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 중에서
[오늘의 한 단락] 영국의 영문학자 이언 와트(1917-1999)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Myths of Modern Individualism>에서 발췌해 소개한다. 1996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저자는 서양 문학사에 '신화'로 남은 네 인물 <파우스트> <돈키호테> <돈 후안> <로빈슨 크루소>의 정밀 독해를 통해 근대 개인주의의 문화적 원류와 자취를 분석했다. 그 중에서 대중매체에 대한 언급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73년 그의 <자서전>에서 아버지 제임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분은 이성이 인간의 정신에 닿을 수 있을 때마다 거기에 미치는 영향을 너무 확신한 나머지, 모든 인구가 글을 배운다면, 모든 종류의 의견이 말과 글로 그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참정권을 통해서 입법부를 임명해 그들이 택한 의견을 현실화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하셨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개인주의의 복음서 중 몇 안 되는 정전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존 스튜어트는 그의 아버지보다 덜 낙관적이었다. 물론 우리도 그렇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20세기 초부터 학교 교육이 의무였고 선거권이 전 인구에게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물론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가 우리의 주제와 특히 관계가 있다. 첫째는 개인적 삶과 집단적 삶에서 이성의 힘을 제임스 밀이 터무니없이 과대평가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성의 적은 과거에 '격정'이라고 불리던 것이다. 그리고 '격정'의 힘은 좀 더 최근에는 인간의 삶에서 무의식의 큰 영향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더 강화되었다. 특히 프로이트는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이 대개 개인의 과거가 이루어놓은 심리적 패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런 패턴은 이용될 수가 있다.
토마스 만의 제레누스 차이트블룸은 미래에는 대중의 "정치적 에너지를 방출시키고 가동하기 위해 (중략) 그들에게 신화적 허구를 공급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조르주 소렐의 생각으로 돌린다. 물론 히틀러로 하여금 새로운 종류의 정치적 신화를 통해 그의 '민중'의 내적 충동에 호소할 수 있게 한 것은 인간의 무의식적 욕구가 가진 힘이었다. 에른스트 카시러가 썼듯이, 대체로 무의식적인 욕구와 감정이 "현대의 정치적 삶 전체의 면모를 바꿔놓은 (중략) 새로운 유형의 완벽하게 합리화된 신화"의 도구로 동원되었다. 합리화는 히틀러의 연설과 글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요제프 괴벨스와 레니 리펜슈탈 등의 의식과 조작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제임스의 밀의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은 중요한 두 번째 이유도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새로운 설득 체제들이 나타나면서 독서활동이 대중매체에 부분적으로 자리를 내준 것이다. 영화는 1894년 에디슨의 영사기 발명과 함께 효과적으로 그 역사를 시작했다. 1898년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최초의 활동사진이 대중에게 상영되었다. 컬러영화는 1906년 키네마컬러(Kinemacolor)와 함께 시작했다.
그리고 한 편의 '과도기' 영화-존 베리모어가 출연한 <돈 후안>-가 성공한 데 뒤이어 1926년 유성영화가 소개되었다. 실용화된 최초의 라디오 방송은 1896년 마르코니가 특허를 내놓았으나 BBC와 CBC 방송국이 각각 1927년 설립되면서 1920년대가 되어야 비로소 상업화되었다. 텔레비전은 기술적으로는 1930년대에 개발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별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까지 텔레비전 방송망은 전 세계적으로 확립되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대중매체는 19세기 후반에 시작했지만 기본적으로는 20세기에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수십 년 사이에 와서야 비로소 환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대중매체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론이 있어왔고 이것이 인간적 가치들을 타락시키는 측면은 분명 과장되어온 면이 있으나 크게 과장된 것도 아니다. 어쨌든 대중매체의 세 가지 특징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첫째, 사람들이 라디오를 듣거나 영화와 텔레비전을 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독서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든다. 또한 글 읽기를 배우는 어려움에 비하면 대중매체는 어떤 예비학습 과정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아주 쉽다. 스위치를 켜거나 영화표를 사면 그것으로 끝난다. 이제 보고 듣기만 하면 된다. 물론 대중매체가 독서를 완전히 대체한 것은 아니지만, 독서로 소비되는 시간의 비율을 감소시킨 것은 틀림없다. 최근의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90년 4월과 1991년 3월 사이에 미국 가구의 40%만이 한 권 이상의 책을 산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의 인구가 최대의 도서 구매층으로, 총매출의 16%를 차지했다. 독서는 매우 소수의 활동이며 특히 노년층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젊은 층 사이에서 독서 습관이 결정적으로 저하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대학교수로서의 나의 경험에 비춰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학생들이 매우 유명한 책-이를테면 <돈키호테>나 <로빈슨 크루소>-을 당연히 읽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누군가 그 책을 읽었다면 다른 강의에서 그 책을 다루었기 때문인 것이다.
