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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Sep 07. 2021

지금 왜 소크라테스인가

<소크라테스 스타일> 저자 김용규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오늘은 최근 <소크라테스 스타일>을 출간한 인문학자 김용규 선생과의 일문일답이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발표된 나훈아의 신곡 '테스 형!'부터 올해 인문학서로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또 다른 저자가 펴낸 '소크라테스 헬스클럽'에 이르기까지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이 곳곳에서 다시 불려 나와 눈길을 끈다. 그런 그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번에 출간하신 《소크라테스 스타일》은 제목이면서 주제이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 스타일을 길지 않게 소개해 주신다면?

     

‘소크라테스 스타일Socrates Style’이라는 용어가 조금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패션이나 헤어스타일을 뜻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요, 소크라테스가 개발한 ‘빼기subtraction’라는 사유방식과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책에서 보겠지만, 소크라테스는 빼기라는 이 독특한 사유방식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인간 정신의 원형 하나를 깎아 인류문명의 한 축을 떠받쳤습니다. 또한 그는 이 고유한 삶의 방식을 통해 오염된 인간의 삶과 사회를 매번 청소해왔지요. 


사유방식으로든, 삶의 방식으로든, 소크라테스 스타일은 ‘빼기’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유에서 모든 억견과 편견, 거짓과 개소리들을 빼내고 제거하는 사유방식의 혁명이자, 우리의 삶에서 모든 부당하고 부차적인 것들을 빼내고 부정하는 삶의 방식의 혁명입니다. 형상에 도달할 때까지, 본질에 도달할 때까지, 진리에 도달할 때까지, 정의에 도달할 때까지, 부단히 감행하는 부정하기, 제거하기, 깨부수기이지요. 그럼으로써 마침내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바꾸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빼기, 제거하기, 부정하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사유방식의 혁명, 삶의 방식의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은 각각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안으로 들어가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다시 말해 제가 소크라테스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이 사유와 삶의 방식은 지난 2,400년 동안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이 있는 곳마다, 오물이 쌓여 악취와 역병이 돌 때마다 나타났습니다.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쌓인 오물과 도는 역병에 따라 나타난 양상은 달랐지만, 그것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어김없이 다시 나타났지요. 그 결과 이 책에서 ‘빼기’, ‘제거하기’, ‘부정하기’, ‘배제하기’ 등으로 규정한 소크라테스 스타일은 서양문명을 깎아 다듬어온 생각의 기술일 뿐 아니라, 시대적 징후를 읽어내는 하나의 코드code가 되었습니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소크라테스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어떤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으신가요?     


저는 이 책을 본디 서양 사유의 본질과 계보를 추적하는 일환으로 썼습니다. 이 일은 제가 《생각의 시대》에서부터 해오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서양문명을 만들어낸 사상가들의 사유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낸 사유의 방식에 대해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먼저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소크라테스 스타일이 무엇이며,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그것이 지난 2,400년 동안 계승되며 시대마다 나타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서구 문명을 새롭게 바라보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유가 삶을 바꾸고, 삶이 세계를 바꿉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먼저 사유 스타일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하면 사유가 바뀌고, 삶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지요. 따라서 이 책은 동시에 우리의 사유에서 모든 억견과 편견 그리고 '개소리bullshit'들을 제거하고, 우리의 삶에서 모든 부당하고 부차적인 것들을 빼냄으로써 마침내 사유와 삶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독자, 그럼으로써 마침내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바꾸려는 독자, 다시 말해 사유방식의 혁명, 삶의 방식의 혁명을 꿈꾸는 독자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의 핵심을 '빼기'로 개념화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시급한 '빼기'의 대상으로는 무엇을 지목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리 사회에는 날조된 지식과 왜곡된 신념, 숱한 오해와 편견 그리고 황당한 미신과 궤변, 터무니없는 가짜 뉴스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그것들이 거짓말을 식은 죽 먹듯 하는 포퓰리스트와 각종 경제적・사회적・정치적・종교적 이익집단에 의해 이데올로기화해 대중을 기만하며 선동하고 있지요. 근래에는 대통령과 수상 같은 국가지도자와 각 분야의 지식인들마저 거짓말을 은밀하게 아니라 공공연히, 부끄럽게가 아니라 뻔뻔하게 해 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더욱 그런 경향이 짙은데요, 더 나쁜 소식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개소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거지요. 개소리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은 진실 또는 진리를 의식하고 그런 척이라도 하지만, 개소리는 그런 것들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개소리꾼들은 그것이 거짓말이든 아니든 ‘주야장천 반복해 짖어대면’ 사람들이 그것을 믿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아냈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즐거운 지혜’는 “우기면 된다!”입니다. 민주주의에서는 다수가 믿는 그 무엇이 사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가짜 뉴스와 개소리가 가득하고, 진리와 정의는 아득해졌습니다. 이제 빼기를 학습하고 실행할 때가 왔습니다. 다시 한번 소크라테스 이팩트를 일으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사유와 사회에서 모든 억견과 편견 그리고 가짜 뉴스와 개소리들을 제거하는 소크라테스 스타일 이팩트를 일으켜야 합니다. 


