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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Aug 19. 2021

세계는 독립해서 존재할까

주체가 객체를 안다는 것의 의미는

[편집자 주] 오늘 아침 신문에 물리학자가 쓴 흥미로운 칼럼을 읽었다. 최근 다양한 학계의 연구 결과들을 보며 느낀 '주체'의 문제에 대한 새삼스러운 자각 내지는 혼란스러움을 적은 글이다. 주체의 문제를 이제(?) 고민하게 됐다는 것은 다소 의외다. 아마 이미 알고 있었던 문제를 한층 높은 차원에서 재고하게 됐다는 뜻일 수도 있다. 예전부터 철학은 일찌감치 인식론의 문제를 앎의 문턱으로 여겨 깊이 고민해 왔고, 1급의 과학자들도 과학적 지식의 확실한 토대 문제를 두고 철학적 견해들과 씨름해 온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함께 읽어볼 만한 것으로 노벨 물리학 수상자인 에르빈 슈뢰딩거의 국내 번역본 <생명이란 무엇인가/정신과 물질>에 수록된 글 중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 정신과 물질

에르빈 슈뢰딩거

궁리


객관화 원리


객관화 원리는 흔히 '실재 세계 가설'이라고도 한다. 나는 이 원리가 무한히 까다로운 자연의 문제를 정복하기 위해 우리가 채택한 일종의 단순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의식하지 않으면서, 또한 엄밀하고 체계적인 입장도 없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려 노력하는 자연의 영역에서 인식의 주체를 배제한다. 우리 자신은 세계에 속하지 않는 구경꾼의 입장으로 물러나고, 바로 이 교묘한 술책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정에 의해 은폐된다.


첫째, 나 자신의 몸(거기에 나의 정신적 활동이 매우 직접적이고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은 내가 감각과 지각과 기억으로 구성하는 객관(내 주위의 실재 세계)의 일부이다. 둘째, 타인들의 몸도 이 객관적인 세계의 일부이다. 그런데 나는 타인들의 몸 역시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자면 의식의 거처라고 믿을 아주 좋은 근거들을 가지고 있다. 비록 나는 결코 타인들의 의식에 주관적으로 접근할 수 없지만, 그 낯선 의식들의 존재 혹은 모종의 실재성을 의심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 따라서 나는 타인들의 의식이 객관적이며 내 주위 실재 세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나 자신과 타인들 사이에는 차별성이 없고 오히려 어느 모로 보나 충분한 유사성이 있으므로, 나는 나 자신도 내 주위에 있는 이 실재 세계의 일부라는 결론을 내린다.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의 의식적인 자아(그 자아가 이 세계를 구성했다)를 이 세계 속에 집어넣는다. 이와 함께 나는 위에 있는 일련의 그릇된 결론들에서 나오는 논리적으로 치명적인 귀결들도 이 세계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우리는 그 치명적인 귀결들을 하나씩 지적해야 한다. 일단 지금은, 우리가 오직 우리 자신을 세계에서 배제하여 세계와 무관한 관찰자의 역할로 물러나게 하는 비싼 대가를 치름으로써만 적당히 만족스러운 세계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발생하는 가장 분명한 이율배반 두 가지만 언급하자.


첫 번째 이율배반은, 우리의 세계상이 경악스럽게도 '무채색이며, 차갑고, 말이 없다'는 발견이다. 색과 소리, 뜨거움과 차가움은 우리의 직접적인 감각이다. 우리 자신의 정신적인 자아가 배제된 세계 모형 속에 그런 감각들이 없다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두 번째 이율배반은 우리가 물질이 정신에, 혹은 반대로 정신이 물질에 작용하는 지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지점에 대한 탐구는 찰스 셰링턴 경에 의해 충실하게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는 <인간과 인간의 본성>에 훌륭하게 서술되었다. 물질세계는 자아, 즉 정신을 배제함으로써만, 제거함으로써만 구성될 수 있었다. 정신은 물질세계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신이 물질세계에 작용을 가할 수도 없고 물질세계의 어느 부분이 정신에 작용을 가할 수도 없다. (195-196쪽)


셰링턴의 불멸의 걸작이 지닌 위대함을 인용을 통해 전달할 수는 없다. 독자 스스로 그 책을 읽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더욱 특징적인 몇 구절을 언급할 것이다.

