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과학하는 마음' 저자 전주홍
[편집자 주] 오늘 독서 인터뷰의 주인공은 최근 출간된 과학 에세이 <과학하는 마음>의 저자 전주홍 교수다. 현재 서울대 의대에서 분자생리학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는 전 교수가 보기에 과학의 민낯은 어수선한 실험실에서 큰 목소리로 주고받는 소통, 그리고 무수히 많은 실수와 실패의 나날이다. 발표되는 논문에는 그런 날것이 아닌 성공한 역사만 담긴다. 새로운 지식은 이러한 매일매일이 쌓여 탄생하는데 진지한 호기심, 탐구에의 의지가 과학자에게 제일 중요한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출간하신 <과학하는 마음>을 세 문장 정도로 소개해 주신다면?
“과학은 생각하는 훈련이자 성장의 이야기이다”라고 소개할 수 있습니다. 가설을 도출하고 실험 원리를 이해하고 오류를 바로잡고 데이터를 해석하는 일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지 않고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과학은 우리 모두를 무지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점점 더 확장시킨다는 면에서 성장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독자에게 권하시고 싶으신가요?
크게 세 부류의 독자층으로 기초의학이나 생명과학 분야를 지망하는 고등학생, 과학자가 되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둔 대학생, 과학에 관심이 많은 일반 독자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둔 대학생에게 꼭 권하고 싶습니다.
-과학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라고 요약하셨습니다. 성공과 성장은 어떻게 다른지요? 왜 성공이 아닌 성장을 말하시는지요?
우선 성장과 성공을 선악이나 우열의 개념으로 대립시킨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성공을 죄악시하거나 터부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장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나친 성공 지향적 혹은 성공 일변도의 삶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과학 본연의 가치를 되새겨보자는 것입니다. 사전적으로 보면 성공은 ‘목적하는 바를 이룸’을, 성장은 ‘자라서 점점 커짐’을 뜻합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성공은 성숙된 열매이고 성장은 열매가 맺힐 때까지의 과정, 즉 싹이 트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공은 성장의 일부분이자 뒤따르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작정 성공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그다지 어색하지 않습니다. 과학에서 성공은 일차적으로 우수한 논문 실적이 될 것이고, 성장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확보·분석·해석하고 논문을 작성하는 일을 포괄할 것입니다. 성장을 잘하면 좋은 논문 실적이 따라올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계의 작동방식을 보면 학생은 주로 교수가 시키는 실험에 몰두할 뿐 가설 도출, 실험 설계, 데이터 분석 및 해석, 논문 작성의 대부분이 교수의 몫으로 돌아가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성장 없는 성공이 되고 마는 데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성장의 과정을 강조하기 위해 ‘성공이 아닌 성장’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으로 공부를 시작한 후 회의하거나 고민하는 학생들이 많은가요? 이 분야로의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미리 꼭 들려주실 이야기가 있다면?
과학 계열의 대학원 공부는 기본적으로 ‘연구를 통한 교육’입니다. 시험과 같은 학업성취도 평가 방식으로 석사나 박사 학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원 공부는 기존 지식을 잘 구조화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일은 아마도 태어나서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이기에 진로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해야 합니다. 제대로 고민하지 않고 막연한 기대 속에 대학원에 진학한 후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흔치 않게 봅니다. 그래서 대학원 진학 전에 “나는 왜 과학을 하려 하는가”와 “나는 얼마나 과학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길 권합니다. 또한 “해안이 보이지 않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다면 절대로 바다를 건널 수 없다”라는 콜럼버스의 말을 새길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학의 전공 지원에서도 시장의 수요(산업적 필요)가 좌우하는 시대가 된 듯합니다. 언론에서도 ‘인적 자원의 수요와 공급’ 시각에서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받아들여야 할 현실일까요?
빌 레딩스가 《폐허의 대학》에서 지적했듯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확산 속에서 대학은 자본과 시장의 이념과 논리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자본 권력의 지배 아래에서 ‘교육 시장’이나 ‘인적 자원’이라는 말은 더 이상 어색하지 않게 되었고 ‘수월성’이라는 담론은 이런저런 비판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을 고려할 때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힘들뿐더러 이 분위기는 한동안 지속될 것 같습니다. 종교, 국가, 자본 권력 다음에 어떤 형태의 권력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할까요? 그 권력의 형태가 어느 정도 가시화되는 시점에 또 다른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지금은 거시적 현실을 받아들이되, 미시적 수준에서 무엇을 모색하는 것이 가장 생산적일지에 대해 지혜를 모우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이 미래를 꿈꾸기보다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시대입니다. 재능이 있지만 눈앞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학문의 뜻을 접으려는 청년에게 어떤 말을 하시겠습니까?
