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큐슈에서 지키지 못한 약속
내가 좋아하는 사케를 마실 수 있는 괜찮은 곳이 있다고 해서 무작정 떠나게 된 기타큐슈.
그런데 여행 직전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무거운 맘으로 비행기에 올랐고, 기타큐슈에 도착해서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곳을 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래도 좋아하는 사케를 마시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일단 그곳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굴다리를 지나 시내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이자카야 '아이(藍、)'. 조심스레 문을 열었더니 사장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예약은 못 했는데 1명 자리가 있냐고 일본어로 여쭤보니 다찌석 한가운데 자리를 내어주신다. 오른쪽에는 한국인 커플, 왼쪽에는 일본인 친구들로 보이는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일단 이곳에 온 목적인 '아라마사'를 한 잔 시키고 안주 주문을 하려고 보니 모두 일본어 손글씨다. 나는 일본어를 말할 줄은 알지만, 한자를 읽지 못한다.
그래서 구글 맵 리뷰에 있는 사진을 사장님께 보여드렸다. 그런데 사장님도 이게 무슨 메뉴인지 모르시는 게 아닌가! 갑자기 옆에 일본인 손님들이 도와주겠다며 나섰다. 자기들이 찾아보겠다며 일본어로 구글 맵을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똑같은 사진을 찾아냈고, 밑에 달린 리뷰까지 사장님께 보여드렸다. 그럼에도 사장님은 당당히 말씀하셨다.
"이게 뭐야 대체"
순간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 사소한 혼란이 싫지 않았다. 옆좌석 손님들의 약간의 오지랖과 친절함, 그리고 사장님의 엉뚱함 덕분이었을까.
이곳에 어떻게 찾아오게 됐는지, 일본에 얼마나 자주 오는지, 일본을 왜 좋아하는지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사장님께서 내 이름을 물어보신다. 그리고는 다찌석에 앉아 있는 일본인 손님들의 이름까지 하나하나 알려주신다. 물론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냥 그 순간 나 또한 이곳의 오랜 단골이 된 느낌이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술은 적당히 마시고 계산을 부탁드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 귀한 '아라마사'를 서비스로 주시는 게 아닌가. 한 잔이 채 남지 않아 잔술로 판매하지 못하고 계셨던 걸 선뜻 내어주셨다.
가게를 나서는 길에 손님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사장님께는 내일 또 오겠다고 했다. 정말 내일 다시 오려고 했고, 꼭 다시 와서 이 온기를 한 번 더 느끼고 싶었다.
그런데 다음 날 컨디션이 더 나빠졌다. 그래서 결국 그곳을 다시 찾지 못한 채 다음 일정이었던 후쿠오카로 떠났다. 후쿠오카에 가서도,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지키지 못한 약속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혹시나 사장님이 기다리시진 않았을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회사에서 너무나 힘든 하루를 보냈던 나에게 잠시나마 위로가 된 곳.
'내일' 또 오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또' 오겠다는 약속은 꼭 지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