Man on His Nature

찰스 셰링턴

Cambridge University Press


물리학은 우리를 가로막는 장벽을 세운다. 정신 그 자체는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다는 것, 정신 그 자체는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그 장벽이다.(222쪽)

그리고 장벽이 우리를 맞이한다. 정신이 '어떻게' 물질을 움직이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만나는 공허, 비일관성이 우리를 비틀거리게 한다. 이것은 오해일까?(232쪽)


20세기의 실험 생리학자가 내린 이 결론들을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스피노자의 다음과 같은 간단한 문장(<윤리학> 3부 정리 2)과 비교해보라.

에티카

바뤼흐 스피노자

비홍출판사


신체가 정신을 생각하도록 결정할 수도, 정신이 신체를 움직이거나 멈추거나 혹은 다른 일을 (그런 일이 존재한다면) 하도록 결정할 수도 없다.


장벽은 '정말' 장벽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행위의 행위자가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우리 행위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상이나 벌을 받는다. 이는 끔찍한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이 이율배반은 '배제 원리'에 매몰되어 있는, 따라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이율배반에 매몰되어 있는 현재 과학의 수준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값진 일이지만 깨닫는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당신은 이를테면 국회의 결정을 통해 '배제 원리'를 제거할 수 없다. 과학적 태도가 재구성되고 과학이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200-201쪽)


지금까지의 얘기는 우리가 세월 속에서 신성해진 주관과 객관의 구별을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일상에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그 구별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철학적인 사고에서는 그 구별을 버려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 구별의 엄밀한 논리적 귀결이 무엇인지는 칸트에 의해 드러났다. 그 귀결은 우리가 영원히 전혀 알 수 없는, 숭고하지만 공허한 '사물 자체'의 개념이다.


나의 정신과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은 동일하다. 이 사정은 모든 각각의 정신과 그것의 세계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비록 그들 사이에서 불가해한 상호 참조가 풍부하게 일어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말이다. 세계는 내게 단 한 번 주어진다. 존재하는 세계가 주어지고, 또 지각되는 세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관과 객관은 단지 하나이다. 물리학이 이룩한 최근의 성과로 주관과 객관 사이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말은 옳지 않다. 애초부터 그 장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207-208쪽)


산술적인 역설: 정신의 단일성


나는 서양 과학과 동양의 동일성 이론을 결합함으로써 이 두 역설(의식이 있는 자아는 아주 많은 반면 세계는 단 하나뿐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내가 지금 여기에서 두 역설을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아니다). 정신은 본성적으로 '단수'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겠다. 정신에게 붙을 수 있는 수는 오직 '하나'뿐이다. 감히 말하건대 정신은 특이한 시간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즉 항상 현재이기 때문에 파괴될 수 없다. 정신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기억과 예상을 포함한 현재만 있을 뿐이다. 나는 우리의 언어가 이 사실을 표현하기가 부적합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또한 지금 하는 얘기가 과학이 아니라 종교라고 누군가 지적한다면, 그 지적을 인정하겠다. 그러나 내가 얘기하는 종교는 과학에 반대되는 종교가 아니라 공정한 과학적 연구가 밝혀낸 사실들의 지원을 받는 종교이다.


셰링턴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정신은 행성에 최근에 등장한 산물이다."


당연히 나는 이 문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만약 문장의 첫 번째 단어(인간의)가 빠져 있었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1장에서 이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세계의 생성을 홀로 반성하는 의식 있는 정신이 그 '생성' 과정의 어느 순간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났다는 생각은 엉뚱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기이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신이 그렇게 우연적으로, 특정 형태의 생명들의 존속과 번식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한 매우 특수한 생물학적 장치와 함께 출현했다는 생각은 실로 기이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생명 형태들은 뒤늦게 등장한 것들이며, 그 이전에도 많은 다른 형태들이 그 특수한 장치(뇌) 없이 존재했다. 단지 (종수로 따지면) 적은 수의 생명 형태들만이 '뇌를 획득했다'.


