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영 번역가가 추천한 어니스트 베커의 대표작
[편집자 주] 노승영 번역가 인터뷰 중에서 추천한 책의 일부를 발췌해 소개합니다.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한빛비즈, 2019)을 추천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태도가 어떻게 개인과 사회의 병리 현상으로 나타나는지 탐구한 명저입니다. 베커의 또 다른 저서 『악으로부터의 도피』가 필로소픽에서 출간될 예정인데―제가 번역하지는 않습니다―한국에서도 베커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죽음의 부정
저자 어니스트 베커
출판 한빛비즈
어니스트 베커가 암으로 죽기 직전 인터뷰했던 미국 작가 샘 킨의 서문 (초록)
<죽음의 부정>과 <악으로부터의 도피>에 나타난 베커의 철학은 네 가닥의 끈으로 엮은 매듭이다.
첫 번째 가닥. 세상은 끔찍하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자연에 대한 베커의 해석은 월트 디즈니와 공통점이 거의 없다. 어머니 자연은 이빨과 발톱을 피로 물들인 채 자신의 피조물을 찢어발기는 잔혹한 암캐다. 베커 말마따나 우리가 살아가는 창조 세계에서 유기체의 일상적 활동은 "온갖 종류의 이빨로 물어뜯고, 식물의 줄기와 동물의 살과 뼈를 어금니를 짓이기고, 기뻐하며 육질을 게걸스럽게 식도로 내려보내고, 먹이의 정수를 자신의 체제에 통합하고, 그러고 나서 악취와 가스를 내뿜으며 잔여물을 배설하"는 것이다.
두 번째 가닥. 인간의 행동의 기본적 동기는 자신의 기본적 불안을 다스리고 죽음의 공포를 부정하려는 생물학적 욕구다. 인간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죽을 운명인 세상에서 결국 무력하고 버려진 신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포의 근원이다. 무에서 생겨나 이름, 자의식, 깊은 내적 감정, 삶과 자기표현에 대한 고통스러운 내적 열망을 가지는 것, 이 모든 것을 가지고도 죽어야 한다는 것."
세 번째 가닥. 죽음의 공포가 어찌나 압도적인지 우리는 이 공포를 무의식에 묻어두려 한다. '성격의 필수적 거짓'은 무력함의 고통스러운 자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첫 번째 방어선이다. 모든 아이는 성인에게서 힘을 빌리며, 신과 같은 존재의 특징을 내면화함으로써 성격을 창조한다. 내가 전능한 아버지와 같다면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성경의 방어기제-빌헬름 라이히가 '성격 갑옷'이라고 부른 것-안에 얌전히 머무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으며 세상이 만만한 척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는 시간이 망가뜨릴 수 없는 영혼을 사기 위해 자신의 몸을 억압하고, 불멸을 사기 위해 쾌락을 희생하며, 죽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꽁꽁 싸맨다. 우리가 성격의 방어 요새 안에 웅크리고 있는 동안 삶은 우리에게서 달아난다.
사회는 우리의 타고난 무능력함에 맞서는 두 번째 방어선을 치는데, 그것은 영웅 체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영속적 가치가 있는 일에 동참해 죽음을 초월한다고 믿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국을 정복하고 신전을 건설하고 책을 쓰고 가족을 이루고 부를 쌓고 발전과 번영에 이바지하고 정보사회와 전 세계적 자유 시장을 창조하는 일에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가짜 불멸을 얻는다. 인간의 삶에서 주된 임무는 영웅이 되어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모든 문화는 은밀한 종교성이 깃든 교묘한 상징체계를 구성원에게 제공해야 한다. 이는 문화 간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본질적으로 불멸 기획 사이의 전투, 즉 성전(聖戰)임을 뜻한다.
네 번째 가닥, 악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우리의 영웅 기획은 더 많은 악을 세상에 불러들이는 역설적 결과를 낳는다. 인간의 갈등은 나의 신과 너의 신이 대적하고 나의 불멸 기획과 너의 불멸 기획이 대적하는 생사의 투쟁이다. 인간에게서 비롯한 악의 뿌리는 인간의 동물적 본성이나 영역을 지키려는 공격성이나 타고난 이기심이 아니라 자존감을 느끼고 필멸성을 부정하고 영웅적 자아상을 얻으려는 욕구다. 최고를 향한 욕망이야말로 최악을 낳는 원인이다. 우리는 세상을 쓸어버리고 완벽하게 하고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고 신의 적으로부터 정화하고 악을 섬멸하고 인간의 눈물에 바래지 않는 석고 도시, 즉 천년왕국을 세우고 싶어 한다.
베커는 파괴적이지 않은 영웅주의의 두 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사회 일반에 대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무의식적 개인으로 이루어진 대중이 전쟁의 도덕적 등가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학에서 밝혀낸바 사회는 언제나 수동적 신민, 강력한 지도자, (우리가 죄책감과 자기 증오를 투사하는) 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증오해야 하는 것은 인간 희생양이 아니라 빈곤, 질병, 억압, 자연재해 같은 비인격적 대상이다. 증오는 불가피하지만 여기에 지성과 지식을 접목하면 파괴적 에너지를 창조적 에너지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남다른 개인은 지혜에 이르는 고대의 철학적 길을 걸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처럼 베커도 우리에게 죽음을 연습하라고 충고한다. 죽음에 대한 자각을 기르면 미망에서 깨어나고 성격 갑옷을 벗고 의식적으로 공포를 직면할 수 있다. 이 자기 분석의 길을 따르는 실존적 영웅이 평균적 인간과 다른 점은 자신이 사로잡혀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그는 성격의 미망 속에 숨지 않고 자신의 무능력과 연약함을 직시한다. 미망에서 깨어난 이 영웅은 대중문화의 상투적 영웅상을 거부하고 우주적 영웅주의를 받아들인다. 그러면 무비판적이고 자기방어적인 의존의 사슬을 떨쳐버리고 선택과 행위의 새로운 가능성과 변화와 끈기의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는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우리의 미래 임무는 각 사람이 지구촌-친족의 연합-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를 악용해 옹졸하고 부족적이고 편집증적인 성격으로 자신을 감싸 더 피비린내 나는 유토피아를 건설할지, 버려진 자들을 모아 공감의 공동체를 이룰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인간이 자유의 수단을 소유하는 한 미래에 대한 모든 희망은 가정법으로 진술해야 한다... 만일 어느 먼 미래에 이성이 우리의 자기파괴적 영웅주의를 정복해 우리가 스스로 퍼뜨리는 악의 양을 줄일 수 있다면, 죽음의 부정과 악의 지배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해 준 베커에게 큰 공로를 돌려야 할 것이다.
