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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Sep 04. 2021

누가 소설을 죽이는가

플랫폼 시대 소설과 출판의 변화

[편집자 주] 소설은 왜 어떻게 죽어가는가. 그것은 사실인가. 영국 작가 수재너 클리먼Susanna Kleeman이 홍콩리뷰오브북스(HKRB)에 기고한 글을 발췌 번역해 소개한다. 소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 모든 것이 플랫폼을 통해 데이터를 기반으로 생산 유통 소비되면서 일어난 여파가 출판계에 닥치면서 생긴 현상을 심도 있게 분석한 글이다. 지금 우리에게 늘어가는 것은 무엇이고 잃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길지만 넓고 깊게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디지털 기술 분야에서 일하면서 소설과 에세이도 쓰는 작가다.


우리는 소설을 예전만큼 읽지 않는다. 구글에 '더 이상 소설을 읽을 수 없다'를 검색해 보면 2억 5100만 이상의 조회수가 뜬다. 물론 소설은 이전보다 더 많이 출간되고는 있다. 팬데믹 기간 동안에도 세계적으로 소설 판매고는 올랐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하향세다. 2013년 이후부터는 논픽션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격차는 매년 더 커지고 있다. 코로나 봉쇄 기간에도 그렇다. 소설을 구매한다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읽거나 카프카가 말한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처럼 현실을 밝히는 필수 도구로 여긴다는 것은 다르다.


오늘날 소설은 덜 읽히지만 겉모습은 더 아름답다. 온라인 상의 화면에서 보기 좋도록 표지 디자인에 더 힘을 기울인 결과다. 소설을 읽지는 않아도 여전히 그런(소설을 읽는다는) 생각은 좋아한다. 새로운 소설은 점점 매트릭스에 나오는 네오의 비밀 상자 같은 특권적인 물건처럼 여기긴 하지만 실제로 읽을 생각을 하면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모든 소설과 상상을 능가할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현실 세계에서 라이브 스트리밍 되고 있는데 누가 소설을 읽으려 할까?


여성을 탓할까? 지난 5년 사이 출판계에서 남성이 사라지고 여성이 지배하게 된 현상을 탐사 취재한 기사들이 쏟아졌다. 조해나 토머스-코어는 영국 주간 옵저버에서 어떻게 여성이 소설계를 정복했는가를 다뤘다. 현재 작가와 독자 수에서 모두 여성이 남성을 능가한다. 에이전트와 원고 입수 에디터도 마찬가지다. (출판사 최고위층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남성이 많지만.) 토머스-코어는 조심스럽게 "많은 여성들 사이에 '남자들은 다 어디에 있지?'라는 대화 뒤에는 '소설은 죽었나'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라고 썼다.


하지만 소설의 위축은 이미 여성의 부상 이전에 시작되었다. 따라서 지금 소설 분야가 여성 중심의 사업이 된 상황을 두고 한때는 거대했던 사업이 이제는 졸아들어, 현실의 도피처로 가공의 세계에서 위안을 찾아온 핵심 여성 독자만을 위해 책을 만들게 된 것으로 본들 지나친 상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여성이 소설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면 범인은 누구인가? 곧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당이 있다. 인터넷이다. 우리는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옛날 순간순간 쉬고 싶을 때면 책 속에 빠져들었듯이 지금은 인터넷에 빠져든다. 소설이 죽었다면 아마 인터넷이 주요 용의자일 것이다. 특히 스마트폰의 형태의 인터넷 말이다. 이 마법의 기기는 신체 일부처럼 따라다니며, 언제 어디서나 뛰어들 수 있는 사이버 공간의 오락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어, 우리의 휴식 개념을 지웠고, 공과 사, 일과 놀이의 경계도 흐려 놓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영국과 미국의 소설 판매 하락이 스마트폰 전면 확산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우연일 리가 없다.


