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restaurant)의 기원에 대한 단상 3
무엇을 먹을 것인가? = 무엇을 과시할 것인가?
술집이나 다방과 마찬가지로 레스토랑 역시 도시의 높은 물가에 적응해 나가기 위한 한 가지 방식이다. 도시의 아파트 부엌은 좁고 별도의 식사 공간이 존재하지 않을 때도 있다. 밖에 나가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는 것은 도시인들이 좁은 아파트에 갇혀 있지 않기 위해서 공동의 공간을 공유하는 한 방법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도시는 사적 공간에서 공적 공간으로 사람들을 끌어내고, 이는 공적 공간을 사회화와 과시적 소비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 에드워드 글레이저, <도시의 승리-도시는 어떻게 인간을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나?>, 229-231pp
두 번째 포스팅에서의 요지는 레스토랑의 등장이 사람들을 사적 공간에서 공적 공간으로 끌어내는 역할을 했고, 그것이 당시 사회 변화(혁명)에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 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레스토랑과 같이 도시 안에서 생겨난 '공적 공간'이 '사회화'와 '과시적 소비'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레스토랑이 사회 변화의 촉매제로서의 공적 공간의 역할을 했다는 필자의 생각이 큰 무리가 없다면, 이것이 곧 에드워드 글레이저가 이야기하는 공적 공간이 사회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레스토랑이 사회화뿐 아니라 과시적 소비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을까? 여러 SNS 채널에 올라오는 온갖 종류의 음식 사진들을 떠올려보자. 또 몇 년 전부터 TV와 유튜브 등에서 유행하고 있는 먹방과 쿡방 열풍도 마찬가지다. 최근의 이런 풍토들이 공적 공간이 과시적 소비 공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먹는'다는 행위가 곧 무엇을 '과시'하길 원하는가를 의미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화든 과시적 소비든 현대사회에서 무엇을 '먹는'다는 것이 '무언가'를 먹는 행위 이상의 어떤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걸까? 두 번째 포스팅에서 '취향의 문제'를 언급했던 어느 블로거의 글에서 이 질문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을 수 있다. 해당 블로거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의 문제를 '취향'의 문제와 '신념'의 문제 두 가지로 구분하여 이야기한다. ‘어떤 소스와 조리법을 이용할 것인’지가 취향의 문제라면, ‘어떤 재료를 이용할 것인지’는 신념의 문제라는 블로거의 이해는 매우 통찰력이 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취향의 문제를 붙든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념의 문제를 생각한다. 런던의 거리에서 누군가 분필로 휘갈겨 놓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은 우리가 ‘우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먹는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누군가는 도덕적인 이유로 육식을 거부한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땅에 떨어진 과일만을 먹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는 공장식 축산이 전염병균을 배양하며 이것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또 누군가는 의학적으로 동물성 단백질이 암세포의 성장을 켜고 끄는 버튼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다른 누군가의 무시할 수 없는 주장에 따르면, 스스로를 신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한다. 인간은 신이 아니라 동물이며 맹수를 먹는 맹수이므로 육식을 먹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누군가는 의학적으로 인간이 12개의 필수 아미노산을 외부로부터 섭취해야 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것이 육식이라고 한다. 채식은 충분치 않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육식을 한다면 어떻게, 채식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신인가, 동물인가? 인간은 살기 위해 먹고 싼다. 동물도 살기 위해 먹고 싼다. 인간은 먹고 싸는 행위 사이에 ‘생각한다.’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동물로부터 구별된다. 신념의 문제는 중요하다.
