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urney Aug 20. 2021

몸의 기억은 말보다 강하다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감정 연구>의 권택영

[편집자 주] 북클럽 오리진에서 연재했던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인터뷰를 재개한다. 우리 사이에 이런 물음이 자연스러운 안부 인사말 중 하나로 안착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서로 간에 끼니 못지않게 (어쩌면 더 중요하게) 마음의 양식을 챙기는 것도 공동체의 안부에 필요한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좋은 책과 가까이하는 분들과 서로 연결되고 책의 발견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첫 번째 권택영 교수와의 문답을 소개한다. 영문학자이면서 과학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보여온 권 교수는 최근에 일면을 보여주는 저서 <감정 연구>를 출간했다.


-이번에 출간하신 <감정 연구>를 세 문장 이내로 소개하신다면?

 

감정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구체적인 몸의 반응이고 건강 그 자체라는 것을 고전 심리학과 최근 뇌과학의 견해로 밝혀줍니다. 감정은 상상력과 독창성의 근원이라는 것, 판단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러기에 감정을 풍부히 하는 것은 판단의 정확성을 높이는 길이라는 것을 노래, 미술, 영화를 통해 설명합니다.

감정 연구

권택영

글항아리


-특별히 어떤 독자에게 권하고 싶으신가요?


쉽게 우울해지는 분, 감정을 억압하고 사는 분, 감정을 풍부히 하는 길을 알고 싶은 분, 공감을 통한 치유를 경험하고 싶은 분, 조금씩 실수를 줄여가고 싶은 분. 덜 괴롭게 사랑하는 법을 알고 싶은 분. 즐겁게 살고 싶은 분, 건강히 오래 살고 싶은 분, 충만한 삶을 원하는 분, 이 모든 것을 위해 나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은 분들께...     


-굳이 이 책을 피해야 할 독자가 있다면?


한 번도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린 적이 없는 분, 항상 행복한 분, 실수하지 않는 분, 건강히 오래 살고 싶지 않은 분.     


-일찍부터 이성적 사고와는 대비되는 ‘무의식’ ‘욕망’ ‘감정’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고, 그런 책도 많이 내셨습니다.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으신가요?


제가 운 좋게 문학 공부를 옛날 미국의 중부 보수적인 동네에서 했습니다. 셰익스피어로 시작하여 르네상스, 밀튼, 미국의 시, 영미 소설, 비평, 등을 골고루 섭렵했지요. 그리고 문학이란 인간의 욕망이나 무의식, 감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예술이라고 느꼈습니다. 돌아와서 라캉, 프로이트 등의 심리학을 작품과 함께 가르치고 공부했어요. 당시 즐겁게 공부하던 대학원 학생들에게 항상 감사합니다. 그리고 보니 아주 특별한 계기는 없네요.     


-비교적 연로하신 편인데도 여전히 활발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책을 내시는 것 같습니다. 나름의 비결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있는지요?


비결은 없고 공부하는 사이사이 노는 게 좋아서요. 읽고 느낀 것을 그냥 두면 잊으니까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책을 계속 쓸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있으면 왜 사느냐고 묻게 됩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아직 답이 없거든요.      


-영문학도이면서 늘 과학을 포함해 다른 분야의 새로운 지적 동향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간의 지적 관심의 편력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지적 편력이라기보다 그저 미국에서 발간되는 영문학의 주요 저널들의 글들을 읽다 보면 자연히 패러다임이 보입니다. 데리다, 라캉, 푸코 등,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정신분석, 후기 구조주의들을 다루던 저널들이 어느 순간부터 다윈, 생물학, 현상학, 심리학, 뇌과학 등으로 방향을 바꾸거든요. 그저 호기심을 가지고 최신 저널들을 꾸준히 읽다 보니 그리 되었어요. 물론 저의 감정과 그런 변화가 맞아 들어간 것도 있겠지요.     


-지금은 어떤 분야, 어떤 문제에 관심이 많으신지요?


헨리 제임스의 자유간접화법,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 프로이트의 언캐니,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그리고 기억, 감정, 공감의 문제를 좀 더 파고들고 싶어요. 당분간은 인간이 누구인가를 더 알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울하지 않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궁리합니다. 아마도 행복은 너무나 가까이 있어 잘 보이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코로나로 인한 개인 일상이나 심경에 변화가 있다면?


무엇보다 어린아이들이 안됐어요. 작은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고 천진하게 웃고 뛰노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사람을 멀리해야 하고 기분전환을 못하고... 문을 닫는 가게 등등... 우울증과 불면증이 다시 시작됩니다. 그래서 <감정 연구>에서 제가 그토록 주장한 친근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져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주변의 작은 사물들, 길가의 작은 꽃과 풀잎에 정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이 빨리 지나가고 다시 사람을 만나고 그러면서도 주변 사물들도 챙기는 시간이 올 수 있기를 빕니다.      