베커의 연구가 철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신학자에게 어떻게 활용되고 계승되는지 궁금한 사람은 어니스트 베커 재단(http://ernestbecker.org)에 연락하면 소식지와 강연 및 대회 공지를 받을 수 있다.
저자인 어니스트 베커의 서문 (초록)
이 책에서 나는 죽음의 공포가 보편적임을 밝히고자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의 보편성은 인간학의 여러 분야에서 수집된 자료를 하나로 묶는 끈이며 (사실의 산더미 아래에 묻히고 '진정한' 인간 동기에 대한 지루한 논란으로 모호해진) 인간 행위를 놀랍도록 명료하게 이해하는 열쇠다. 우리 시대의 식자는 자신이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짐을 짊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소비할 수 없을 만큼 과잉 생산되는 진실이다.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은 진실이 호리호리하고 날렵하며 일단 발견하기만 하면 인류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20세기가 몇십 년 남지 않은 지금 우리는 진실에 짓눌려 질식할 지경이다. 빼어난 글이 이토록 많고 천재적 발견이 이토록 많으며 이 발견의 넓이와 깊이가 이토록 거대한데도, 세상은 여전히 악의 길을 걷고 마음은 여전히 침묵한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세계 박람회에서 이름난 과학 학술대회가 열렸는데, 근처에서 신무기를 시연하는 소음 때문에 연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연사는 이 불필요한 훼방꾼을 참아주면서도 미래는 군사가 아니라 과학에 달렸다며 일침을 놓았다. 하지만 1차 대전은 지구 상에서 무엇이 가장 우선인가를 만인에게 보여주었다. 올해(1973년_옮긴이) 전 세계 국방 예산이 2040억 달러인 것을 보면 우선순위는 여전히 분명하다.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조건은 어느 때보다 열악한데 말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런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쓸모없이 과잉 생산되고 있는 글 무더기에 왜 두툼한 책 한 권을 보태는 거냐고. 물론 여기에는 취미, 이끌림, 끈질긴 희망 같은 개인적인 이유들이 있다. 경험의 통합과 형상과 더 큰 의미를 향한 충동인 에로스도 빼놓을 수 없다. 내 생각에 지식이 쓸모없이 과잉 생산되는 한 가지 이유는 사방에 흩어진 채 오만 가지 목소리로 앞다퉈 외쳐대기 때문이다. 지식의 하찮은 단편들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지는가 하면 중대한 세계사적 통찰은 눈길을 끌지 못한 채 처박혀 있다. 이것은 박동하는 생명의 중추가 없기 때문이다. 노먼 O. 브라운은 위대한 세상에는 에로스가 더 필요하고 분쟁이 덜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지성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입장을 통합해 "무익하고 무지한 논쟁"을 해소할 수 있는 조화를 드러내야 한다.
내가 이 책을 쓴 근본적 이유는 인간과 인간 조건에 대한 견해의 바벨탑에 조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다. 나는 인간학에서 종교에 이르는 여러 분야에서 최고의 사상을 아우르는 종합의 시대가 무르익었다고 믿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무리 싫은 관점이라도 그 속에 진실의 고갱이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면 배척하거나 부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인간 지식의 문제는 반대 견해를 반박하고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이론적 구조 안에 포괄하는 것임을 점차 깨달았기 때문이다. 창조적 과정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어딘가 망가져야 제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내 말은 자신의 연구를 돋보이게 하려면 강조점을 과장하고 진실의 다른 판본에 대해 경쟁적으로 맞세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 학문 세계를 구축하면서 저자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과장에 휩쓸리고 만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경험주의자인 정직한 사상가들의 견해에는, 그가 아무리 극단적으로 표현했더라도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문제는 과정 아래에 놓인 진실을 찾고 지나친 교언이나 왜곡을 잘라내어 진실을 제자리에 놓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쓴 두 번째 이유는 지난 수십 년간 타당한 진실들을 이렇게 짜 맞추면서 문제들이 나의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나는 프로이트와 그의 해석자와 계승자가 품은 사상과 현대 심리학의 정수라 할 만한 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으며, 마침내 성공을 거뒀다고 자부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내 학자적 영혼의 평안을 위한 시도이자 지적 사면을 위한 청원이다. 이 책은 내가 쓴 최초의 성숙한 저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에서 이루고자 하는 주된 목표 중 하나는 심리학의 모든 논의를 (아직도 우뚝 선 산맥인) 키에르케고르에 접목함으로써 프로이트 이후의 심리학을 개관하는 것이다. 이로써 나는 심리학적 관점과 신화종교적 관점이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주된 바탕은 오토 랑크의 연구이며, 나는 그의 웅장한 사상 체계가 지닌 타당성을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랑크의 연구는 진작 이런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했다. 내가 이 점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거기서 이 책의 값어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