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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니맨 Jan 10. 2017

나는 실패한 사람인가?

성공과 실패의 기준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나는 OOO다 




나는 뮤지션이다. 

언더그라운드에 데뷔한 지 19년이 된. 요즘에 힙합이라면 쇼미더머니를 먼저 떠올리는 세대들에게는 듣보잡일 수밖에 없는 몇 년간 이렇다 할 활동도 없는 실력도 그저 그런 '그저 오래된' 1세대 힙합 뮤지션이다.



나는 직장인이다.

아무도 대신 알려주지 않는 내 음악을 알리고자 직접 음악산업에 뛰어들고 보니 어느새 10년을 찍은, 업계에서는 '최다 이직자'로 손꼽힐 만큼 많은 호기심으로 유통, 제작, 정책, 저작권 등 안 해본 일 없는 일 욕심부리다 제풀에 찌든 직장인이다.  




introduce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작업실에 처박혀 있거나 PC방에서 소환사의 협곡을 거닐다 아침 해가 뜰 때 즈음 나와 부지런한 이들이 이른 출근길에 오르는 시간 집으로 들어가는 미국 시차의 삶을 살고 있거나 혹은 유명해져서 돈을 벌기 위해 쇼미더머니 오디션장에서 길게 줄을 서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자유로운 영혼으로만 살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경직된 사무실에서 종일 모니터와 사랑스럽게 마주 앉아 누군가에겐 이득이 될 일과 씨름하고 틈틈이 담배를 꺼내 물어 퇴직이라는 탈출구를 상상하며 연기를 뿜어내기를 반복하다 해가지면 동병상련인 동료들과 일잔 이잔 소주잔을 부딪히며 하루하루 극심한 스트레스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나가는 삶을 더 오래 살았다.




대치동 원주민




막둥이

나는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에는 충분히 늦둥이라 불릴법한 나이에 태어나 친구들 부모님보다는 연세가 제범 많은 6.25를 겪으신 부모님과 함께 모범생 같던 누나, 운동을 잘하던 형과 매우 평범하게 자랐다. 막둥이였던 덕에 어머니의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도련님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대치동(大峙洞) 

1982년 대치동 은마아파트 (지금의 양재천)

나는 교육에 미친 동네 대치동에 있는 재건축의 아이콘 은마아파트에서 한 살 때부터 살았다. 오래된 아파트라 지하 주차장도 없어 지금은 주차 지옥이라 불리는 단지지만 옛날에는 차들도 많이 없었고 지하철은 물론 없었으며 양재천은 밤에는 위험해서 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 쉽게 말해 논과 밭이 있던 곳에 아파트 하나 세워놓은 매우 외진 곳이었다.



도곡동 타워 펠리스와 미도아파트가 들어선 최근의 양재천

참된 교육

대치동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건 매우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즈음 대치동이 교육의 메카로 알려지면서 많은 친구들이 전학을 왔고 각 지역에서 전교 1등 한다는 녀석들이 몰려들어 전학생이 올 때마다 내 등수는 한 단계씩 내려가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에는 촌지도 아마 존재하지 않았나 싶은 것이 어느 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반장이 되어 집에 가 어떻게 부모님께 얘기 하지라고 혼자서 걱정하던 때가 기억난다. 학급 임원이 되면 부모님은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고 그 결과에 따라 선생님이 예뻐하는 아이가 될지 미워하는 아이가 될지 결정되었다. 대치동 원주민 출신인 우리 집의 형편은 결코 넉넉하지 못하였고 담임선생님을 충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기에 한 학기 동안 알 수 없는 차별을 받다가 2학기에는 새로 충원된 11반으로 쫓겨나다시피 옮겨졌다. (당시 전학생이 너무 많아 2학기에 한 학급을 더 만들었다.)  




교실 이데아

아마 학교 마치고 학원을 줄줄이 다니던 1세대가 아닌가 싶은데 나 빼고 과외를 안 받던 친구가 거의 없었으니 중학교 1학년 수학, 영어 등의 첫 수업에서는 교과서를 중간부터 펴서 수업을 시작하는 선생님들의 배려가 이어졌다. (앞에는 다 알지?라는 의미다.)  


나름 속셈학원 하나에 매달리며 전국 산수 경시대회에 나가 100점도 받아본 전국 1등의 산수 영재를 수학과 등 돌리게 한건 과외를 안 시켜준 부모님이거나 기초를 뛰어넘고 상위 10%의 진도에 맞춰 수업을 진행한 선생님들 탓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정당화하고 살아왔다. 


