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restaurant)의 기원에 대한 단상 2
‘레스토랑’에 있는 시간이 좋아 ‘레스토랑’을 먹으러 온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는 이제 삶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과 신념의 문제가 되었다. 취향의 문제는 ‘어떤 소스와 조리법을 이용할 것인가’를 붙들고, 신념의 문제는 ‘어떤 재료를 이용할 것인가’를 붙든다. 18세기 파리에서는 취향의 문제를 붙들었다. 원래 ‘레스토랑’은 ‘공간 이름’이 아니라 '음식 이름'이었다. 닭고기나 쇠고기로 만든 수프같은 음식을 레스토랑이라 불렀다고 한다. ‘음식 이름’이 ‘공간 이름’이 된 것은, 마튀랭 로즈 드 샹투아소(Mathurin Roze de Chantoiseau)가 생토노레 가(街) 근처에 ‘레스토랑’을 상호로 내건 식당을 내면서부터였다. 그의 레스토랑은 기존의 식당들과 좀 달랐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기존의 식당들은 어떠했기에? 기존의 식당에서 주인은 음식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커다란 ‘공동식탁’에 냈고, 손님들은 식탁 주위에 빙 둘러앉아 그것을 먹었다. 공동식탁이었기 때문에 식당은 손님들 개개인의 취향을 맞출 수는 없었다. 주인이 오늘 송아지고기 요리를 내놓는다면 손님은 그것을 먹어야 했다. 닭고기가 먹고 싶다고 손님이 떼를 써본들 소용 없었다. 샹투아소의 식당은 책자 형식의 메뉴를 만들어 손님들에게 자신이 먹을 음식을 고르게 했다. 주문을 받으면 그때그때 1인분만 소량을 만들어서 냈고, 웨이터로 하여금 손님들의 식사 시중을 들도록 했다. 샹투아소의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들은 제대로 대접받는다고 느꼈다.
샹투아소의 식당이 인기를 끌면서, ‘베리(Véry)’, ‘메오(Méot)’, ‘보빌리에(Beauvilliers)’ 등 샹투아소를 따라한 것이 분명한 식당들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여기서 또 한번의 도약이 일어났다. 프랑스식 식사 방식 대신 러시아식 식사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기존의 프랑스식 식사가 음식을 한꺼번에 차려놓고 하인들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하는 방식이었다면, 러시아식 식사는 식사에 순서를 부여함으로써 하인들이 음식을 차례대로 하나씩 내오게 했다. 프랑스 요리는, 우리가 아는 프랑스 요리가 되었다. ‘에피타이저-본 요리-디저트’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시스템이 바뀌자 사람들의 행동도 바뀌었다. 이제 손님들은 에피타이저로 무엇, 본 요리로 무엇, 디저트로 무엇을 먹을 것인지, 그리고 와인은 어떤 와인을 마실 것이며 커피는 어떤 커피를 마실 것인지를 직접 정해야 했으므로 사람들은 더 많은 말을 해야 했다. 그들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두고 토론했다. 이것은 어째서 맛있다, 무엇과 무엇은 궁합이 맞다, 아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취향’이 문제가 됐다. 레스토랑은 제각각인 취향들을 맞추기 위해 어떤 소스와 조리법을 이용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또 손님들은, 음식이 차례대로 하나씩 나왔기 때문에 세 시간 혹은 네 시간까지도 늘어난 식사 시간 동안 취향의 문제를 논했다. 취향의 문제는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등 거의 모든 영역으로 뻗어나갔다. 레스토랑은 언젠가부터 음식을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게 됐다. 사람들은 ‘레스토랑’에 있는 시간이 좋아 ‘레스토랑’을 먹으러 왔다. 음식 이름은, 그렇게 공간 이름이 됐다.
