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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Oct 27. 2021

시가 깃드는 순간

[오늘의 한 단락] 릴케의 '말테의 수기' 중에서

[편집자 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소설 <말테의 수기>에서 뽑아 싣는다. 관찰하고 탐구하고 배우고 기록하는 삶을 그토록 치열하게 일관되게 살다 간 사람도 드물다. 그 내면의 생각과 시선이 압축된 단락이다. 시가 깃들기까지 과정을 이야기한다. 어디 시뿐이겠는가.


나는 지금 무슨 일이든지 시작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보는 법을 배우는 이때에. 내 나이 벌써 스물여덟이지만, 아직까지 거의 아무것도 해놓은 일이 없다. 다시 말해 보자. 나는 카르파초(Vittore Carpaccio: 1465-1525, 이탈리아 화가)에 대해 글을 한 편 썼지만 형편없었다. 어떤 오류를 모호한 수단으로 증명해 보이려는 내용으로 된 <결혼>이라는 희곡을 한 편 썼고, 시도 썼다. 아아, 어린 나이에 쓴 시는 별로 보잘것이 없다. 시는 기다려야 한다. 한평생을,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살아서 의미와 단맛을 모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맨 마지막에 좋은 시 겨우 열 줄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감정은 이른 나이에도 충분히 찾아온다)만은 아니다. 시는 경험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면 많은 도시와 사람과 사물을 관찰해야 한다. 동물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고, 새가 어떤 방식으로 나는지 느껴야 하고, 아침에 작은 꽃이 필 때의 몸짓이 어떤지도 알아야 한다. 낯선 지역의 길과 예기치 못했던 만남, 그리고 오래전부터 다가오는 것이 보이던 이별을 회상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 미궁에 빠져 있는 어린 시절의 날들, 기쁘게 해 주어도(다른 아이라면 기뻐했을 텐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 마음 상하게 해 드렸던 부모를, 그리도 이상하게 시작해 그토록 깊고 힘들게 변해 갔던 어린 시절의 병들을, 조용하고 외진 방에서의 대낮과 바닷가의 아침을, 아니 바다 자체를, 바다들을, 높이 솨솨 소리를 내며 별들과 함께 날아가 버렸던 여행의 밤들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어느 것 하나 똑같지 않은 수많은 사랑의 밤들에 대한 기억과, 진통 중인 산모의 외마디 비명과 자궁문이 닫힐 때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해쓱하게 잠들던 산모의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 죽어 가는 사람 곁에도 있어 봐야 하고, 열린 창문으로 뭔지 모를 간헐적인 소리를 들어가며 이미 죽은 자와 한방에 앉아 있어 보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치 않다. 추억이 너무 많아지면 잊을 수도 있어야 한다. 잊힌 기억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대단한 인내심도 있어야 한다. 추억 그 자체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들이 우리 안에서 피가 되고, 시선이 되고 몸짓이 되고, 그러다 이름도 없어져 우리 자신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그제야 그 중심에서 시의 첫 구절이 깨어나 얼굴을 내미는 매우 드문 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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