-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우리는 우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먹는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에서 채식주의자 순례자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Vegetarian이었던 폴란드에서 온 Lukas와 Vegan이었으던 캐나다에서 온 Maxime과는 꽤 많은 날들을 함께 걸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온 요리사 Charly도 많은 날들을 함께 했는데, 그는 Non-Vegetarian이었다. 나는 이 세 명과 함께여서 순례길을 즐겁게 완주할 수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 같았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해 어느 알베르게(Albergue)에서 묵을지를 고민하며 동네 bar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다른 세 사람의 대화가 갑자기 논쟁적으로 바뀌었다. '채식주의'에 대한 토론이었는데, 전날 저녁부터 결론이 나지 않은채 이어져 온 토론같았다. Non-Vegetarian인 Charly는 다른 두 사람이 채식주의자인지가 된 이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해하지 못한다기 보다 동의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Lukas와 Maxime은 자신이 채식주의자가 된 이유를 열심히 설명했지만, Charly는 전혀 설득되지 않았다. 요리사인 Charly는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좋은 육류를 구할 수 있고, 채식보다 더 좋은 육식을 즐기며 살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역시나 결론이 나지 않은채 대화를 대충 마무리하고 우리는 알베르게로 이동했다.
채식주의자와 비 채식주의자가 함께 길을 걷는 데 있어 무엇을 먹을 것인지가 크게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나를 비롯한 비 채식주의자들은 채식주의자들의 '신념'을 존중했고, 우리는 되도록 채식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 노력했다. 채식주의자인 Lukas와 Maxime에게 무엇을 먹을 것인가의 문제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닌 분명한 '신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비수기인 겨울의 순례길은 문을 닫는 알베르게가 많아 주방 시설을 갖춘 알베르게를 찾지 못하거나, 혹은 마을에 제대로 된 마트가 없어 저녁을 만들어 먹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저녁을 레스토랑에서 사 먹어야 한다. 무엇을 먹든 오로지 잘 '먹기'만 하면 되는 사람에게는 이런 상황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먹는 문제에 있어 '무엇'을 먹는지가 중요한 사람에게는 큰 문제다. 어느 힌두교도가 오로지 소고기 메뉴만 있는 식당에 갔을 때 처하게 될 난감함과 마찬가지로 채식주의자에게 무엇을 먹을 것인지는 '신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Lukas는 채식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지키기 쉽지 않은 이런 난감한 상황을 많이 경험해본 것 같았다. 그는 채식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한 비상용 채식 음식을 항상 구비해서 다녔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어야 하는 날이면, 다른 사람들이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요리를 먹는 동안 그는 배낭에서 비상용 채식 음식을 꺼내 끼니를 해결했다. 얼핏 보기에는 참 맛없어 보이는 음식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맛있고 행복하게 먹었다.
캐나다에서 온 Maxime과는 순례길 이틀째인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에서 만나 순례길이 끝나는 순간까지 함께 걸었다. 순례길에 있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가족과 같았다. Maxime의 어려움은 곧 나의 어려움이었고, 나의 어려움은 곧 Maxime의 어려움이었다. 순례길에서 나를 가장 어렵게 했던 부분은 체력이었다. 나보다 체력이 훨씬 좋았던 Maxime은 언제나 나를 격려하며 함께 길을 걷기 위해 노력해주었다. 반면, Vegan인 Maxime을 가장 어렵게 했던 문제는 먹는 문제였다. 나는 언제나 그와 함께 채식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태어나서 고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안 먹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고기가 없이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그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같이 아시아 이민자들이 많은 나라에서 주로 살았었기 때문에 Vegan으로 사는 데 큰 어려움을 겪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작은 소도시를 가더라도 아시안 마켓(Asian Market)에 가면 두부 같은 고단백 식자재를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작은 마트에서도 대부분 Vegan용 식자재를 팔았기 때문에 어려울 일이 없었다는 거였다. 근데 유럽에 오니 채식주의자를 위한 배려가 너무 부족하다며 항상 분노를 표했다. 결국 순례길 막판에 그는 나와 함께 고기를 먹었다. Vegetarian용 메뉴가 따로 없는 레스토랑에서 특별히 채식 메뉴를 요청했는데 형편없는 요리가 나왔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매일 매일 30km 이상을 걸어야 하는 강행군 속에서 그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하며 소시지를 주문했다. Maxime은 마지막으로 고기를 먹은 게 2년 전이라고 말하며 씁쓸한 표정으로 소시지를 먹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의 문제는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생존과 직결될 만큼의 중요한 '신념'의 문제인 것이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먹을 것인가의 문제는
생존과 질결 될 정도의 '신념'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