-요즘 일과는 어떠신지요? 각별히 오래 지켜온 습관이나 수칙이 있으신가요?


그런 것은 없어요. 그저 잠을 충분히 잔 날은 즐겁고 행복합니다.     


-지금 구상 중이거나 집필 중인 책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앞으로 써보고 싶은 책은?


자유와 고독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인 공감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습니다. 가장 쉽지 않은 덕목이거든요. 독창성에 대해 늘 그리움을 품고 삽니다.     


-최근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을 한두 권 추천해 주신다면? (이유도 간략히 곁들여 주셔도 좋습니다.)


플라톤<향연>을 다시 읽으면서 고전의 중요성을 느낍니다. 그동안 다른 학자들의 독창성의 뿌리가 되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들의 이야기거든요.

향연

플라톤

아카넷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꼭 권하고 싶은 책 세 권을 고르신다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월든>,   니체<비극의 탄생>,  토마스 머튼<장자의 도>입니다.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은행나무

비극의 탄생

프리드리히 니체

아카넷

장자의 도

토머스 머튼

은행나무


문: 생사를 불문하고 한 명의 저자와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듣고 (혹은 무엇을 묻고) 싶으신가요?


김소월 시인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평범하고 소박한 언어로 깊고 아름다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지요? 제가 <감정 연구>에서 이해한 시, '먼 훗날'이 마음에 드시는지요?      


-<감정 연구>에서 세 단락만 뽑아서 낭독해 주신다면 어떤 단락을 꼽으시겠습니까?


1. 공부의 신이 있는 곳은?     

그곳에만 가면 정신이 집중되는 곳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장소에서 일정 기간 공부를 하면, 뇌는 그 장소에 가면 공부할 태세를 갖춘다. 그곳에 가야만 집중되고 공부가 잘된다. 몸이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런 곳을 하나씩 마련해두면 좋다. 몸의 습관은 이렇게 유전적 성향과 살면서 얻어가는 이차적 습관으로 형성되는데 이때 의도적인 연습을 통해 몸의 습관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윌리엄 제임스는 『심리학의 원리』에서 잘못된 기억 위에 덧씌워지는 새로운 습관의 형성을 ‘가소성Plasticity’이라 표현했다. 습관의 가소성은 학습의 중요성과 함께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몸의 기억이 인성의 형성에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몸의 기억은 말하지 않지만 말보다 더 정확하고 강력하다. 의식의 경계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의 위력이다. 


그런데 여기에 제임스의 또 다른 견해가 있다. 공부가 잘되는 장소를 정해놓으라고 하더니 네가 한 곳에서 너무 오래 앉아 공부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억을 잘하려면 한동안 머물러 있다가 장소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기억은 절대로 익숙한 것을 싫어한다니. 한 장소에 익숙해지면 학습 효과가 낮아지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피곤하면 학생회관 로비로 옮겨 앉아 책을 읽고, 피곤하면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이것이 학습에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낯선 여행의 경험은 기억에 남고 늘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면 뇌에 그런 경험이 거의 저장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억은 낯설고 새로운 대상만을 저장한다. 이미 익숙한 대상은 새롭게 배울 것이 없으므로 저장하지 않고 넘겨버린다. 학습할 것이 없으면 새롭게 자료를 업데이트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진화는 이익이 되는 것만 선택한다. 선택과 망각, 이것이 익숙한 장소를 좋아하는 ‘습관’과 낯선 곳을 기억에 저장하는 ‘회상’이라는 이차적 기억이 갈라서는 분기점이다.


2. 따스하고 친근한 감정은 왜 중요한가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학습에서 단시간의 암기식이나 주입식이 나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다른 것과 연결되지 않은 기억은 곧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기억은 주위 환경이나 사람, 그리고 물질과 연결될 때 잘 저장된다. 낯선 환경이나 관심 있는 사람을 대할 때는 감정의 가장 우선순위인 놀라움이나 호기심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추구하는 감정’과 연결되지 않은 기억은 깊이 저장되지 않기 때문에 공부도 되도록 천천히 시차를 두고 되풀이할 때 깊이 새겨진다. 몸의 습관과 달리 회상과 같은 삽화적 기억은 의식의 매개를 거쳐 경험의 저장소에 저장됨으로써 나의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 이때 제임스는 특히 ‘따스함과 친근감’이라는 감정을 강조한다. 


