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이런 안부인사가 필요한 이유
[편집자 주] 북클럽 오리진이 2016년 걸음마를 시작하고 독자들로부터 관심을 모은 연재물 중 하나가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코너였다. 다양한 분야의 뜻밖의 사람들의 독서 근황을 이어간 릴레이 인터뷰는 일상 속에 숨은 독서 문화와 책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단행본으로도 묶여 나왔다. 시작 당시의 취지가 담긴 서문을 다시 소개한다.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열린책들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2016년 2월 북클럽 오리진이 걸음마를 시작할 때였습니다. 새로 시작한 코너의 문패를 이런 질문으로 붙여 봤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뭘 먹었는지, 뭘 먹을 건지만 묻고 답할 게 아니라 마음속 허기와 정신의 취향에 대해서도 편히 이야기해 보자는 취지에서였습니다.
갑자기 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읽은 한 외국 신문의 칼럼이 발단이었지요. 『뉴욕 타임스』 2014년 3월 주말판에 실린 칼럼으로 기억합니다. 제목이 기발했습니다. <정말이야? 가입한 북클럽이 없다고?Really? You’re Not in a Book Club?> 미국 작가가 쓴 글이었습니다. 그 무렵 소셜 미디어의 확산과 더불어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북클럽이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구체적인 통계와 다양한 사례까지 나와 있었습니다. 친구끼리 혹은 가족, 직장 동료끼리 이런저런 책 모임을 만들다 보니 한 사람이 여러 곳에 속한 경우도 많다고 썼더군요. 그래서 이제는 서슴없이 "너(희)는 요즘 무슨 책 읽고 있니?"라는 문답이 안부 인사처럼 오갈 정도라는 얘기였습니다.
설마.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 글만 보고 미국이 무슨 책벌레의 나라라거나 그만큼 열렬한 독서 문화를 갖고 있을 거라 단정 짓는다면 순진한 생각일 테지요. 그 칼럼에도 정작 북클럽을 명목으로 모여서는 와인을 더 즐긴다는 사례도 유머러스하게 소개돼 있더군요. 최근에는 같은 신문에 <왜 미국인들은 책 읽기에 서툰가>라는 제목의, 앞 칼럼과는 다소 상충되는 글이 실린 것도 봤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내심 많이 부러웠습니다. 설령 미국 곳곳이 아니라 일부 지역 특정 부류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런 인사말이 오갈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아 보였습니다. 아마 제 맘속으로 그리던 사회가 그런 것임을 그때 확신했던 모양입니다.
한때 우리도 자기소개서의 취미란에 별 부담 없이 써넣을 수 있는 활동이 <독서>인 때가 있었지요. 아니면 음악 감상이나 영화 감상 정도가 경합했거나.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변했습니다. 지하철 풍경만 봐도 실감합니다.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스마트폰과 대면하고 있습니다. 저부터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누가 뭐랄 것도 없습니다. 우리 업무와 일상 대부분의 관계가 그 속으로 빨려든 결과지요. 얼마 전 세계 모바일 사용 통계를 봤더니 별다른 이유 없이 확인하는 데만 하루 평균 2시간 반을 쓴다고 하더군요. 몇 년 전 통계가 그렇습니다. 바야흐로 팍스 마키나Pax Mchina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다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늘 그렇진 않을 겁니다. 우리는 저마다 조용히 나만의 생각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책만큼 좋은 반려도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일찍이 프루스트가 가장 정확한 답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독서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지요.
그것은 대화와 달라서, 우리가 각자 혼자인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서로의 생각이 전달하는 것을 수신한다. 달리 말해, 우리가 고독할 때 갖고 있지만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즉시 달아나는 정신력을 계속해서 가동한다. 영감에 열려 있으되 영혼은 창조적인 자기 노동에 열중한다.
저의 증언도 조금 보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을 읽는 순간 나는 나를 넘어 좀 더 깊어지고 고양되고 확장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모바일과는 다른 방식으로 멀리 다른 누구와 연결되고 미처 가보지 못했던 어딘가에 가닿는다는 기분 좋은 느낌이지요.
우리는 한 권의 책과 더불어 낯선 저자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다른 새로운 생각에 잠겨 보고 아름다운 꿈을 꿀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고 그것을 그리워할 때가 있습니다. 최소한 과거 한때는 그랬지요. 단지 요즘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거나 조금 멀리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알렉시 드 토크빌은 “우리가 영원한 삶을 단념한 순간 우리는 하루밖에 살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 십상”이라고 했지요. 책은 단념하지 않게 합니다. 다시 눈을 들어 먼 곳을 보게 하고 일어나 그곳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는 그런 소리 없는 독서의 힘과 체험담을 애써 밖으로 드러내 보이려는 시도였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의 자발적 추천 독서 릴레이 인터뷰였습니다. 순서를 기획하고 지정하기보다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했습니다. 좋은 책은 우리 주변에 여전히 산재해 있고, 많은 이들이 곁에 두거나 가까이하려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소문내고 싶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들 사이사이에, 일과 삶의 영역 곳곳에 책이 숨구멍처럼 실핏줄처럼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각자의 생각과 느낌이 책을 매개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종횡으로 모이고 퍼진다는 아름다운 사실을 새삼 확인합니다.
작가나 학자는 직업적으로 책을 읽고 쓰는 사람이고, 편집자나 서점 주인은 만들고 파는 사람이니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영화감독도 작품 구상을 위해 책을 열어 보고, 배우는 맡은 배역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먼저 책에 몰입합니다. 책 속에서 작곡가는 불현듯 악상을 떠올리고, 가수는 다른 곳에서 얻지 못한 영감을 받습니다. 건축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정치인과 활동가는 방향과 전망을 얻습니다. 정책가와 기업인은 세상의 변화와 흐름을 읽습니다.
책의 취향도 선호하는 작가도 고르는 방식도 읽는 습관도 참 다양합니다. 임지훈 카카오 대표는 “책을 써서 얻을 것이 있는 저자가 아니라 잃을 수도 있는 사람이 쓴 책을 찾아 읽는다”고 소개합니다. 소설가 정지돈은 책을 “하나의 사건”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 삶과 생각과 행동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일이자, 우리 곁에 존재하는 친구나 가족처럼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실체라는 말이지요.
뮤지션 김해원은 자신의 독서 체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인터넷상의 짧은 글을 읽는 것, 정확히 이야기해서 찾아서 읽는 글이 아니라 눈에 보여서 확인하는 정보들은 확실히 소모적입니다. 이것들은 나중에 제 생각과 상상으로 이어지기보다는 단순히 증발해 버린 시간을 확인하게 할 뿐입니다. 문장의 구조를 제대로 갖춘 글쓰기와 책이라는 몇십 쪽에서 몇백 쪽 분량의 글을 읽어 내려가는 독서는 그런 면에서 전혀 다른 경험을 선사하는 것 같습니다. 독서와 글쓰기에 시간을 할애한 날이면 다른 날보다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이 다음에 제가 음악으로 표현하려는 무언가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 39인과의 대화입니다. 그 속에서 숨어 있는 ‘타인의 독서 취향’을 발견하고 뜻밖의 책과 조우하는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절박해져 가는 시대입니다. 독서가 알베르토 망구엘은 책을 읽는 능력이 우리 인간 종을 정의한다고 했지요. 그 말을 이어받아 이제 여러분께 인사를 건넵니다.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2017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