사실 사망한 것은 소설이 아니라 독자일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우리의 시선을 폰으로부터 떼내 아무 책이나 긴 텍스트(소설이나 논픽션)에 초점을 맞추는 행동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숱한-저자들이 만들어내는 무한궤도 상의 엄청난 양의 이미지와 광고, 게임, 야단스러운 단편들 속에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것들과는 순전히 요행에 따라 마주치는데, 언제든지 클릭 한 번만 하면 신기할 수도 있는 어떤 것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다음에 뭐가 나타날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책은 대부분의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tl;dr(너무 길어서 읽지 않음)'이라고들 한다. 이 소용돌이에 지쳤을 때는 반대편에서 다른 것이 기다린다. 긴 형태의 스트리밍 시리즈물이다. 이것들은 아직은 우리의 주의-폭이 건재하다는 위로를 주고, 온라인 대화의 소재까지 제공해 준다.


하지만,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뭐가 문제인가? 아마 스토리텔링과 주요 실행자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간 듯한데, 멋진 AV와 이미지가 지배하고, 어디서나 '현실' 드라마의 토막들을 넋 놓고 볼 수 있는 지금에 와서 이야기를 책 안에만 가두려는 것은 구식이다. 결국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은 형식이나 진위 여부가 아니라 매력적인 이야기 아닌가. 어쩌면 소설은 언제나 임시 대역이었다. 우리의 끝없는 소음과 갈등의 욕구가 단지 지금 같은 비주얼과 감시 기술이 없어서-혹은 검열이나 자기 노출이 두려워- 과거에 묶여 있었던 것이고, 대용품으로 종이에 활자를 찍었던 것일 뿐. 고상한 척하는 기술반대주의는 계속해서 그곳에 묶어두려 하지만, 이제는 기술과 바뀐 모럴이 진정한 것을 풀어놓게 된 것 아닌가.


물론, 종이 위의 활자 혹은 전자책은 대단하다. 그것이 담아내는 뉘앙스나 한 정신에서 다른 정신으로의 직접적 연결성, 독자에게 요구되는 상상의 노력이 시각적 스토리텔링보다 더 깊은 연결감을 선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트윗을 할 수는 없다. (물론 오디오북을 들을 때는 가능하지만) 그리고 누가 그런(읽는) 노력을 들이고 싶을까? 어쩌면 오늘날 소설은 잘하면, 그것이 충분히 재미있기만 하다면, 스크립트 초안, 즉 어떤 미래 스크린 기반 오락물의 저(차원) 기술 핵심 정도로 생각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영구히 연결된 사이버 공간 자체가 아니다.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납치된 사이버 공간, 주의 경제다. 교활한 심리학자들이 우리의 모든 약점에 맞춰 설계한 디지털 자본주의는 우리 삶의 깨어있는 모든 순간을 소비하고 접속하고 얻고 회피하게 한다. 우리를 차지하고 측정하고 조종하고 중독시킨다. 인터넷 초기의 자유로움에서 완전히 바뀐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이런 식으로 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독서를 살해한 것이 결국 스마트폰으로 전달되는 자본주의에 의해 독자들의 마음이 뺏긴 것이라면, 큰 인기를 끄는 소설들이 논픽션에 의해 추월당하고, 그것의 판매고가 소설의 손실 분을 메꾸고도 넘을 정도인 이유는 뭔가? 우리의 바뀐 뇌가 더 이상은 머리로 생각해낸 것은 취하지 않고, 이제는 언제든지 누릴 수 있는 '매개되지 않은' 현실만 찾기 때문인가? 만약 숲에서 40년 동안 격리되었다가 나온 때 묻지 않은 독자라면 스마트폰의 영향은 받지 않은 상태에서 과연 현대 소설에 빠져들까? 아니면 인터넷의 공기는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인가? 도끼의 날이 무뎌졌나?