왜냐고요?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포퓰리스트들이 만들어낸 신기루가 아른거리는 땅에서는 우리가 제정신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소리꾼들이 만들어낸 오로라가 펼쳐지는 하늘 아래에서 는 우리의 아이들을 올바로 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 스타일의 영향(이펙트)을 받은 다양한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중에서 특히 애착이 간다거나, 지금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입니다. 이미 닥쳐온 코로나바이러스19 팬데믹과 다가오고 있는 기후재난 때문에 더욱 그런데요, 팬데믹과 기후변화는 그냥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그것들은 모두 우리의 과도한 자원과 에너지 소비에 의한 환경오염, 무분별한 개발에 의한 생태계 파괴가 불러온 것이지요. 다시 말해 그것은 근대 이후 우리가 만들어온 세상, 특히 지난 50년 동안 진행된 세계화와 후기자본주의 그리고 소비물질주의가 주도해온 탐욕적 생활방식과 착취적 경제 체제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소로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지향함으로써, 그리고 유무형의 사회적 부당함에 저항함으로써, 달리 말해 내적으로는 안락과 사치 및 과시를 추구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 ‘불복종함’으로써, 외적으로는 당시 사회와 정부의 경제적・정치적 경향이었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부당한 요구에 ‘불복종함’으로써, 기후변화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 자아상이 되었습니다. 《소로 평전》을 쓴 윌스 교수가 적절히 언급했듯이 “오늘날 소로는 시민 정부라는 세계적 이상과 지구 환경 윤리, 두 개념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유학 이후 저술에 전념해 오셨습니다. 이른바 제도권 밖의 학자이자 전업 인문 저술가로서 어려움은 없으신지요? 그런 삶을 살려는 사람에게 조언을 하신다면?     


살다 보니, 저는 ‘전업 인문 저술가’라고 불리기도 하고 ‘프리랜서 작가’라고도 불리는데요, 자유로운 만큼 좋은 점도 있지만 어려움도 많은 일이지요. 뭐라 불리든, 또 수입이 어떻든 이런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문제가 되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자기 정체성일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나는 백수인가, 프리랜서인가 하는 거지요. 제 생각에는 그것을 가리는 기준점이 자기 통제력입니다. 누구에게는 그것이 ‘규칙적 생활’이고, 또 누구에게는 그것이 ‘세상과의 거리두기’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구에게는 그것이 ‘자기 돌봄epimeleia heautou’일 수도 있겠지만, 누구든 자기 스스로를 엄격하게 통제할 수 있으면 프리랜서이고, 그렇지 않으면 백수이기 때문이지요.^^        


-소크라테스의 삶과 사상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우선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하신다면?

가볍게 읽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코라 메이슨Cora Mason이 대중을 위해 가벼운 소설 형식으로 쓴 《소크라테스》(창, 2010)이나 베터니 휴즈가 쓴 《아테네의 변명》(옥당, 2012)을 우선적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신학과 철학을 함께 공부하셨고, 기독교인을 위한 인문학 책도 써오셨습니다. 신앙과 지식은 어떤 관계입니까?     


저는 신앙과 지식의 관계는 기하학에서 말하는 공리(公理)와 정리(定理)의 관계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공리란 일종의 약속으로서 자명(自明)한 진리로 인정되며 증명할 수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는 원리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증명할 수 있고 또 증명해야만 하는 다른 모든 정리들의 전제가 되지요. 따라서 공리가 바뀌면 정리도 달라집니다. 


예컨대 만일 당신이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이와 만나지 않는 직선을 단 하나 그을 수 있다’라는 유클리드의 공리를 받아들이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다’와 같은 정리들로 이뤄진 평면기하학의 세계가 당신 눈앞에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평행선은 없다’라는 리만의 공리를 받아들인다면 당신 앞에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크다’와 같은 정리들로 만들어진 구면기하학의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신의 존재를 공리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 믿음 안에서는 신의 존재는 증명할 수도 증명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원리이고, 그것이 증명할 수 있고 또 증명해야만 하는 다른 모든 지식들의 전제이지요. 이 말은 만일 당신이 ‘유일신이 존재한다’라는 공리를 받아들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세계가 당신 눈앞에 전개될 것이고, ‘신은 없다’라는 공리를 받아들이면 무신론자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공리가 바뀌면 정리가 달라지듯이, 신앙의 유무의 따라 세계가 달라진다는 거지요.        


-요즘 주력하는 일이나 일과는? 코로나로 인한 변화가 있다면?     