이공계 대학원의 경우 대부분의 학생들은 연구과제에 연구원으로서 참여하게 됩니다. 즉 대학원생이면서 연구원의 신분을 겸하게 됩니다. 따라서 넉넉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연구과제의 인건비를 통해 어느 정도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학교로부터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경로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에 대한 관심이 커지만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어 내적 갈등이 일어난다면 가고 싶은 실험실이 어느 정도 경제적 지원을 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아보길 바랍니다. 충분히 학문과 연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흔히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는데, 요즘은 비교적 그 길이 잘 보이고 잘 닦여져 있습니다. 다만 다음 두 질문에 대해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꿈을 접지 말고 도전을 멈추지 말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대한 믿음이 있나요? 자신의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과학자가 되기 전 인문학적 소양을 길렀다면 더 나은 과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하셨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지금 그 시절로 돌아가시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독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서만큼이나 생각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방법도 찾기 어려워 보입니다.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저 자신의 지적 토양을 기름지게 만들고 싶습니다. 18세기 미국의 과학자 조지프 헨리는 “위대한 발견의 씨앗은 끊임없이 우리 주위에 떠돌아다니지만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잘 된 마음에만 뿌리를 내립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얘기를 하면 철학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철학은 늘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자명하다는 여기는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근본적 반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세와 생각의 틀이 잘 갖추어져야 창의적이고 혁신적 발견을 이끌어내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과학 수준은 양적 규모와 성과 면에서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지만 경쟁력은 정체되고 있다”라고 쓰셨습니다. 경쟁력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지금 우선 무엇이 필요한가요?
우선 우리나라의 연구 관련 현황을 간략히 설명을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서 발표한 <2020년 국가 과학기술혁신역량평가>라는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총 연구원 수는 약 53만 8천 명으로 연구원 규모로는 OECD 35개국 중 4위, 인구 만 명당 연구원 수로는 2위를 차지합니다(이공계 박사급 연구 인력의 비중은 21위로 다소 낮은 편입니다). 우리나라의 총 연구개발비는 100조 원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연구개발투자 총액으로는 OECD 가입국 중 4위, GDP 대비 연구개발투자 비중으로는 2위, GDP 대비 정부연구개발 예산으로는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0월 초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우리나라는 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비판으로 언론 지면이 장식됩니다. 코로나 19로 2년 가까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과학이 코로나 19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힘듭니다. 이런 모습들이 경쟁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경쟁력을 갖추려면 창의적, 혁신적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 조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학문적 고유성과 정체성의 문제를 잘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만의 고유한 연구 학풍도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런 것이 잘 조성되어야 추격형(fast follower) 연구에서 선도형(first mover) 연구로 전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의 미래가 인재 양성과 건강한 연구 풍토 조성에 있다는 말도 됩니다.
-과학의 자식인 기술의 위력과 발전 속도가 위협적일 정도입니다. 과학사회학이 전공인 홍성욱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느린 과학’을 이야기하시더군요. 하지만 과학자 집단이나 조직 자체의 (특히 산업적) 논리 앞에서 과학자 개인은 무력해 보입니다. 개선의 조짐이 있나요? 그럴 가능성이나 여지가 있을까요?
먼저 반문의 형태의 답을 드리면, 빠른 과학이 왜 문제일까요? 무엇이 개선되어야 할까요? 느린 과학을 하면 문제가 해소되고 과학에 대한 비판이 사라질까요? 기술의 위력과 발전 속도가 위협적이라도 이런저런 논의조차 할 시간이 없을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생물학적 무기와 같이 옛날 기술이라도 얼마든지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 발전의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과학과 기술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와 사회적 책임을 함양시키는 것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연구와 강의 외에도 국가 과학 정책에도 여러 경로로 관여하고 계십니다. 그 과정에서 눈에 띄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학자들 간, 과학자와 민간, 정부 간의 소통은 잘 이뤄지는 편입니까?
아주 원활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일정 이상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자, 민간, 정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각자 모두 자신의 악기를 최선을 다해 연주하고 있습니다. 다만 악기끼리 서로 튜닝이 잘 되지 않아서 불협화음이 만들어지는 느낌은 있습니다. 한 명 한 명의 연주 실력은 그리 나쁘지 않은데 좋은 관현악단이 잘 안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시스템을 잘 구축하는 길에 바로 우리의 미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코로나는 많은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백신을 초고속으로 개발했지만, 접종 과정에서 국제 백신 공동분배 사업은 외면당하고 선진국을 필두로 국가이기주의나 개발 기업의 수익 논리에 밀려난 현실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것이 정말 문제인지 아니면 부러움을 문제의식이라는 말로 달리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볼 여지도 많습니다. 80억 명이 접종할 수 있는 백신 분량을 하루아침에 만들어서 일시에 모두 접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접종의 시차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가 자국민을 우선시 여기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민간 기업이 수익 논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세계보건기구가 보다 더 정치력과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지구 상의 대부분의 인구가 백신을 접종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훨씬 단축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선진국이 자국민의 접종을 완료하고도 남아도는 백신을 저소득 국가에 지원하지 않고 뒷짐만 지고 있다면 그건 정말 문제가 되겠지요. 개발 기업이 백신으로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폭리를 취한다면 그것 역시 정말 문제가 되겠지요.