소설(Novel)이 Novel(새로운, 신기한이란 뜻)이라 불리는 것은 그것이 신기할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형식의 예술보다 더 소설이 우리에게 모르는 것을 이야기해 주기를 바란다. 소설의 길이나 고독한 개인이 한 권을 읽는 데 들이는 시간을 감안하면 그래야만 한다. 줄거리의 추동력에 의해서든 매 쪽마다 전달하는 통찰에 의해서든 끝까지 읽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소설이 아주 획기적일 필요는 없다. 현실 도피용의 소설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좋은 소설이라면 모름지기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해 뭔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한다.


소설이 우리 문화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리는 것은 그것이 한 작가의 독특한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보잘것없는 개인이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값싼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영화와 스트리밍 시리즈만 해도 고비용의 다중-저자 생산 방식으로 최대한의 이윤을 올리기 위해 제작된다. 이 말은 대중(다수의 청중)을 즐겁게 하도록 설계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너무 도전적이거나 낯선 것일 때 부담해야 할 재정적 위험이 소설보다는 훨씬 크다. 또 논픽션을 출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플랫폼이 필요하다. 공인된 전문성과 글을 쓰는 분야에서의 지위 같은 것 말이다. 그래야 권위 있게 받아들여진다.


반면 소설의 경우, 다른 사람이 읽고 싶어 하고, 당신으로 하여금 쓰도록 지원할 그런 작품을 쓰기 위해 당신은 완전히 별난 아웃사이더가 될 수도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기 있는 소설가들은 그런 경우가 많았고, 우리가 그들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로 그것이 담고 있는 별난 통찰 때문이다. 물론 다른 많은 것들처럼 지금에 와서는 그것의 진실성이 덜할 수는 있다. 오늘날 아웃사이더가 되기란 더 어렵다. 모든 것이 공개되고, 감시받고, 틀이 정해진 의견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주류 시각에서) 잘못된-생각'에 따르는 파급효과는 크다.


당신이 아웃사이더이든 아니든, 소설을 쓰려면 시간과 집중이 필요하고, 세상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물러나야 한다. 주의 경제는 작가에게도 그런 것을 점점 어렵게 만든다. 글을 쓰려면 돈이나 다른 어떤 유형의 것이든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디지털 기업이 우리의 주의를 활용해 갑부가 되는 동안, 많은 사람은 더 가난해졌고, 도서관과 예술 기금의 예산은 깎여 나갔다. 과거에는 뭔가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을 위한 다양한 제도적 기반들이 있었다. 예술 학교, 실업 수당, 비교적 싼 월세, 비평적인 매체, 책과 레코드 가게, 외국 영화, 공공 TV, 대안 문화를 증진하는 라디오 등등. 이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고 생태계는 사라졌으며, 보다 효율적인 무언가에 의해 대체된 데 이어, 그것은 시장의 재정 실용주의로만 간신히 자신을 정당화하는 '반문화'까지 삼키고 흡수하고 주류화했다.


이제 좋은 것이란 팔리거나 대중의 주의를 끄는 것이다. 그것도 대개 온라인에서다.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 시대는 그렇게 말한다. 다른 모든 선택지들도 시도해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우리의 덫은 디지털 자본주의의 주의 경제뿐만이 아니다. 이런 현실에 지친 읊조림이다.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 경제 시스템이 자본주의라는 것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광범위한 느낌.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여기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란 창의적 산업의 접근 방식에서 일어난 급진적 변화를 의미한다. 과거 예술가를 보조했던 것은 국가만이 아니었다. 대형 음반 회사와 출판사도 선인세를 통해 시장의 압력으로부터 창작자들을 보호하곤 했다. 지금은 대폭 줄었다. 출판사들은 자신들이 믿는 저자들이 초기 판매량이 많지는 않아도 결국에는 더 많은 독자들을 발견하기를 기대하며 그 사이의 위험을 떠안고 신뢰를 주곤 했다.