《소크라테스 스타일》을 탈고한 후 쉬고 있습니다. 나이가 칠순을 넘어서며 체력이 알아보게 약해졌어요. 그래서 가까운 공원을 산책을 하거나 조금씩 독서를 하고 틈틈이 정원 일을 하며 지냅니다. 코로나로 인한 변화가 있다면, 요리하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거지요. 제가 요리를 제법 잘하기 때문에 식구들이 좋아합니다.^^     


-각별히 오래 지켜온 습관이나 수칙, 모토 같은 것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무슨 수칙이나 모토 없이 그냥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지 않나요? 그러다 보니 제 경우는―결코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만―20년이 넘는 세월을 출판사 사람들과 일 때문에 만나는 것 외에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게 되었어요. 그래서 자동차도 가져본 적이 없고, 전화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외부와는 이메일로만 소통을 하지요. 이런 것들이 각별하다면 각별한 습관이라 할 수 있겠지만, 무슨 특별한 수칙이나 모토 때문이 아니고요, 사회생활을 않고 살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번 책도 《생각의 시대》에 이은 《이성의 시대》의 첫 권으로 소개하셨습니다. 계획 중인 책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주신다면? 그밖에 죽기 전에 꼭 쓰시고 싶은 책이 있나요?     


저는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어요. 그래서 철학에서는 서양 사유의 계보를 추적하는 작업을 기획해 진행 중입니다. 《생각의 시대》, 《이성의 시대》, 《융합의 시대》로 기획했는데요, 이번에 출간한 《소크라테스 스타일》은 《이성의 시대》의 첫 권이고, 《플라톤 스타일》, 《아리스토텔레스 스타일》이 이어질 것입니다. 《융합의 시대》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스타일》이 기획되어 있고요. 신학 부분에서는 《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그리스도》, 《성령》으로 이어지는 ‘신 3부작’도 완성하고 싶은데, 나이가 있어 다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을 한두 권 추천해 주신다면? (이유도 간략히 곁들여 주셔도 좋습니다.)     



철학에서는 페터 슬로터다이크,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2020, 오월의 봄)을, 신학에서는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2018, 포이에마)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이 두 작품이 독자들에게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관점 하나를 제시해줄 것이기 때문이지요. 적어도 제 생각에는 둘 모두 다분히 ‘문제적’이지만 그만큼 ‘기념비적’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생사를 불문하고 한 명의 인물과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듣고 (혹은 무엇을 묻고) 싶으신가요?     


아주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만일 제가 50년 전쯤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만나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을 거예요. 그러나 지금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해 묻고 싶어요.     


-《소크라테스 스타일》에서 세 단락만 뽑아서 낭독해 주신다면 어떤 단락을 꼽으시겠습니까? (페이지와 행을 알려주셔도 됩니다.)     


P. 19 이 책을 쓰는 동안 가졌던 내 꿈은 우리 모두에게 소크라테스 스타일 이팩트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사유에서 모든 억견과 편견 그리고 개소리들을 제거하고, 우리의 삶에서 모든 부당하고 부차적인 것들을 빼냄으로써 마침내 사유와 삶의 본질에 도달하는 여정에 함께 나서자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바꾸자는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혁명을 꿈꾼다. 사유방식의 혁명, 삶의 방식의 혁명 말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를 소환하는 이유다.


이 말은 이 책이 과거에 대한 조명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겨냥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책의 독서가 고색창연한 유적 탐사가 아니 라 우리가 살고자 하는 세계의 설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걸고자 하 는 구호는 “미래로 돌아가자Back to the Future”다. ‘아직 오지 않은 과거’를 불러내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기획時間企劃’을 하자 는 뜻이다.      


P. 45~48 이성은 비유하자면, 무대 위의 어느 한 부분이나 특정한 인물만을 밝게 비추고 나머지를 어둠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스포트라이트spotlight처럼 작동한다. 이 같은 이성의 특성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확인해주는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다. 언어의 구조가 이성의 그 같은 작동방식을 한눈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 내가 보기에는 언어의 이러한 특성과 작동방식이 우리의 이성 안에 들어 있는 합목적성合目的性, Zweckmäßigkeit의 기원이다. 근대 이후 우리가 이에 대한 아무런 성찰도 없이 그것을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ät이라고 간주하게 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들은 ‘A는 유대인이다’라는 진술(또는 문장)이 홀로코스트Holocaust를 행한 사람들의 정신 안에 나치가 제거의 대상으로 지목한 ‘유대인인 A’만을 드러내 밝히고, 그 밖의 A에게 붙을 수 있는 술어—가령 A는 ‘인간이다’, ‘죄가 없다’, ‘어린 아이다’, ‘피아니스트다’, ‘어떤 아빠의 딸이다’, ‘어떤 아이의 엄마다’ 등—를 차단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 아니겠는가.      


P. 531 이제 우리도 이 길에 올라서자. 우리는 이미 2부 소크라테스 스타일 이팩트에서 이 길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 스타일이 우리의 사유와 삶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다. 누구는 이 길에서 새로운 사상을 개발했고, 누구는 이 길에서 새로운 예술을 창조했으며, 또 누구는 이 길에서 새로운 삶을 열었고, 누구는 이 길에서 세상을 바꾸었다. 이 길 위에서 당신과 나도, 우리 사회와 문명도—이미 다가온 또 앞으로 다가올 온갖 위험과 재앙에도 불구하고—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 스타일이 뉴 노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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