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마치고] 오바마 자서전 1권 <약속의 땅>의 노승영
[편집자 주] 버락 오바마.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참 많다. 제44대 미국 대통령이라는 공식 직함 이외에도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 '하버드로리뷰 최초 흑인 편집장 출신의 지식인' '임기 중 노벨 평화상 수상자' 등등 얼핏 떠오르는 것만도 여럿이다. 그런 그는 책과의 인연도 꽤나 깊다. 취임 전 베스트셀러를 써낸 작가이면서 취임 후에는 매년 애독서를 공개한 독서가이기도 하다. 그가 퇴임 후부터 매달린 자서전 1권이 국내에도 번역돼 나왔다. 920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과 씨름하고 난 노승영 번역가로부터 소감을 들어 봤다.
약속의 땅
-이번에 작업한 책을 세 문장 이내로 소개한다면?
누구보다 자의식 강한 대통령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드문 기회입니다.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에게 부여된 책임과 권한을 생생하게 간접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바마가 변화와 희망을 내세워 당선된 뒤 통합을 추진하다 좌절하는 과정은 한국 정치에도 묵직한 교훈을 선사합니다.
-특별히 어떤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지? 이 책을 읽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나?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모든 후보와 참모들에게 추천합니다. 이 책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 토론에서 승승장구하는 방법, 대통령이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는 실전 선거 지침서로 손색이 없습니다.
-혹시 이 책을 피해야 할 독자가 있다면?
오바마는 임기 내내 공화당의 막무가내식 반대에 발목을 잡혀 국정 수행에 큰 애로를 겪었습니다. 상대 진영을 사사건건 비난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뜨끔할지도 모릅니다.
-이번 책을 번역하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나 놀라웠던 것이 있다면?
인간 오바마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오바마가 포장된 이미지를 중시하고 화려한 언변과 외모로 대중에게 어필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번역하면서 세상을 바꾸려는 그의 열망이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역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오바마는 문장을 짧게 끝맺지 못하는 작가입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대부분 마지막 구나 절이 한없이 늘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가 문장에 욱여넣은 의미들을 고스란히 번역하면서도 수월하게 읽히도록 번역하느라 시간과 노력을 많이 쏟아부어야 했습니다.
-요즘 보통 하루 일과는?
『약속의 땅』 전후로 까다로운 책들을 번역하고 있어서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여 30분가량 작업실 청소를 하고 나면 퇴근할 때까지 영어 문장과 씨름합니다.
-코로나가 준 변화가 있다면?
원래 혼자서 일하는 직업이어서 코로나 이후에도 달라진 점은 거의 없습니다. 출퇴근할 때 마스크를 쓰는 것 말고는 예전과 똑같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평소 관심 있는 분야나 주제, 저자는?
19~20세기에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되던 영어 소설에 관심이 있습니다. 요즘 짧은 분량의 연재 웹소설과 오디오북이 인기를 얻고 있던데, 저작권이 해제된 연재소설을 번역하여 낭독해보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작업이 잘 안 풀려 나갈 때 대처 방법이나 습관이 있다면?
작업실 앞에 고봉산이라는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둘레길을 넓게 돌면 1시간 30분가량 걸립니다. 적절한 번역문이나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컴퓨터를 끄고 산책하면서 머리를 식히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더군요.
-번역에 대한 어떤 모토나 원칙이나 소신이나 나름의 생각이 있다면?
독자가 책을 중간에 덮지 않고 끝까지 읽어내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 글맛과 긴장감, 교훈 등을 적절히 배합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번 번역서 이외 추천하고픈 신구간이 있다면?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한빛비즈, 2019)을 추천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태도가 어떻게 개인과 사회의 병리 현상으로 나타나는지 탐구한 명저입니다. 베커의 또 다른 저서 『악으로부터의 도피』가 필로소픽에서 출간될 예정인데―제가 번역하지는 않습니다―한국에서도 베커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책에서 특별히 뽑아서 추천하고픈 단락 베스트 5 (이유나 의미를 부기해도 좋습니다)
#158쪽. 오바마의 유명한 선거 구호 “Yes, we can”을 “그래, 우린 할 수 있어”가 아니라 “아니, 우린 할 수 있어”로 번역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문단입니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패배한 뒤 오바마가 한 연설은 그의 캠페인 연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연설로 손꼽힙니다.
나는 말했다. “우리가 준비되지 않았다거나 노력해봐야 안 된다거나 노력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여러 세대의 미국인들은 우리 국민의 정신을 요약한 단순한 신조로 답했습니다. 아니, 우린 할 수 있어.” 청중이 이 구절을 북장단처럼 연호하기 시작했다. 액스가 상원의원 캠페인의 구호로 제안한 이후 아마 처음으로 나는 저 세 단어(Yes we can)의 힘을 온전히 믿게 되었다.