공부에 재능이 없다고 판단한 친구들 중 잘 사는 친구들은 미국이며 캐나다로 유학을 가기 시작했고 내 뒤를 받쳐주던 든든한 친구들이 하나둘씩 떠나며 나의 내신은 점점 악화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나도 유학을 너무나도 가고 싶었지만 말도 못 꺼낼 형편이었기 때문에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꼬리칸

당시 성적이 반에서 중간 정도만 되어도 설국열차로 따지면 꼬리칸에 속한 격이었고 선생님들은 쪽지시험에서 틀릴 때마다 다양한 사랑의 매로 엄청나게 때렸던 시절이었기에 매일 마다 하도 맞아서 허벅지가 부르터 바지와 달라붙곤 했는데 집에 와서 그걸 떼어내며 쓰라림과 지긋지긋한 주입식 교육에 대한 반항심으로 다른 것들에 눈을 돌려야 하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설국열차의 꼬리칸

제법 운동신경이 좋았던 나는 야구부, 농구부, 아이스하키 부등이 있는 휘문에 다니고 있다는 게 운명처럼 느껴져 야구부에 들어가기 위해 나름 단식투쟁 등 시위를 했으나 역시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대치동에 살았으면서 그 정도 돈도 없었냐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당시 원주민들과 이주민들의 격차는 매우 컸고 특히 자가 가정 위주인 길 건너 미도아파트와 전세 가정 위주의 은마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차이는 입고 다니는 옷만 봐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확연이 차이가 났고 조금 과장하자면 센트럴파크를 사이에 둔 맨해튼의 중심가와 할렘 같은 느낌이었다. 




DC TRIBE

그리하여 돈 없이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했고 부잣집 친구가 무려 CD플레이어에 미국 힙합 음악들을 가지고와 들려준 것이 계기가 되어 부탁을 해 공테이프에 녹음 후 집에서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들으며 힙합 음악에 빠지게 되었다. 참고로 힙합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만한 사이트인 DC TRIBE 역시 대치동 후배들이 만들어 운영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대치동의 참된 교육방식이 일찍부터 알려준 것이다.

"네가 할 수 있는 걸 찾아라"




언더그라운드 힙합




레오나의 패시브 

공부가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던 중 힙합 음악을 좋아하던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 마스터플랜에서 공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잘 나가는 뮤지션들의 주변에만 머무르던 욕심과 실력, 존재 감등 없는 게 많았던 못 나가는 뮤지션이었다. 나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나와 팀을 이루거나 크루를 했던 사람들은 당시 승승장구하며 훌륭한 힙합 뮤지션으로 성장하였다. 

리그오브레전드의 레오나 스킬들

리그오브레전드의 '레오나'라는 서포터 챔이 있는데 자신이 효과를 준 상대에게는 같은 팀원들이 더 큰 대미지를 줄 수 있는 '햇빛(Sunlight)' 패시브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스킬이 자신보다는 아군을 돕기 위한 스킬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자신 있어하고 좋아하는 주 캐이 기도 하다. 참고로 요즘 핫한 오버 워치의 주 캐는 역시 지원형 캐릭터인 '시메트라'이다. 


어쩌면 앞에 나서서 맹활약하는 것보다는 옆에서 지원해 주는 게 내 성향에 더 잘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시 또 모르지 않나. 내 게이지가 꽉 차면 오버 워치의 '시메트라' 궁처럼 포털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을 지원할 수 있는 날이 올지.  




그렇게 1998년 4월 25일. 18살 고삐리 시절에 친구들을 따라 막연하게 신촌의 한 공연장에 가서 랩을 했고 마치 호그와트를 처음 본 해리포터의 느낌이 그랬을까. 그 순간부터 그냥 인생이 힙합이 되었다.


 당시 생겨나기 시작한 댄스그룹에 들어오라는 기획사 아저씨들의 말들을 귓등으로 듣고 한국에 진정한 힙합을 정착시키는데 일조하겠다며(물론 한국에 힙합을 정착시킨 건 나 따위가 아니라 당시 마스터플랜에서 함께 공연하던 모든 형들이라고 생각한다.) 극심한 배고픔을 참아내며 샌프란시스코의 히피들처럼 이곳저곳을 내 집처럼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살았다.  


Riota, CB MASS, PDPB, NE STYLE, Melodian 등의 팀들을 거쳤고 822, Dokkebeez 등의 Crew활동, MC신건 솔로 등 많은 활동을 했었지만 다른 동료들에 비해 인지도도 실력도 결과물도 매우 낮은 편이었다. 그러던 중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고 내 기억이 맞다면 MP에서 랩을 하는 사람들 중 현역에 입대한 1호였다. DJ 중에서는 Schedule 1으로 활동하던 일섭이 형이 1호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입대와 동시에 훈련소에서 나와 상무대 기계화학교에서 전차 조종 후반기 교육을 받고 있을 무렵 미리 작업해 두었던 정규 1집 'Lyricist'가 발매되어 소포로 날아왔다. 



여하튼 그 시기는 매우 나빴다. 

