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마지막 이야기
여행업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와 잘 맞았다. 내가 일정을 짜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지만 형식에 맞춰 예약을 하고 변경을 하고 파일을 만들어 나가는 등 정해진 틀에 맞춰 밀어 넣는 업무. 고로 액자에 맞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 있어 업무에 대한 만족도는 꽤나 높은 편이었다. 예전에 유학원 일을 하며 교민들에게 한번 데인 경험이 있었기에 처음 몇 달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불신했으나 몇 달 겪어보니 아주 좋으신 분들이었다.
이 회사의 장점 중 하나는 사장님이 출근을 안 한다는 것이다. 회사는 서울, 부산, 그리고 뉴질랜드에 지사가 있었기에 (시드니가 본사) 사장님이 사무실에 나오는 날은 일 년에 채 몇 번 되지 않았다. 몇 번 겪어본 바로서 사장님은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분이신 것 같다. 회사가 띠걱띠걱 굴러가든 말든, 자금이 빡빡하든 아니든 간에 사장님은 모든 사람들을 품고 가는 것이 본인의 업무(?) 또는 업보(?)라고 여기시는 분이셨다. 또한 사장님은 직원 밥과 술을 굶기는 날이 없었다. 식대 100% 제공에, 냉장고에는 술병이 그득한 회사.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점심 식사를 사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대만족이었고 제나는 종조 회사의 냉장고를 상당히 부러워하며 서로의 직장을 바꾸자고 이야기하곤 했다.
소장님은 실질적으로 회사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분이시라고 할 수 있겠다. 바짝 말라서는 늘 의욕 없어 보이시는 이 분은 테니스에 굉장한 패션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시다. 종종 테니스를 보기 위해 휴가를 내시기도 했고 매 주말에는 집 근처 테니스 코트에서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으시는 분. 회사 생활 적응에 있어서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이시기도 했고 같은 동네에 살아 종종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시기도 했다.
나머지 실장님들 역시 너무나 좋은 분들이셨다. 엄마처럼 잘 챙겨주던 손실장 님, 언제나 사무실 사람들을 웃겨주던 안실장 님, 가끔은 답답했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했던 고실장 님, 그리고 펭수를 좋아하던 우실장 님까지.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함께 밥 먹고, '내일 뵙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퇴근하던 때, 철없는 내 장난에도 웃으며 받아쳐주던 모습이 생각난다.
안타깝게도 내가 사랑하던 이 회사에서의 날들은 현재 진행형이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래로 늘어나는 확진자들로 인해 여행사들은 줄줄이 폐업하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 역시 버티고 버텨보았으나 한국인 입국 금지 명령이 떨어진 후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사장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대신해서 소장님이 폐업이 아닌, 잠시 사무실 폐쇄이니 다시 만날 때까지 몸 건강히 잘 지내라고 말씀하셨다. 작별 인사를 하며 정말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난 생각을 했다. 별거 아닌 일상이 무척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집에서 몇몇개의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카페고 레스토랑이고 전부 shut down 하는 바람에 새 직장을 구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뭐 그래서, 그렇다. 이게 끝이다. 회사 문을 닫은 지 2주쯤 됐을 때였을까. 심심한 마음에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가 말이 길어졌고 내 하루를 궁금해하는 가족들을 위해 조금 더 길고 재미있게 써 내려가 보았다. 그렇게 7년간 모은 모래 조각들로, 오늘에서야 스물 여덟개의 모래성을 지어 올렸다. 들뜬 마음으로 과거를 살펴보았지만 대체적으로 슬펐고 때로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출판 제안을 하지 않을까 하는 원대한 꿈을 안고 시작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7년간 나에게 단 한 번도 해주지 못한 말, '그래도 너 참 열심히 살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이 말을 해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무척이나 감사하다.
갈고 갈은 모래들이 쌓이고 쌓여 언젠가 모래성을 쌓아 올릴 만큼이 모이면
나는 그것들을 잔뜩 손에 쥐고서는 또다시 글을 쓸 것이다.
열심히 사느라 고생많았다 지윤아!
너 참 반짝반짝 빛났구나!
앞으로는 더 행복할 거야!
읽어주었던 모두들 안녕,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