오늘날 '무료' 온라인 콘텐츠의 시대에 아마존과 다른 대규모 디지털 서비스 기업들은 효율성과 투명성, 분화된 틈새 이익의 부상을 가져왔는데, 이 시장에서는 정확한 측정 도구가 계산할 데이터를 제공하고, 지배적인 알고리즘은 단기 이윤에 맞춰 프로그램되어 있어서, 단순히 희망만 가지고서는 사업 전략으로 삼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점점 소수의 대규모 상업 출판사들이 시장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면서, 이제 책은 다른 모든 것과 같은 상품이 되었다.


경제에 의해 규정된 상품은 대체 가능한 자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을 생산한 사람이 누군지는 상관없이 또 다른 동일한 사례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과거에 우리가 작가를 유일무이한 목소리로 신성시한 것을 떠올리면, 책을 다른 대체 가능한 상품과 같은 사례로 생각하는 것은 이상하다. 물론 여전히 이름이 브랜드로 통하는 중요한 개별 저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대체 불가능한 소설들을 써냈거나, 혹은 다른 분야에서 이미 우리에게 알려진 유명 인사들이다.


그러나 책은 점점 장르, 다시 말해 비슷한 이야기와 줄거리, 어조를 담고 있는 그룹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 장르들은 점점 더 작은 마이크로 장르들로 세분화하고 있다. 마침내 테크노 스릴러, 코지 미스터리, 바이오펑크, 패러노멀 프레그넌시 로맨스라는 장르까지 등장했다. 자가 출판 도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곳 저자들은 마이크로 틈새시장에서 자기 범주화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인다.


기술적 용이성과는 별개로, 자가 출판이 오늘날 가능해진 주된 이유는 장르와 하위 장르 때문이다. 왜 그런가? 소비자가 좋아하고 구매 가능성이 있는 너무나 많은 책들이, 아마존을 비롯한 도서 소매 사이트와 데이터베이스 그리고 점점 틈새화하는 베스트셀러 목록 등의 메타데이터를 통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책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저자와는 별개의 상품으로서 발견될 수 있고, 오늘날 대부분의 물건을 검색하고 구매하는 온라인으로 쉽게 구매 가능해졌다.


이런 환경에서 출판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의 목소리의 예측 불가능한 힘보다는 장르의 트렌드가 된다. 출판사들이 신인 저자들을 그토록 좋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에게 내재하는 새로움과 약속의 짧은 전율이야말로 이런 장르의 세계에서는 과거 우리가 저자에게 기대했던 고유한 개성의 좋은 대용물이 된다. 만약 이제 당신이 몇 권의 빅 타이틀을 일반 독자들에게 파는 (과거) 전략에서 많은 다양한 책들을 다양하게 분절화된 다수 시장에 파는 장르 전략으로 옮겨갔다면, 교체 가능한 상품을 제공할 대체 가능한 신인 작가들이 많이 필요해진다.


이때 상품들이란 분절화된 소비자들을 과거 트렌드를 근거로 유인하기 위해 당신이 보다 관리가 쉬워진 장르 집단 속으로 분류한 수백만 권의 신간을 말한다. 당신이 당신의 인간적이고 비판적인 안목-직감-을 기계적인 툴에 의한 지도로 대체할 경우 기계는 텍스트 전체보다는 장르와 요약, 유사점 등을 계산의 기본 단위로 삼아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독창적인 성공을 위한 수맥을 찾는 대신 과거 데이터를 토대로 분석하고 예측할 것이다.


저자가 이미 유명인이 아닌 경우, 장르야말로 오늘날 대다수 대형 출판사들에게 가치 기준이다. 이것은 어디서나 그렇다. 심지어 '순문학' 소설에서도 그렇다. 독창성의 산실로 여겨져 온 이곳도 나름의 반복적인 공식적 및 비공식적 틈새시장으로 분화했다. 물론 명예로운 예외는 있긴 하지만.


그 장르가 순문학 소설에서도 생겨났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영역은 본래 우리가 확증이 아닌 위험한 통찰, '상업적' 트렌드를 넘어서는 진실을 울리는 목소리를 발견하기 위해 갔던 곳이었다. 위험은 결코 상업적일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보여줄 때까지는 자신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상의 문학 에이전트인 조니 겔러테드 강연에서 현재 문학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하는 말을 들어보라.


