 우산을 받쳐 줬다. 비로소 얼굴이 보였는데 할아버진 줄 알았던 환자는 할머니셨고 곁에서 같이 있던 젊은 사람이 딸이라고 하며 급한 얼굴로 환자를 따라 구급차 쪽으로 쫓아갔다. 난 다행이라고, 금방 병원으로 갈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발을 떼는데 구급대원이 보호자에게 묻는 소리가 내게 그대로 들렸다.
"적극적인 처치를 원하십니까?"
순간 머릿속이 텅 비워져 버리는 것 같았다. 저게 무슨 뜻이지?
'네?' 하는 보호자의 되물음에 구급대원은 '말씀드린 것처럼 심정지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인 소생 처치를 원하시냐고 여쭸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보호자는 정신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아마 나처럼 무슨 소린가 하는지 잠시 멈춰 가만있더니 '네, 네'하고 대답했다. 난 얼른 남편을 잡아끌고 집 쪽으로 움직였다. 차마 더 이상 그 사람들을 지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집 쪽 네거리를 건너면서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앰뷸런스 불이 보였고 현관 가까이 도착했을 때야 구급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그냥 급히 이송되는 건지, 잠시동안의 심폐소생술로 되살아나신 건지. 그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생명의 끝일지도 모르는 순간을 목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허무하다. 딸이라는 사람의 옷차림을 봤을 때 그냥 근처 잠깐 볼 일 보러 나온 듯했는데 이런 황망한 일을 당하다니.
우린 둘 다 별 말을 못 하고 집에 들어와 가만 앉아 있었다. 어찌 되셨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비슷한 일을 겪으셨던 아빠 생각도 많이 났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저녁이 되었는데 문득 남편이 말했다.
-아까 그렇게 있을 게 아니라 심폐소생술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네. 난 '앉혀 두지 말고 눕히지. 그래야 피가 심장으로 잘 갈 텐데' 그러기만 했거든. 참, 바로 그 옆에 심장충격기가 있었는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거기 공중전화기 부스에 심장충격기 있거든. 지나가면서 봤는데 생각도 못했네. 아이구 참.
-그래? 그런 게 있었구나. 그걸 썼어야 했는데.
안타까움은 그저 마음뿐. 우린 둘 다 내내 아무 말도 더 못 하고 밤을 맞았다.
부디 괜찮아지셨기를. 어떤 방법으로든 괜찮아지셔서 다시 편안히 집으로 돌아가셨기를.
허무하게 내려앉은 꽃잎처럼 말고 좀 더 따뜻한 봄날을 오래 이어 가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