-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레스토랑의 기원을 조사하다 흥미로운 블로그 포스팅 하나를 발견했다. 이 블로그에서는 restorative라는 '음식 이름(스태미너 수프)'이 restaurant이라는 '공간 이름(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으로 변화된 과정에 또 다른 스토리 하나를 보태고 있다.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레스토랑 등장 이전의 식당에는 메뉴(menu)라는 것이 없었다. 기존의 식당은 요리사가 조리하기로 마음먹은, 혹은 가지고 있는 재료로 조리 가능한 음식을 대량으로 만들어 공동식탁 형태로 제공했다. 손님에게 음식 선택권은 없었다. 오로지 주인이 내놓은 음식을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선택만 있었을 뿐이다. 레스토랑이 등장하면서 책자 형태의 메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먹고 싶은 음식을 손님이 직접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에피타이저 - 본 요리 - 디저트'로 식사 제공 방식의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선택의 폭이 더욱 늘어났다. 레스토랑은 이제 개별 손님의 취향에 맞춰 '어떤 소스와 조리법을 이용할 것인지'를 고민해야만 했다. 이러한 변화 과정을 블로그 저자는 '취향의 문제'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관통시키고 있다.
음식 선택권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두고 서너 시간씩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토론의 이슈는 단순히 무엇을 먹을 것인가의 문제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등 거의 모든 영역의 이슈가 메뉴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그렇게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고,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게 되자 "사람들은 '레스토랑'에 있는 시간이 좋아 '레스토랑'을 먹으로 왔고, 음식 이름은 그렇게 공간 이름이 되었다."
TV 프로그램인 <수요미식회> 150화에 레스토랑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진행자 중 한 명인 이현우는 레스토랑의 기원에 대한 두 가지 설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 설은 첫 번째 포스팅에서 살펴봤던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다. 그런데, 전혀 다른 관점의 두 번째 설이 흥미롭다. 간단히 말하면, 프랑스 혁명 이전에 귀족 밑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이 혁명 이후 귀족으로부터 독립하여 식당을 열였고, 서민들이 그 곳에서 음식을 먹으며 토론을 즐겼는데 이것이 레스토랑의 기원이 됐다는 것이다. 첫 번째 설의 배경은 프랑스 혁명 이전, 두 번째 설의 배경은 프랑스 혁명 이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이 진실이든 레스토랑의 등장이 프랑스 혁명 전후의 사회 변화상과 관련를 맺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혁명을 전후로 한 프랑스 민중의 의식 변화를 레스토랑이라는 공론의 장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을까? 혁명 이전, 레스토랑에 모인 시민들이 중구난방으로 벌였을 토론이 혁명의 불씨 역활을 했다고 추론해보는 건 어떨까? 혁명 이후 귀족으로부터 독립한 요리사들의 레스토랑이 혁명 이후의 불안정한 분위기 속에서 공론의 장 역활을 했고, 여기서 이루어졌던 토론이 혁명 이후 프랑스 민주주의 사회(society)의 토대가 되었다고 추론해보는 건 또 어떨까?
이와 관련하여 인사이트를 주는 내용이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도시의 승리>에도 있다.
술집이나 다방과 마찬가지로 레스토랑 역시 도시의 높은 물가에 적응해 나가기 위한 한 가지 방식이다. 도시의 아파트 부엌은 좁고 별도의 식사 공간이 존재하지 않을 때도 있다. 밖에 나가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는 것은 도시인들이 좁은 아파트에 갇혀 있지 않기 위해서 공동의 공간을 공유하는 한 방법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도시는 사적 공간에서 공적 공간으로 사람들을 끌어내고, 이는 공적 공간을 사회화와 과시적 소비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 에드워드 글레이저, <도시의 승리-도시는 어떻게 인간을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나?>, 229-231pp
레스토랑은 단순히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레스토랑이 등장했던 시기는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의 맹아가 움트던 시기다. 다양한 메뉴를 제공했고, 시민들이 직접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혁명을 전후하여 높아진 민도(民度)와 레스토랑에서의 취향의 문제는 전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부패한 절대군주 체제에 분노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싶어한 시민들의 욕망은 각자의 취향을 존중했던 레스토랑의 운영방식과 매칭률이 높다. 취향을 쫓아 모인 사람들의 관심이 테이블 위의 음식을 넘어 사회 변화로까지 다다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게 레스토랑에서 누적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알게 모르게 혁명을 추동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레스토랑은 사적 공간에 머물던 사람들을 공적 공간으로 끌어냈고, 그렇게 공적 공간에 모인 사람들을 각성시켜 혁명의 길로 이끌었다고 비약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