다시는 일생동안 일어나지 않을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진출하며 나라 전체가 축제였고 힙합 음악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며 백댄서 없이 랩만 하는 사람들이 TV 음악프로에 나오기 시작한 때였다. 


넌 랩 했다면서 여기서 뭐 하고 있냐는 군대 선임들의 비아냥을 들으며 한국 래퍼들 중 현역 1호로 입대한 설움을 스스로 달래야 했고 심지어 유격장에서 화생방에서 나와 다시 한번 들어가기 싫으면 랩 하라는 중대장의 협박스러운 지시에 CS탄에 찌든 수백 명의 올빼미들 앞에서 무반주 랩을 시전해야 하기도 했다. 하필 그 시기에 군대를 가라고 추천(?)한 아버지를 잠시 원망하기도 했지만 당시 막내였던 나는 많게는 열 살 정도 차이나는 힙합 하는 형들을 보며 내 미래를 조금은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대중 힙합가수'가 되지 않는 이상 랩으로 먹고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어린 나이였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런 게 되는 건 싫었다. 랩으로 먹고살 수 있을지에 대한(클럽 공연으로 만원을 받아 팀원들이 나누는 당시 상황상) 고민을 하게 되었고 제대 후 여러 가지로 변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언더에서 활동하며 회사를 다니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꾸준히 한길을 걸으며 내 생각이 틀렸었다는 것을 보여준 뮤지션 여러분들 존경합니다.)





너저분한 이력서




10년이다.

내가 이 일을 배워 '아무도 대신 알려주지 않아 철저히 외면받는 내 음악을 직접 알리자'라는 이유로 이왕이면 내 음악을 직접 알릴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자 하여 음악산업일꾼으로 발을 들여놓은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내 음악을 알리기는커녕 음악 작업조차 하고 있지 못할 만큼 어느새 뮤지션보다는 직장인에 매우 근접한 상황이 되었다.


최근에는 다시 잠시라도 뮤지션으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이 꿈틀대고 다른 업종의 일에 대한 호기심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척박한 뮤직 비즈니스 생태계에 대한 염증이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풋내 나는 애송이

디자인을 전공한 탓에 디자인 회사에 들어갔지만 월요일에 출근해 금요일에 집에 가거나 한 달에 보름 정도를 사무실 근처 사우나 혹은 사진 스튜디오 가림막을 침대 삼아 생활해야 했던, 힘들어 그만두겠다고 하면 팀장을 시켜주겠다는 말에 설득당하며 한화 이글스의 권혁 부럽지 않게 혹사당하던 사회 초년생 노예였다. 




양상추의 중요함

음악회사에서 일을 해 보고 싶어 음원 유통사에서 일을 했다. '기승전 잘되면 니 덕, 잘 안되면 내 탓인', (음악의 퀄리티와는 무관하게) 엄청 잘 나가거나 못 나가는 음원들을 유통하며 In-N-Out의 Double Double Burger 중간에 낀 양상추 같은 업무를 치열하게 하던 담당자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EXO의 '으르렁', 빅뱅의 'FANTASTIC BABY', 2NE1의 '내가 제일 잘 나가'등등 등등 소위 대박 난 수많은 음반들에 0.1% 정도는(지금 생각해 보면 0.00001% 정도였다.) 기여했다고 자부심을 가지던 때도 있었다.


퇴사하며 5명에게 일을 나누어 주면서 (혼자 5인분의 일을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3대 기획사의 유통담당을 동시에 맡았던 유일한 담당자로(별 의미 없지만) 남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 양상추 같은 업무를 강하게 기피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무(모)한 도전

사업을 하겠다며 일찌감치 IT 관련 동업을 하다가 이 세상 모든 사장님에 대한 존경심만 얻게 된 직원들보다 수입이 적은 풋내기 스타트업 창업자였으며 근거 없는 자신감에 음반을 제작하겠다고 무리하다 너무 소중한 것들을 잃은 오만한 도전도 하였다. 이 두 번의 무모한 도전은 내가 정말 원하지 않던 대가를 돌려주고 말았다.  




던짐

lol의 브론즈 티어를 경험한 유져라면 이 단어의 참 의미를 알 것이다. 억울하고 속상하니까 '관심'좀 달라는 얘기다. 나는 한때 브론즈 5까지 떨어져 해저에서 허우적 댔지만 멘틀을 단단히 잡은 후에야 비로소 브론즈를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음반 제작 실패로 모든 걸 잃은 나는 브론즈를 탈출한 단단한 멘틀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했고 결국에는 내 인생을 던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망가져감을 알면서도 방치할 뿐 누군가가 손을 뻗어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체 게바라 코스프레

안쓰러워 보였는지 그만두었던 직장에서 돌아오라는 따뜻한 권유를 마다하고 이왕 던진 인생 마음을 비우고 좋은 일이라도 해보자, 혹은 모두가 꺼려하는 일에 총대를 한번 매 보자 정도의 생각이었을지 불합리한 음악산업을 정의롭게 만드는데 보탬이 되겠다며 현실보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희생 없이 버틸 수 없던 바른 음원 협동조합의 일을 하면서 마음을 조금 추스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미래를 위해 음악을 하려는 학생들에게 뮤직 비즈니스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거마비 정도의 돈을 받으며 교수라는 타이틀을 경험해 보기도 했었다. 