따스함과 친근감이라는 감정이 없으면 기억은 잘 저장되지 않는다. 사랑의 시작은 대부분 따스함과 친근감으로부터 시작된다. 선생님의 인성에 의해 학생의 학습이 엄청난 차이를 일으키고 의사의 따스한 말 한마디가 환자의 회복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그리고 어릴 적 부모의 보살핌과 사랑이 아이의 한평생 불행과 행복을 좌우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남녀 간의 사랑도 우연히 닿은 따스한 손길이나 친근한 말 한마디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두 사람이 얼마 동안 만났다 헤어진 경우, 사랑이 깊었던 사람은 시간이 흐른 뒤 그때를 자세히 기억하지만 마음을 열지 못했던 사람은 기억에 남은 게 별로 없게 된다. 이처럼 따스함과 친근한 감정은 한 사람이 일생동안 저축해놓은 행복의 저축통장이 되어 몸을 건강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소위 상흔이라 불리는 트라우마는 어떤가. 제임스와 달리 프로이트는 삽화적 기억에 대해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친근하기는커녕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 그리고 몸에 대한 학대의 기억은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반복적으로 떠오른다. 이런 기억은 일상의 정상적 삶을 방해하기 때문에 치료의 대상이 된다. 한 뇌과학자는 “알았지? 잘 기억해두고 다시는 되풀이하면 안 돼”라고 그 이유를 해석하기도 한다. 아마 이런 이유로 제임스는 문학을 사랑한 심리학자요 철학자였고 프로이트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였나 보다. 아, 나는 절대로 환자가 되고 싶지 않다.


3. 시간은 어디로 가는가     

무리를 지어 사는 원숭이들은 바나나도 받아먹고 망고도 받아먹는다. 껍질도 벗겨 먹는다. 그런데 왜 시계를 안 차고 다닐까. 오직 인간만이 시간을 의식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의식의 진화로 얻게 된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마술, 시간은 사회적 계약이고 약속을 하며 지키는 수단이지만 흔적 없이 사라지고 달콤한 기억을 남기거나 짙은 상처를 남긴다. 시간은 감정만큼 모호하며 종잡을 수 없다. 초침과 분침이 지닌 벽에 걸린 시계는 실제 우리가 느끼는 시간과 다르다. 연인과 약속한 날을 기다리는 시간은 무척 길고 반대로 시험을 준비하는 기간은 너무 짧다. 같은 기간이지만 원하는 날은 느리게 오고 원치 않는 날은 빠르게 온다. 사회의 약속을 따르는 의식의 시간과 반대로 나가는 감정의 시간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지나간 어떤 날은 길게 회상되고 나머지 수많은 시간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벽에 걸린 달력의 시간과 실제 내가 느끼는 시간의 차이는 왜 일어날까. 


느끼는 시간은 감정과 연루되어 있다. 뇌의 아랫부분은 의식이 진화한 후에도 여전히 생명체로서 긴 역사를 자랑하며 틈틈이 뇌의 상부(전두엽)의 명령에 그런 척 위장하며 존재를 드러낸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몸의 원리인 항상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기술자가 아무리 정확하게 시계를 만들어놓아도 실제로 내 마음의 시간은 바람처럼 사라지거나 너무 짙게 앙금을 남기는 등 제멋대로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힘을 의식에 대한 저항으로 봤듯이 감정의 시간은 벽에 걸린 시계보다 형편없이 느리거나 사정없이 빠르다.


시간은 다 어디로 갔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누리자고, 즐기자고, 이것이 전부라고 기를 쓰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은 무자비하다. 아무리 너와 내가 함께한 순간들을 간직하려 해도 그 기억들은 장맛비에 쓸려가는 지푸라기처럼 살아남지 못한다. 어떤 것은 과장되어 기억에 남고 많은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사라진 것들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길을 잃는다. 반복되는 일상은 망각 속으로 가라앉아 뇌의 어딘가에 잠재되어 영영 자물쇠도 열쇠도 찾지 못한다. 떠오르는 기억들은 그립고 달콤하다. 고통과 방황의 시간마저 아름답게 채색된다. 어디 그뿐이랴,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답을 주기도 하고 선택한 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아, 그때 그래서 헤어지게 된 거구나. 그 선택은 오히려 잘된 것이었구나. 이것이 시간이다.


그녀와 함께 보낸 격정의 시간들은 어디로 갔나? 극심한 나락의 고통과 사회로부터 추방된 그 참회의 시간은 또 어디로 갔나? 전두엽 안에? 모른다. 다만 그에게 자신의 인지와 판단을 재해석하게 만든 흔적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세계는 독립해서 존재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