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 단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편집자 주] 바삐 스쳐 지나가는 삶의 한 순간 속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잠자고 있는가. 마치 좋은 책이 그러한 것처럼. 마르셀 프루스트의 눈은 그것을 응시한다. 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편 '꽃 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발췌해 소개한다. 김희영이 옮긴 민음사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32-36쪽.
아침 햇살이 반사되어 다홍색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은 하늘보다 더 분홍빛이었다. 그녀 앞에서 나는, 매번 우리가 아름다움과 행복을 인식할 때마다 마음속에 다시 생겨나는 그 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아름다움과 행복은 개별적인 것이건만 우리는 늘 그 사실을 잊고, 이 아름다움과 행복을 우리 마음에 들었던 여러 다른 얼굴들이나 우리가 체험했던 갖가지 기쁨들 사이에서 일종의 평균치를 형성하는 관습적인 표본으로 대체함으로써 무기력하고도 무미건조하며 추상적인 이미지만을 간직한다. 그러나 이 이미지에는 우리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물의 성질이, 아름다움과 행복의 고유한 성질이 결핍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에 대해 비관적인 판단을 하며, 이 판단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름다움과 행복을 충분히 고려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아름다움과 행복을 없애고 이에 관해 단 하나의 분자도 들어 있지 않은 종합적인 사실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누군가가 새로 나온 '좋은 책'에 대해 말하면 어떤 문인은 그 책이 자기가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좋은 책들을 한데 모아 놓은 일종의 합성물일 거라 상상하고 미리부터 권태의 하품을 한다. 그렇지만 좋은 책이란 특별하고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지나간 모든 걸작들의 합산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완전히 흡수해도 아직 발견되기에 충분치 않은 그 어떤 것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이유는 바로 책이 이런 합산 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기도 전에 싫증부터 냈던 문인도 이런 새로운 작품을 접하면 작품에 묘사된 현실에 흥미를 느낀다. 이처럼 내가 혼자 있을 때 내 상념이 그리던 아름다움의 모델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 아름다운 소녀는, 즉시로 내게 어떤 종류의 행복에 대한 취향을, (행복에 대한 취향은 순전히 형태, 언제나 특별한 형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녀 곁에서 살면 실현될 듯 보이는 그런 행복에 대한 취향을 주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전히 '습관'의 일시적 중단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 우유 파는 아가씨가 이용할 수 있도록 내가 그녀 앞에 내민 것은 생생한 쾌락을 음미할 능력이 있는 나의 존재 전부였다. 평상시 우리는 최소한으로 축소된 존재로 살아간다. 우리 능력의 대부분은 잠들어 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며 다른 능력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습관에 그 능력들이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행 날 아침, 틀에 박힌 삶이 중단되고 장소와 시간이 바뀌자 이런 능력은 그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살며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 자리를 채우려고 내 모든 능력이 달려와 서로 열심히 경쟁하면서--바다 물결처럼 여느 때와는 다른 높이로 똑같이 높아지면서--가장 저속한 것에서 가장 고상한 것으로, 호흡이나 식욕, 혈액순환으로부터 감성이나 상상력으로 높아져 갔다. 그 소녀가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고 믿게 하는 이 장소의 매력이 그녀의 매력에 덧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소녀는 이 장소에 그런 매력을 더했다. 만일 내가 매시간 그 소녀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급류나 소, 기차가 있는 곳까지 함께 가서 항상 곁에 머물 수 있다면, 그녀가 날 안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녀의 생각 속에서 한자리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삶이 정말이지 무척이나 감미로울 것 같았다. (중략) 이제 날이 환히 밝았다. 여명에서 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내 열광이 이 소녀 탓에 생겼는지, 또는 반대로 그녀 가까이에서 느꼈던 그 기쁨 대부분이 내 열광으로부터 야기되었는지, 어쨌든 그녀는 내 기쁨과 아주 밀접하게 어우러졌고, 그녀를 다시 보고 싶은 욕망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이 흥분 상태가 완전히 가시지 않기를 바라는, 거기에 자기도 모르게 끼어들게 된 존재와 영원히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그런 정신적인 것이었다. 이 상태가 쾌적하게 느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특히 이 상태가 내가 보는 것에 다른 음색을 주고,(팽팽하게 당겨진 현이나 신경의 빠른 진동이 다른 음향이나 다른 안색을 생겨나게 하듯이) 나를 한 명의 배우로서 미지의 세계 속으로, 무한히 흥미로운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기차가 속도를 내는 동안에도 여전히 내 시야 안에 있던 그 아름다운 소녀는 하나의 경계로 분리된, 내가 아는 삶과는 다른 삶의 일부처럼 보였고, 사물에 의해 깨어난 감각들도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감각이 아니어서, 이제 거기서 빠져나온다는 사실이 내게는 마치 죽음처럼 생각되었다. 적어도 이 새로운 삶과 연결된 듯 보이는 감미로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매일 아침 이 시골 소녀에게 카페오레를 청하기 위해 역 근처에 사는 것만으로도 족했으리라. 그러나 슬프게도 그녀는 내가 점점 더 속도를 내어 달려가는 저 다른 삶에는 영원히 부재할 것이며, 그래서 내가 체념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느 날엔가 같은 기차를 타고 같은 역에서 멈추기로 계획을 세워야만 했으리라. 이런 계획은 타산적이고 능동적이며, 실질적이고 기계적이며, 또 게으르고 원심적인 우리 정신의 성향에 약간의 양분을 제공해 준다는 이점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 정신에는, 우리가 받았던 즐거운 인상을 보다 일반적이고 초연한 방식으로 그 자체로서 심화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기꺼이 회피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 인상을 계속 음미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정신은 이 인상을 미래 속에서 상상하기를 좋아하며, 이 인상을 다시 태어나게 해 줄 환경을 능숙하게 준비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일은 인상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그 인상을 다시 만드는 수고를 피하게 하며, 밖에서 새로 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