저작권과 노동권

계좌의 가뭄이 오랫동안 지속되며 목말라하고 있을 때쯤 새로 생긴 음악저작권협회에서 제의가 와 일을 하게 되었다. 좋은 팀원들을 만나 나름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하지만 임원들의 업무는 오직 자신을 위한 정치였고 1년 반이 안되게 다니면서 그중 1년 정도는 월급을 제때 받은 적이 없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남의 권리를 지켜 주겠다며 노동자의 권리인 급여를 못 받고 일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심해졌고 동료 직원들을 의 제의로 퇴직일까지 미루면서 노동조합 위원장을 맡아 사측과 교섭을 진행하던 때도 있었다. 퇴사 후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밀린 월급과 퇴직금을 받았고 덕분에 저작권법뿐만 아니라 관심 없었던 노동 3권 등 노동법에 대한 것들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해외 도피(?)




你好(ni hao)

아마 많이 지쳤었나 보다. 몇 년간 한국에서의 일들을 뒤로하고 미련 없이 떠나와 중국의 수도인 북경에 있는 회사로 가게 되었다. 최근 저작권 보호가 시작되며 음원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에 한국음악을 유통하고 저작권을 관리하는 등의 일을 맡아서 하였다. 


가끔은 겁도 없이 언어도 모르고 문화도 모르는 낯선 곳에 왜 왔는지에 대해 자문자답하기도 하고 직원들에게 독재자로 불리던 사장의 이해할 수 없는 독단적인 회사의 운영방식에 말문이 막힐 때면 백 투 더 퓨쳐의 자동차 드로리언을 타고 돌아가 경솔한 선택을 했던 몇 달 전의 나를 붙잡아 설득하고 싶은 순간이 적지 않았다. 결국 3개월 만에 중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보다 명확해진 새로운 도전을 위한 준비를 하기로 했다.




Hello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잠시 동안 후유증을 겪기도 하였다. 그 덕분에 다시 한번 지금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천천히 고민해 볼 수 있었고 감사했던 몇몇 회사들의 좋은 제의를 고사하고 미국을 경험해 보는 것으로 결심하였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하던 후회할 수 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스스로에게 되물어보니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다행히 미국에서도 한국음악을 전 세계에 배급하고 저작권을 징수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동시에 어학원을 다니며 빠른 적응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어도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다. 어쩌면 상당히 안정을 찾을 수 있는 한국에서의 자리를 걷어차고 조금은 무모하게 새로운 세상에 나온 만큼 또다시 처음부터 시행착오를 거치며 좌절하고 넘어져도 더 성장할 수 있는 경험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성패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언제나 주관을 가지고 원하는 일을 거침없이 도전해 왔지만 힙합 뮤지션으로서도, 디자이너로서도, IT 사업가나 음반제작자로서도, 협동조합의 이사로서도, 신생 저작권협회의 일원으로서도, 노동조합의 위원장으로서도,  중국까지 가서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뮤지션으로서도 이미 은 퇴각이고 돈은 어느 정도 벌었지만 사업한답시고 모으지도 못했고 한 가지 업무의 프로페셔널이 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다양한 값진 경험과 시야를 얻었다.




아직 우린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100세 시대라고 한다. 도깨비의 공유처럼 1000년을 살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회사에 의지하며 살 수 있는 기간은 50살에서 60살 사이일 것이다. 이제 은퇴 후의 인생은 길어졌고 좋은 스펙으로 대기업에서 일하거나 알랑방귀 끼며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도 장단을 맞추며 조직에서 버티는 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인생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더 길게 보기로 했다.


앞으로도 도전해 보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이 기다리고 있다.

또다시 스타트업도 도전해 보고 싶고 다양한 나라와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고 제대로 된 앨범도 다시 발매하고 싶고 글들이 쌓이면 책도 내고 싶고 보다 전문적인 강의도 하고 싶다. 언젠가는 돈도 많이 모아보고 싶고 좋은 사람과 가정도 꾸리고 이쁜 아이도 낳아보고 싶다. 이것저것 해보느라 남들보다 조금 늦을 수도 있지만 설렘 반, 두려움 반. 그런 인생이다.


나는 실패한 것인가?

아마도 10년 후의 내가 그 대답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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