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urney Oct 18. 2021

특별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것

[오늘의 한 단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편집자 주] 바삐 스쳐 지나가는 삶의 한 순간 속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잠자고 있는가. 마치 좋은 책이 그러한 것처럼. 마르셀 프루스트의 눈은 그것을 응시한다. 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편 '꽃 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발췌해 소개한다. 김희영이 옮긴 민음사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32-36쪽.


아침 햇살이 반사되어 다홍색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은 하늘보다  분홍빛이었다. 그녀 앞에서 나는, 매번 우리가 아름다움과 행복을 인식할 때마다 마음속에 다시 생겨나는  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아름다움과 행복은 개별적인 것이건만 우리는   사실을 잊고,  아름다움과 행복을 우리 마음에 들었던 여러 다른 얼굴들이나 우리가 체험했던 갖가지 기쁨들 사이에서 일종의 평균치를 형성하는 관습적인 표본으로 대체함으로써 무기력하고도 무미건조하며 추상적인 이미지만을 간직한다. 그러나  이미지에는 우리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물의 성질이, 아름다움과 행복의 고유한 성질이 결핍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에 대해 비관적인 판단을 하며,  판단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우리가 아름다움과 행복을 충분히 고려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름다움과 행복을 없애고 이에 관해  하나의 분자도 들어 있지 않은 종합적인 사실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누군가가 새로 나온 '좋은 ' 대해 말하면 어떤 문인은  책이 자기가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좋은 책들을 한데 모아 놓은 일종의 합성물일 거라 상상하고 미리부터 권태의 하품을 한다. 그렇지만 좋은 책이란 특별하고도 예측할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지나간 모든 걸작들의 합산이 아니라  모든 것을 완전히 흡수해도 아직 발견되기에 충분치 않은  어떤 것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유는 바로 책이 이런 합산 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기도 전에 싫증부터 냈던 문인도 이런 새로운 작품을 접하면 작품에 묘사된 현실에 흥미를 느낀다. 이처럼 내가 혼자 있을   상념이 그리던 아름다움의 모델과는 전혀 거리가   아름다운 소녀는, 즉시로 내게 어떤 종류의 행복에 대한 취향을, (행복에 대한 취향은 순전히 형태, 언제나 특별한 형태를 통해서만   있다.) 그녀 곁에서 살면 실현될  보이는 그런 행복에 대한 취향을 주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전히 '습관' 일시적 중단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 우유 파는 아가씨가 이용할  있도록  내가 그녀 앞에 내민 것은 생생한 쾌락을 음미할 능력이 있는 나의 존재 전부였다. 평상시 우리는 최소한으로 축소된 존재로 살아간다. 우리 능력의 대부분은 잠들어 있다. 자신이 해야  일을 알며 다른 능력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습관에  능력들이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  아침, 틀에 박힌 삶이 중단되고 장소와 시간이 바뀌자 이런 능력은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안에 틀어박혀 살며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사라졌기 때문에  자리를 채우려고  모든 능력이 달려와 서로 열심히 경쟁하면서--바다 물결처럼 여느 때와는 다른 높이로 똑같이 높아지면서--가장 저속한 것에서 가장 고상한 것으로, 호흡이나 식욕, 혈액순환으로부터 감성이나 상상력으로 높아져 갔다.  소녀가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고 믿게 하는  장소의 매력이 그녀의 매력에 덧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소녀는  장소에 그런 매력을 더했다. 만일 내가 매시간  소녀와 함께 지낼  있다면, 급류나 , 기차가 있는 곳까지 함께 가서 항상 곁에 머물  있다면, 그녀가  안다고 느낄  있다면, 그녀의 생각 속에서 한자리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삶이 정말이지 무척이나 감미로울  같았다. (중략) 이제 날이 환히 밝았다. 여명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열광이  소녀 탓에 생겼는지, 또는 반대로 그녀 가까이에서 느꼈던  기쁨 대부분이  열광으로부터 야기되었는지, 어쨌든 그녀는  기쁨과 아주 밀접하게 어우러졌고, 그녀를 다시 보고 싶은 욕망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흥분 상태가 완전히 가시지 않기를 바라는, 거기에 자기도 모르게 끼어들게  존재와 영원히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그런 정신적인 것이었다.  상태가 쾌적하게 느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특히  상태가 내가 보는 것에 다른 음색을 주고,(팽팽하게 당겨진 현이나 신경의 빠른 진동이 다른 음향이나 다른 안색을 생겨나게 하듯이) 나를  명의 배우로서 미지의 세계 속으로, 무한히 흥미로운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주었기 때문이다. 기차가 속도를 내는 동안에도 여전히  시야 안에 있던  아름다운 소녀는 하나의 경계로 분리된, 내가 아는 삶과는 다른 삶의 일부처럼 보였고, 사물에 의해 깨어난 감각들도  이상 이전과 동일한 감각이 아니어서, 이제 거기서 빠져나온다는 사실이 내게는 마치 죽음처럼 생각되었다. 적어도  새로운 삶과 연결된  보이는 감미로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매일 아침  시골 소녀에게 카페오레를 청하기 위해  근처에 사는 것만으로도 족했으리라. 그러나 슬프게도 그녀는 내가 점점  속도를 내어 달려가는  다른 삶에는 영원히 부재할 것이며, 그래서 내가 체념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느 날엔가 같은 기차를 타고 같은 역에서 멈추기로 계획을 세워야만 했으리라. 이런 계획은 타산적이고 능동적이며, 실질적이고 기계적이며,  게으르고 원심적인 우리 정신의 성향에 약간의 양분을 제공해 준다는 이점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 정신에는, 우리가 받았던 즐거운 인상을 보다 일반적이고 초연한 방식으로  자체로서 심화하는  필요한 노력을 기꺼이 회피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인상을 계속 음미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정신은  인상을 미래 속에서 상상하기를 좋아하며,  인상을 다시 태어나게   환경을 능숙하게 준비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일은 인상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인상을 다시 만드는 수고를 피하게 하며, 밖에서 새로 인상을 받아들일  있다는 희망을 갖게  준다.

작가의 이전글 대중매체의 문화적 효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