독자로서 당신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어딘가에서부터 어딘지 모를 곳으로의 여행에 데려다 줄 이야기를 찾는다. 그러나 문학 에이전트로서 나는 조금 다른 것을 찾는다. 나는 당신을 여행에 데려다 줄 이야기를 찾고는 있지만 익숙한 어딘가로부터 새로운 어딘가로 이어 줄 다리가 되는 이야기를 찾는다. 이 말에 놀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봐요, 나는 독창적인 소설만 읽는다구요. 익숙한 걸 읽는다니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출판사들이 봤을 때 독창적인 것은 시장에는 대단히 어렵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은 본성상 선행한 모든 것을 바꾸기 때문에, 다른 것과 비교하기가 어렵다. 잭 니컬슨의 '어 퓨 굿 맨'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출판사들은 독창적인 것을 다룰 수가 없다."


이것은 마크 피셔가 2014년 '서서히 진행되는 미래의 무효화'라는 강연에서 현대 음악을 논하면서 한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나는 더 이상 음악이 과거로부터 급격한 단절이 될 거라고는 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의 음악이, 더 넓게는 문화가, 만약 달라진다면, 미묘한 재조율 혹은 미묘한 재구성을 거쳐 초심자와 마니아만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의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완전히 선풍적인 변화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트렌드 순응주의와 복고풍 사업 전략은 점증하는 저자 지망생들에게 주는 조언으로까지 흘러든다. 이제 우리는 소설을 안 읽을지는 몰라도 점점 더 많은 사람은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느낀다. 왜 아니겠나, 그들의 이야기는 익숙한 것이 되었고, 그들의 창작 지침은 점점 명확해지고 있으니. 문화로부터 의심받던 악동으로서 소설가의 시대는 갔다. 출판사와 에이전트와 다른 업계 웹사이트와 소셜 미디어를 보라. 거기에는 구조와 줄거리의 핵심, 장르, 영웅의 여정, 소개 문안, 에티켓, 제목 등에 관한 수많은 규칙과 규제가 다 나와 있다. 자가 홍보, 1인 마케팅, 뉴스레터, 블로, 팔로워 늘이기, 소셜미디어 꾸미기 등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소설가들의 '사전 구성precorporation'이다. 마크 피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자본주의 문화가 욕구와 열망과 희망 등을 선제적으로 구성하고 형성하는 사태"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가 출판을 계획하는 사람에게도 필요하다. 이들에게도 동일한 메타데이터와 마케팅, 발견가능성, 판매 전략이 적용될 뿐 아니라, 아마존이 곧 시장이고 다른 대안적 출판 생태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를 바라는 자가출판 저자들은 영리한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모든 저자들이 그렇게 되라는 조언을 듣는 것처럼.


아직 책을 내지 않은 초보 작가들로부터 돈을 벌어들이는 신 사업이 생겨나면서 저자들의 프리코포레이션 그 자체도 수익화되었다. 과거에는 소설가는 그저 썼다. 그리고 다른 소설을 읽는 것으로 기량을 익혔다. 그러다 2차 대전 이후 대학들은 학부와 석사 과정에 문예창작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지난 20년 동안 그 산업은 만개했고 문단과 상업적인 영역은 확장되었다. 신인 작가들은 대담이나 글쓰기 과정, 여러 축제를 통해 원고를 더 낫게 만들고, 출판업계에 연결될 기회를 얻거나, 성공적인 자가출판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제는 편집과 표지 디자인 서비스, 타깃 광고, 블로그 투어도 있다. 소설을 출판하는 데 드는 비용을 지불할 필요는 없지만, 돈을 좀 들이면 출판사에 쌓인 투고 원고나 다른 곳에서 남들을 뛰어넘을 수는 있다. 이런 사업에서 많은 경우 비용은, 물론 여러 프로그램이나 장학금이 있다고는 해도, 오직 어떤 종류의 사람들만 감당할 수 있음을 뜻한다. 즉 다른 분야에서 성공한 확립된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카프카만 해도 보험회사에서 일했다. 이 경우에서 보듯이 전문직 종사자라고 해서 좋은 작가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점점 많은 문학 분야 전문직종자들(편집자, 출판인, 문학 에이전트 등)이 책을 출간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언한다. TS 엘리엇 역시 편집기획자였다.


