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eddie Journey Mercury Apr 09. 2017

1. 이름 모를 산 정상에서 홀로

자연, 무관대함, 두려움

필리핀에서는 루손섬(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가 있는 섬) 북부 산악지대 일대를 돌아보는 것이 주요한 여정이었다. 나는 마닐라의 니노이 아퀴노 공항(Ninoy Aquino Airport)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바기오(Baguio)로 직행했다. 


* 바기오는 마닐라에서 버스로 4-5시간 거리에 위치한 도시로, 해발 고도 약 1,500m의 고원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평균 기온이 18 내외로, 선선한 날씨 덕분에 필리핀 최대의 피서 지역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스페인 식민지 시절 휴양도시로 건설되기 시작한 도시다. 또한, 필리핀 대통령의 여름 휴양지인 'The Mension House'도 바기오에 위치하고 있다. 


바기오에서 3박을 머물고 사가다(Sagada)로 향했다. 사가다는 고도가 약 1,600m로 바기오에서 4-5시간 가량 더 북쪽으로 이동해야 갈 수 있는 도시다. 사가다에서 2박을 한 후에는 계단식 논으로 유명한 바나우에(Banaue)로 향했다. 원래 계획은 바나우에에서 2박 정도를 하면서 바나우에 주변과 바타드(Bathad)의 계단식 논(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둘러 볼 예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바나우에에 도착해 숙소를 몇 군데 돌아다녀 보니 바나우에에 머물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바나우에라는 동네 자체가 바타드로 향하는 관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보니 관광객과 그들을 상대하는 호객꾼이 뒤섞여 정신이 하나도 없고, 숙소 상태도 생각보다 별로인데 반해 가격은 비쌌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사가다에서 잠시 만났던 한 인도 여행자가 본인이 바타드에서 1박을 했는데 바나우에에 머무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며 강추를 했던 일이 떠올랐다. 결국, 즉흥적으로 바타드로 향했다.


바기오는 흡사 우리나라의 산동네 느낌이 났다. 산등성이 곳곳에 집들이 빼곡히 가득해 독특한 도시 경관을 만들었다.
사가다의 장례 전통이었던 행인코핀스(Hanging Coffins). 시체를 태아처럼 동그렇게 말아 관에 넣고, 저렇게 절별에 매달아 놓는다.

바나우에에 도착하여 여기저기 해메다 바나우에에서의 숙박을 포기하고 바타드로 향하기로 한 시각이 PM 2:30분 경이었다. 바타드로 향하는 지프니 막차가 PM 3:00라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정류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막차는 이미 출발한 후였다(참고로, 필리핀의 지프니는 만원이 되면 바로 출발하는 시스템이라 미리 일찍 가서 기다려야 한다). 고민 끝에 트리이시클(오토바이 옆에 사람1-2명이 탈 수 있는 의자가 붙어있는 필리핀의 교통수단)을 타고 바타드로 가기로 했다. 처음에 400페소를 불렀던 것을 280페소까지 깍아서 탔고, 바타드까지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내려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출발했다. 


이게 바로 필리핀의 지프니다. 시골로 가면 지붕에도 사람들이 올라가 운행하고 한다.
이게 바로 필리핀의 트라이시클이다. 나는 저런 부실해 보이는 걸 타고 바타드로 향하는 험악한 산길을 이동했다.(출처 : 인터넷 어디선가)