#546~547쪽.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건강보험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의 고결한 선택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 말을 했다. “바로 이거예요. 이게 모든 것의 핵심이에요. 당신에게는 지금 역사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드문 기회가 찾아온 거라고요.”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만 말해도 충분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인디애나 남부의 배런 힐, 노스다코타의 얼 포머로이, 미시간 어퍼반도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나와 함께 낙태 지원 조항을 자신이 찬성할 수 있는 수준까지 다듬은 바트 스투팩 같은 노장 정치인들은 보수적 지역구의 적극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동참을 결심했다. 콜로라도의 벳시 마키, 두 명의 젊은 이라크 참전 용사인 오하이오의 존 보치에리와 펜실베이니아의 패트릭 머피 같은 정치 신예들도 힘을 보탰다. 사실, 설득할 필요가 가장 적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잃을 게 가장 많은 사람들이었다. 버지니아주의 드넓은 공화당 우세 지역에서 간신히 승리한 서른다섯 살의 인권 변호사 출신 톰 페리엘로는 법안에 찬성표를 던지기로 한 결정을 설명하면서 이들의 정서를 대변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재선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잖아요.”
#566쪽. 노벨 평화상 수상 소식에 대한 아이들의 귀여운 반응이 웃음을 자아냅니다.
“내가 노벨 평화상을 받는대.”
그녀는 “정말 잘됐다, 자기”라고 말하더니 돌아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한 시간 반 뒤에 아침을 먹고 있는데 말리아와 사샤가 식당에 들렀다. 말리아가 책가방을 어깨에 메며 말했다. “좋은 소식 있어, 아빠. 아빠가 노벨상 받았어…… 그리고 오늘이 보[오바마 가족의 애완견]의 생일이야!”
“게다가 사흘 연휴라고!” 사샤가 한마디 거들며 작은 주먹을 흔들었다. 둘은 내 뺨에 입 맞추고는 학교로 갔다.
#785쪽. 불법 이민자 자녀에게 대학 진학 기회를 주는 드림법의 통과는 비록 좌절되었지만, 막판에 찬성표를 던진 클레어 매캐스킬 상원의원의 사연이 감동적입니다.
우리는 다섯 표 차이로 졌다.
나는 웨스트 윙 2층에 올라가 세실리아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녀와 젊은 팀원들이 투표를 지켜보고 있었다. 대부분 눈물을 흘렸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 안아주었다. 나는 그들의 노고 덕에 드림법이 과거의 어느 때보다 통과에 가까이 갔으며 우리가 여기 있는 한 마침내 목표를 이룰 때까지 계속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말했다.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며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케이티가 표결 결과를 출력하여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훑다가 클레어 매캐스킬이 찬성표를 던진 것을 보았다. 나는 클레어에게 전화를 연결해달라고 케이티에게 부탁했다.
클레어가 전화를 받자 내가 말했다. “법안이 막상막하가 아니라면 당신이 반대표를 던질 줄 알았어요.”
클레어가 말했다. “젠장, 대통령님,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제가 투표할 차례가 되었을 때 제 사무실에 찾아왔던 아이들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녀는 감정에 북받쳐 목소리가 잠겼다. “그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어요. 제가 무관심하다고 아이들이 생각하게 할 수는 없었어요.” 그녀가 마음을 추스르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제가 선거 자금을 두둑이 모금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이민에 대해 물러 터졌다고 공격할 공화당 광고에 반격해야 하니까요.”
#882~883쪽. 오사마 빈라덴 암살 작전이 성공을 거둔 뒤 뿌듯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해하는 오바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라를 이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들과 더불어 또 다른 생각도 찾아왔다. 이런 단결력, 이런 공동의 목표 의식은 테러리스트를 죽인다는 목표에 대해서만 가능한 것일까? 이 물음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아보타바드 작전의 성공에 자부심과 만족감을 느꼈지만 건강보험 법안이 통과된 날 밤만큼 희열을 느끼진 않았다. 우리 정부가 빈라덴을 잡을 때 발휘한 것과 같은 수준의 전문성과 결단력을 우리 아이들을 교육하고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제공하는 일에 발휘하도록 이 나라를 결집할 수 있다면, 그와 같은 인내력과 자원을 빈곤 퇴치나 온실가스 감축이나 보편 보육에 발휘할 수 있다면, 미국이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했다. 보좌진조차 이런 발상을 유토피아적이라고 치부할 것이었다. 이런 사실―우리가 공격을 막아내고 외부의 적을 물리치는 문제 말고는 무엇으로도 이 나라의 단결을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은 대통령으로서 나의 모습이 내가 바라는 모습과 얼마나 동떨어졌는가를, 아직 할 일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가를 보여주는 잣대였다.
*노승영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공저)을 썼으며, 『통증 연대기』 『스토리텔링 애니멀』 『나무의 노래』 『자본가의 탄생』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말레이 제도』로 한국과학기술도서상 번역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