소설가 지망생이 훈련을 받으면서 통과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험대는 자신의 작품과 자신을 익숙한 규범에 맞게 압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원고는 편집자가 열어보는 일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앞 장의 소개서다. 당신의 장르와 유사한 작가들을 밝힘으로써 익숙한 영역에서 '참신한' 자신의 몫을 위치 짓는 법뿐 아니라 게이트키퍼들에게 당신의 PR과 마케팅의 싹수-눈길을 잡아끌 한 줄에서부터 문화적으로 승인된 당신 이력의 측면들에 이르기까지-를 파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의 인맥도 거명해야 하고, 좋은 문학 시민으로서 사회적 가치를 입증해야 하고, 기존의 독자-소셜 팔로워나 블로와 구독자 등-를 보여줘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당신이 지하 은신처에서 코카인이나 흡입하는 내향적 인간혐오자가 아닌, 부지런한 일꾼이 될 유망주라는 확신을 줘야 한다. 요컨대, 당신의 작품이 아니라 입에 오를 만한 처음 몇 줄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제시하고, 어떻게 온라인 출판 문화와 혼합할 줄 아는지를 배워야 한다. 사실 이런 것은 늘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지만, 이제는 원고의 품질을 압도할 정도로까지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당신이 아는 것을 써라.' 이것이 익숙한 조언이었다면, 이제 기민한 소설가 지망생들이 알게 된 것은 앞에서 말한 '사전 구성'이다. 선택은 더 이상 '장르'냐 '문학' 소설이냐, 전통 출판이냐 자가 출판이냐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대형 출판사나 메이저 유통사들이 판매와 노출, 발견성의 매트릭스 속으로 밀어 넣도록 '사전 구성'을 잘하느냐, 아니면 그보다 못한 곳에 글을 줘서 결국 그중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되느냐의 문제이다.


장르와 아마추어 비평과 온라인 소매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리고 소설은 토템이고 주의의 폭은 한정돼 있는 번지르르한 장식 가득한 자본주의 사이버 공간에서, 게다가 팬데믹으로 인해 비즈니스 환경은  나빠져  것을 만들기보다 기존 시장에서 즙을  짜내는  맞춰진 상황에서, 팔리는 것은  줄이다.

   

'모든 단단한 것은 PR 속으로 녹아든다." 피셔는 어떻게 해서 우리 시대의 독창성이 복고풍의 익숙한 콘텐츠보다는 테크와 플랫폼, 디지털 프로모션에 존재하는지를 보여준다. 최근 들어 책 디자인과 마케팅, PR, 판매 전략은 대형 출판사와 메이저 소매업자가 손잡고 짤막한 광고자, 블로거와 리트위터 들의 닫힌 집단 속에 '반드시 읽어야 할'이라는 낚시 바늘을 던지는 급진적 예술 형태가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력이 상부하중식으로 유혹적인 판매의 전면에 쏟아붓는 것이 될 때, 실제 출간된 책들은 사후 생각의 재탕으로 느껴질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소설의 경우에 그러한데, 그것은 결국 다른 누구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고, 논픽션이 늘 의존하는 세계의 경이로움과 그것의 놀라운 사실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온라인 독자 리뷰에 자주 등장하는 불평은 광고(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로서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소설을 점점 더 사이버 공간에 비해 지루하고 수고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설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다 같이 힘을 끌어 모으고 밝게 빛을 발해야 할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뒷받침할 산업은 유령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자본은 추상적인 기생충이다. 만족을 모르는 흡혈귀이고 좀비 메이커다. 하지만 그것이 죽은 노동으로 바꿔놓는 살아 있는 육체란 바로 우리 육체이고 그것이 만드는 좀비도 우리다.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상업에 다른 대안이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로부터 무언가 큰 것을 잘라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저 시연일 뿐이다. 우리는 얼어붙은 채로 머물러 있다. 이제 이것이 어떤 세계인지 알려졌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실망스러운 역사, 빅 데이터, 감시surveillance가 상황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 구조의 핵심에 변화가 자리 잡고 있는 소설에 대해서도 함축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소설 자체와 '현실'이 아닌 상상적인 것, 혹은 개인적인 몽상이나 사사로운 생각, 진정한 따분함, '현실' 세계로부터 빠져나오기, 우리의 슬픈 '계몽'은 이제 사라질 운명이라고 느낄 수 있다. 유령도 없고 대안도 없다. 우리는 녹아들고 싶지 않다.