어딘지 모를 산 정상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곳곳에 산등성이에서 흘러내린 낙석 투성이었고, 오가는 차는 거의 없었으며, 사람이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갑자기 나에게 다 왔다고 내리란다. 주변에 마을이라곤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다. 여기서 15분만 걸어 내려가면 바타드라고 한다. 마을까지 데려줘야되는거 아니냐고 따졌더니 경사가 심하고 길이 안 좋아서 트라이시클로 내리막길을 가는 건 위험하다며 전혀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어이가 없긴 했지만, 말도 안 통하고 이러다가 사람도 없는 곳에서 무슨 봉변이라도 당하면 대책이 없겠다 싶어 280페소를 주고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깨에 20kg이 넘는 배낭을 매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15분이면 못 갈 정도는 아니다 싶었다. 그런데 15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낙석으로 가득한 도로가 나타나자 점점 무서워졌다. 그러다 저 멀리 포장도로가 끊어지고 공사중인 포크레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열대 우림같은 산 투성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잘 관리된 산이 아닌, 이 나무와 저 나무가 서로 뒤엉키고 온갖 잡초가 무질서하게 서로 뒤엉켜 자라고 있는 그런 천연의 산이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연은 참 무관대하구나. 인간이 있건 말건 떨어질 낙석은 무자비하게 떨어지고, 이 수풀림에 갇히면 그냥 그대로 죽는거겠구나. 이 때부터였다. 자연은 아름다운 관찰의 대상이 아닌 공포의 대상이구나를 느끼기 시작한게.


나는 바로 이 곳에서 혼자 버려졌다. 
이름 모를 산 정상에서 바타드로 가는 길은 이렇게 곳곳이 낙석 투성이었다. 정말 위험했다.
저 멀리 포장도로가 공사장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불안과 공포가 엄습했다. 


사가다에서도 비슷한 공포를 느끼긴 했다. 사가다에서 동굴 투어를 했는데,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고씨동굴이나 이런 곳처럼 안정장치가 다 되어 있고, 아름다운 조명도 설치해 놓은 그런 곳을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안정장비는 커녕 조명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은 암흑천지였다. 빛이라고는 현지 가이드가 들고 다니는 가스랜턴이 전부였고, 안전장치는 오로지 가이드를 신뢰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다고 동굴이 평범하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암흑 속에 얼마나 깊은 절벽인지 알 수도 없는 낭떠러지를 손과 발로만 암벽을 붙잡고 건너야 했으며, 길도 따로 없어 사람 몸 하나가 겨우 통과할 수 있는 틈새를 통과해 돌아다녀야 했다. 


몇몇 암벽을 어렵게 통과하고 나니 더 이상 내가 도전할 수 있는 곳이 아니겠다 싶어, '도저히 못 가겠다 다시 돌아가자' 했더니 현지 가이드에게 '여기서 다시 올라가는 게 더 힘들다. 이미 들어온 이상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말 그대로 공포였다. 발을 한 번만 잘못 디디거나 미끄러져도 끝조차 알 수 없는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그런 공포 말이다. 자연은 그렇게 무관대했다. 


현지 가이드는 참 대단했다. 저렇게 뜨거운 가스랜턴을 들고 험한 동굴 안을 잘도 돌아다녔다.

팔라완 코론섬에서도 그랬다. 호핀투어를 하며 처음으로 에메랄드빛 투명한 바다 밑을 스노쿨링으로 보는 체험을 했다. 온갖 열대어와 산호초들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10분이고 20분이고 스노쿨링을 착용하고 바다로 얼굴을 들이밀면 나오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급경사로 수심이 깊어지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도 모르게 공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또 다른 암흑이었다. 어디까지 저 수심이 이어질지 모르는 그런 깊은 수심 속의 푸르른 암흑. 만약 냐가 바다 한 가운데, 저 암흑속에 빠진다는 생각을 하니 엄청난 공포감이 들었다. 


코론에 와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왜 유럽 사람들이 동남에와서 해양 스포츠를 그렇게 주구장창 즐기는지.


14년전, 인도를 여행할 때 느끼지 못했던 자연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계속 느끼고 있다. 약간의 위험과 불안정감에도 내 몸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내가 원래 이렇게 겁이 많았던 사람인건가(???). 


초기 인류가 자연에 느꼈을 어떤 두려움, 혹은 경외감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무관대한 자연이라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말이다. 어쩌면 자연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경이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현대에 이르러 자연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게 되면서부터가 아닐까? 앞으로 남은 여행기간 동안 나는 자연에 대해 또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매거진의 이전글 0. Prologu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