그렇다면 뇌를 획득한 생명 형태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모든 것이 빈 객석 앞에서 벌어지는 놀이였을까? 우리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세계를 세계라 불러야 할까? 오래전에 사라진 도시를 발굴할 때 고고학자는 과거 인간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다. 고고학자는 그때 그곳에 있었던 인간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다. 어떤 세계가 수백만 년 동안 존재했지만 그것을 알고 숙고하는 정신이 없다면, 그 세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까? 그 세계는 과연 존재했던 것일까? 세계의 생성은 의식 있는 정신 속에 반영된다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한 상투적인 표현, 관용구, 은유라는 것을 명심하자. 세계는 단 한 번 주어진다. 아무것도 반영되지 않는다. 원본과 거울상은 동일하다. 공간과 시간 속에 펼쳐진 세계는 우리의 표상에 불과하다. 버클리가 잘 알고 있었듯이, 경험은 세계가 표상 이상이라는 증거를 우리에게 전혀 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연히 뇌가 만들어져 세계가 뇌 속에서 자신을 보게 되기 이전에 이미 수백만 년 동안 세계가 존재했다는 낭만적인 생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나는 거의 비극적이라 할 만한 그런 생각의 예로 셰링턴의 말을 인용하려 한다.


에너지의 우주는 고갈되어 간다고 한다. 숙명적으로 최후의 평형상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평형상태에서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은 부단히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행성의 환경은 생명을 진화시켰고 지금도 진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생명과 함께 정신이 진화한다. 만일 정신이 에너지-계가 아니라면, 어떻게 우주의 고갈이 정신에 영향을 끼치겠는가? 정신은 해를 입지 않고 유지될까? 우리가 아는 한, 유한한 정신은 항상 어떤 에너지-계에 붙어 있다. 그 에너지계가 작동을 멈출 때, 그 계와 함께 작동하고 있는 정신은 어떻게 될까? 유한한 정신을 공들여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고 있는 우주는 그때 유한한 정신이 소멸하도록 내버려 둘까?


이런 생각들은 어떤 면에서 불안을 일으킨다. 우리를 당황케 하는 것은 의식 있는 정신이 담당한 이상한 이중 역할이다. 한편으로 정신은 무대, 세계과정 전체가 일어나는 유일한 무대 혹은 세계과정 정체를 담고 있는 그릇이나 통이다. 정신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의식 있는 정신이 이 분주한 세계 내부의 매우 특수한 기관(뇌)에 묶여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 인상은 아마도 기만적일 것이다. 뇌는 분명 동물과 식물의 생리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치이지만 유일무이하게 독특하지는 않다. 다른 많은 장치들과 마찬가지로 뇌는 결국 소유자의 생명을 존속시키는 역할만 한다. 그리고 오직 그 역할 때문에 뇌가 자연선택에 의한 종분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때때로 화가나 시인은 커다란 그림이나 장시 속에 자신을 대변하고 조용하고 작은 인물을 집어넣는다. 예컨대 <오디세이>를 쓴 시인도 그렇게 했다고 나는 믿는다. 그는 자신을 대변하는 눈먼 시인을 등장시켜 파이아키아인들의 회당에서 트로이 전쟁에 관한 노래를 부르게 하고, 그 노래를 듣는 부상당한 영웅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다. 마찬가지로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도 우리는 오스트리아 땅을 횡당하는 장면에서 그 서사시 전체의 저자가 아닐까 의심되는 시인을 만난다. 뒤러의 <만성도>에는 하늘 높이 있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주위에 두 집단으로 모여 기도하는 신도들이 등장한다. 더 높이 있는 한 집단은 축복받은 자들이고, 땅 위에 있는 집단은 인간들이다. 두 번째 집단에는 왕들과 황제들과 교황들 그리고 내가 오해하지 않았다면, 화가 자신이 들어 있다. 화가 자신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초라한 주변 인물로 그려져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작가 자신의 작품 속 등장이 정신의 놀라운 이중 역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사 사례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정신은 전체를 만든 작가이다. 그러나 완성된 작품 속에서 작가는 없어도 전체 효과를 망치지 않는 하찮은 부속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이율배반에 봉착했음을 은유를 동원하지 않고 선언해야 한다. 그 이율배반은, 세계상을 만든 장본인은 우리 자신의 정신을 세계상에서 제거하지 않으면서 상당히 납득할 만한 세계관을 구성하는 데 우리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 따라서 세계상 속에 정신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전형적인 이율배반들 중 하나이다. 정신을 세계상 속에 넣으려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부조리를 낳는다. (이상 221-225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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