여기서 활동가들은 공허함을 느낀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필립 풀먼의 소설 황금나침반 3부작The Dark Materials에서 떨어져 나온 아이들이 된 것 같다. 우리의 동물적 영혼으로부터 잘려 영혼 없이 남겨진 채, 창의성이나 상상이라고는 없이 표류하며, 더 이상 목적을 찾을 수도 이야기를 할 수도 없게 된 것 같다. 돈을 받기 위해 과장하는 것 말고는. 심지어 옛날 소설들도 우리에게는 도움이 안 된다. 여전히 읽을 수는 있다고 해도. 그들의 희망과 감정은 우리와는 단절된 예스러운 느낌을 줄 뿐이다.


물음은 남는다.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났을까. 아니면 소설을 겨냥한 의도적인 계획이 있었나? 이렇게 말하면 편집증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1930년대 CIA가 어떻게 문학 출판계에 침투했고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의 주요 후원자가 되었는지의 과정을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아이오와 워크숍은 영향력 있는 전후 미국 문학계의 알려진 이름과 도처의 창작 과정의 거물 들을 길러낸 온상이었다.


그들의 글쓰기 의제는 '이념이 아닌 감각적 자극, 도그마가 아닌 경험, 철학이 아닌 기억'이었다고 뉴욕 타임스의 티머시 오브리는 전한다. 개인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이런 사적인 '현실적' 내면의 여정이  '문학' 소설의 주요 특징이 되었고 그 뒤로도 이어졌다. 그들은 정체성 정치와 함께, 탈주술화된 세계에서 개인의 해방을 우선했다. 이것은 오늘날 행동주의의 초점이 되었다.


아이오와에서 계승된 지금의 '문학적' 소설은 또 다른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첫째, 냉철하고 '현실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고급 소설에서 허용된 다른 세계의 유일한 형식은 '마술적 리얼리즘'이었다. 역사적으로 비앵글로색슨 저자와 수행적 포용과 관련된 장르다. 다른 판타지는 괴짜나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하위 장르에 머물러야 했다. 과학소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어느 정도의 '공상적' 소설이 허용되긴 했지만, 이것은 기술의 발전과 이례적인 사건들의 혼란스러운 속도를 감안하면 불가피한 것이었다.


둘째, 플롯은 캐릭터나 정체성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이 되었다. 수세기에 걸쳐 고전들은 플롯에 따라 짜였음에도, 이제 플롯이 있는 소설은 그들 앞에서 본질적으로 '장르'-여기서는 순전히 상업적 이유로 생산되는 연성(lesser) 소설의 약자로 사용-로 간주될 뿐, 더 이상 깊은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문학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어릴 적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게 만들며 독서로 끌어들인 바로 그것을, 어른이 되어서 만약 진지하게 독서를 하고 싶다면 밀어내야 하게 된 것과 같다. 어쩌면 오늘날 아동용 소설이 어른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끄는 이유일지 모른다.