-과학을 현대인의 종교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거 종교가 인간의 삶에 주었던 깊이의 의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과학은 한계가 분명한 지식 체계일 뿐인가요?
과학은 자연현상에 대한 경험적 지식 체계입니다. 종교가 인간에게 미친 영향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어도 아직까지 과학이 종교를 대체하는 현실은 아직 상상조차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약 뇌과학이 발전하면 언젠가 종교와 동일한 효과를 내는 약물이나 장비가 개발될 수는 있을까요?
-오늘날 매체 환경에서 책은 상대적으로 점점 왜소해지고 있습니다. 과학자도 실험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면 독서 시간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독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요? 전공 논문이나 도서, 인문서 읽기는 어떻게 안배하시나요?
저 같은 경우 학교에서는 거의 대부분 전공 논문이나 도서를 읽습니다. 지하철로 주로 출퇴근하는데, 이때 인문서나 교양도서를 읽습니다. 퇴근 후나 주말 같은 경우 수업 준비나 논문 작성 등의 일이 없을 때 인문서나 교양도서를 읽는 편입니다. 그런데 대학원에 다니면서 한참 실험을 해야 하는 학생의 경우에는 인문서 읽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인 대학시절 독서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지금 가장 궁금하거나 관심이 가는 주제는 무엇인가요?
“모든 과학자에게 동일한 실험 여건(연구원, 연구비, 연구 장비, 연구 시설 등)이 제공된다면 비슷한 연구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차이가 난다면 무엇이 그런 격차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교육을 통해 그런 격차가 해소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요즘은 전반적으로 과학 문화와 과학자 교육에 대한 관심이 큰 편입니다.
-각별히 오래 지켜온 습관이나 수칙, 모토 같은 것이 있으신가요?
특별한 습관이나 수칙은 없습니다. 모토는 책에서도 소개된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취하지 마라’ 혹은 ‘누구의 말도 의지하지 마라’라는 뜻의 영국왕립학회의 모토 ‘Nullius in Verba’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확신에서 출발하면 의심으로 끝나지만, 의심에서 출발하는 것에 만족하면 확신으로 끝날 것입니다”라는 말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과학자의 자세 혹은 태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계획 중인 책이나 꼭 쓰시고 싶은 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중개연구(영어로는 translational research)에 관한 주제로 책을 쓰고 싶습니다. 중개연구는 실험실 벤치의 발견과 병상의 관찰 결과가 서로 교환되어 기초 연구의 성과가 임상에 적용되고 새로운 임상 관찰이 기초 연구를 촉발하는 것 정도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용어는 기초연구의 성과가 좀처럼 임상 현장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왜 기초연구의 성과가 임상에 적용되지 않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여 기초와 임상연구 사이의 간극을 메꾸는 일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과학자의 길을 가게 된 계기가 된 책이 있나요?
딱히 떠오르는 책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제프리 피셔의 《미래의학》이라는 책을 읽고 과학을 통해 미래의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 지금과 달리 예전에는 과학 서적이 일단 많이 출간되지 않았고 번역서의 경우 읽기 어려울 정도로 번역이 서툴렀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을 한두 권 추천해 주신다면?
우선 데이비드 우튼의 《과학이라는 발명》을 추천합니다. 우튼의 주장을 지지하느냐의 여부를 떠나 과학혁명이나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개념 자체가 패러다임에 갇힌 생각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책으로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장소가 만들어낸 과학》을 추천합니다. 과학을 지리학적 측면에서도 조망해 볼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둘 다 과학에 대한 전형적인 생각의 틀을 조금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합니다.
-과학도나 과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 두세 권을 고르신다면?
제가 쓴 《논문이라는 창으로 본 과학》과 함께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과 피터 버크의 《지식, 그 탄생과 유통에 대한 모든 지식》을 권하고 싶습니다.
-생사를 불문하고 한 명의 인물과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듣고 (혹은 무엇을 묻고) 싶으신가요?
19세기 미국의 의사 크로퍼드 윌리엄스 롱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스켑틱> 27호에서 ‘에테르 마취제 전쟁’이라는 제목의 글을 짧게 쓴 적이 있는데, 롱은 에테르의 마취 효과를 최초로 증명하여 무통 수술의 길을 열었지만 논문 발표를 늦게 하는 바람에 최초 발견이라는 우선권의 영예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신중한 학문적 자세로 인해 논문 발표가 지연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만, 만약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논문 발표 지연의 진짜 이유가 혹시 따로 있었는지 그리고 우선권과 공적이 오롯이 본인에게 돌아가지 못한 상황에서 서운함이나 아쉬운 마음이 생기지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