CIA는 소설에서 플롯에 맞서 무얼 가졌던가? 이 질문 자체가 우습게 들리는 것은 소설의 힘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20세기 미국 문화에 CIA가 개입한 것이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 전쟁의 일부였음을 안다. 그러나 CIA가 지원한 글은 맹목적 애국주의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부수거나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다 미묘하고 은밀하게 그것이 인도한 내적 선회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통일적 주제인 이데올로기를 탐구하기 위해 소설을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이 과정에서 CIA의 인도하는 손은 뜻밖의 동지를 만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 핵심은 료타르의 유명한 표현대로 '메타서사를 향한 불신'이다. 만약 공산주의를 물리칠 뿐 아니라 현상유지를 영원히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때의 영리한 전략이란 플롯-특히 지금 시대를 너무 가깝게 반영하는 메시지를 가진 큰 플롯이나 우화-에 대한 기피와 함께 사회를 경쟁적 정체성 혹은 장르 들로 분절화하는 것을 모두에게 권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세기에 걸쳐 우리를 통제해온 종교와 역사, 이론, 이데올로기의 거대 서사를 제대로 의심한 좌파 학자들이 실행에 옮긴 탁월한 대안적 분석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마크 피셔나 다른 이들이 보여주듯이, 바로 의미 있는 거대 서사라는 생각의 해체가 한때 가장 자기 잇속만 차리면서 진실성은 가장 떨어진 메타서사(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그 제도에 의해 가장 유용한 핵심적 일상으로 포획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무한정 파편화되고 에피소드로 분화될 수는 있어도, 함께 작업하거나 붙들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문화와 정치가 보여주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올바른 표현 양식이란 작은 감상적 개인의 찰나적 깨달음이나 그 뒷면의 조각들이 된다. 꼼짝할 수 없는 아이러니와 냉소주의, 유명한 코미디언 사인펠드식의 '포옹도 없고 배움도 없는 것'. 그나마 다행이라면 일관된 플롯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심지어 '장르' 소설에서조차 그렇다. 요즘은 그런 게 너무나 흔해졌다. 서둘러 미친 듯한 결말로 속인다. 영화나 스트리밍 시리즈에서도 똑같다. 특수효과 폭격과 액션 장면, 현기증 나는 현시, 하지만 마지막에는 실망으로 일회적 만족감을 선사하는 서스펜스물들.


보는 사람이 돈과 주의를 내주도록 설득만 할 수 있다면 그 과정은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이야기라면 결말이 중요하다. 결말이 의미와 카타르시스와 해소를 가져다주니까. 지금은 그런 것도 빠져 있다.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현실의' 사건들이 매일 매주 뉴스의 앞머리를 쉴 새 없이 장식하고는 결론도 없이 사라진다. 그 공백 속으로 음모 이론들이 밀고 들어오는 것은 조금도 놀랄 게 없다. 사태를 설명하는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죽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CIA가 판타지와 상상을 상대해서 가졌던 것을 보면, 허구fiction의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의 가장 값싸고 휴대가 쉽고, 따라서 가장 위험한 표명인 소설의 힘이 무엇인지 상기하게 된다. 소설은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현실을 이긴다. 메타포를 만들고, '현실' 세계에 더 나은 논평을 하기 위해 완전히 다른 가공의 닫힌 세상을 구축하는 것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 세계는 너무나 크고 복잡해서 우리가 그 전체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다. 논픽션에서는 언제든지 틀렸거나 철 지난 사실에 의해 세부 내용에서 나가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우화는 우회적으로 표현할 자유를 주어, 독자가 그것과 유사한 것을 끌어내 더 자세히 보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 '현실' 세계, 포대기로 싼 문화의 복고풍 편안함에도 불구하고, 신기함과 급진적인 변화로 이루어진 이 이상한 곳에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것이 많다. 우리는 소설(허구)을 더 이상 예전처럼 많이 좋아하지 않을지는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허구) 속에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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