대중매체의 두 번째 효과는 현대 세계에서 우리 네 신화의 운명과 좀 더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중점은 언제나 새로운 것에 주어진다. 혹은 진정으로 새로운(그래서 혁명적이고 불안스럽게 마련인) 것보다는 예전에 보아오던 것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그래서 수천 개의 텔레비전 방송망에 즐거움을 제공해줄, 그것도 대부분의 경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공해줄 그런 것에 주어진다. 이런 종류의 새로움은 너무나 많은 것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처럼 너무 많은 그림, 이야기, 인물 등이 난무하여 그 어느 것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게 된다. 몇 개의 프로그램을 한동안은 기억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마음에 영원히 남는 기억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권의 책을 소유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책은 좀 더 영원한 것이다. 그것은 서재의 일부가 되어 원할 때마다 읽고 또 읽을 수 있다. 대중매체에서든 모든 것이 재빨리 그리고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널리 전파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만큼 잊히거나 다른 것으로 교체된다.
대중매체의 세 번째 효과는 광고에 대한 의존성과 관계가 있다. 존슨 박사는 이미 오래전에 광고의 정체를 들춰냈다. "약속, 그것도 커다란 약속이 광고의 핵심이다." 모든 광고 방송은 그 제품을 사면 꿈-이상적 주택, 이상적 자동차, 이상적 비누, 이상적 자아 등-이 실현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물론 그것을 정말로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심의 중심에 놓이는 것, 행복한 구매자들의 세상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시청자의 상상력은 어떤 집단적 기획에 참여하도록 요구받지 않으며, 그것은 서사시를 읽을 때 암묵적으로 받는 요구와는 반대된다. 상업성은 개인 구매자인 시청자를 향한 직접적 호소이다. 그것은 에머슨의 말처럼 "물건이 안장에 앉아 / 인간을 모는 형국"을 선언한다.
독서의 쇠퇴, 대중매체가 끝없이 내놓는 새로운 즐거움, 그리고 소비자에 대한 아부성 신격화가 가져오는 진짜 문화적 효과는 무엇인가? 크리스토퍼 래시는 <나르시시즘의 문화-기대가 줄어드는 시대의 미국의 삶The Culture of Narcissism: American Life in an Age of Diminishing Expectations>(1979)에서 한 가지 극단적 대답을 내놓는다. 프로이트가 물웅덩이에 비친 자기 모습과 사랑에 빠진 소년에 관한 그리스 신화에서 드러나는 자아상이 가져오는 심리적 효과를 요약하기 위해 나르시시즘을 이용했던 것처럼, 래시는 현대판 나르시시즘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 취미와 오락거리가 그 자신에 중심을 두고 있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시사한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진정한 대상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래시는 단언한다. 사회의 모든 집단적 힘 역시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이다. 그 자신의 개인적 소망과 어긋나는 것은 무엇이든 그에게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래시의 책의 한 장에는 '호레이셔 엘저에서 행복한 매춘부로'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여기서 그의 기본 의도는 호레이셔 엘저의 청교도 노동윤리와 다른 누구와도 상관없이 단순히 '출세'만 하면 된다는 현재의 생각을 대조시키려는 것이다.
래시의 책은 오늘날 현대 개인주의의 주요 타락상을 보여주는 일종의 쇼핑 리스트이다. 거기에는 역사 감각의 결여, 기분을 좋게 해 준다고 약속하는 인기 서적의 유행, 새로운 문맹, 권위의 붕괴, 감정으로부터의 도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들을 무엇으로 대체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안들은 역사 감각,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절대적 윤리,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감정에 대한 인식, 가정과 학교 내의 규율, 문화적 엘리트주의 등 반개인주의적인 것들이 될 것이다. 이러한 대안들은 궁극적으로-데이비드 리스먼의 말을 인용하자면-우리의 "현재지향적 쾌락주의"를 대체해야 할 필요성을 나타낸다.
탤콧 파슨스는 현대문화를 역사적으로 독특한 현상으로 보는 점에서 루이 뒤몽의 견해와 그 자신의 스승인 막스 베버의 견해를 따른다. 그러나 그들—뒤몽, 베버, 파슨스—은 래시와 내가 그 과정에 수반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부수적 손실들은 논의하지 않는다. 아마도 현대문명에 대한 환멸은 비교적 최근에야 형체를 드러낸 모양이다. 킹슬리 에이미스가 "더 많은 것은 더 못한 것을 뜻한다"라고 했을 때 당시 사람들의 반발은 그가 지금 그런 말을 했다고 가정했을 때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오늘날 우리는 사회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줄수록 나중에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는 것, 그리고 그 대가의 일부는 나르시시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가 -가정, 학교, 정치 생활 등에서- 그것이 부여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반대급부적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면, 결국 사회와 개인 모두 덜 행복하고 덜 만족스러울 것이다.
어쩌면 역사는 욕망을 창조하는 것이 실은 좌절이라는 역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네 개인주의 신화는 모두 주인공이 부정적인 힘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보일 것이다. 즉 개인주의는 자유에 대한 내적 외적 제약이 얼마나 강하고 복잡한가에 달려 있다. 바꾸어 말하면 네트 위와 코트 위에 그러진 선과 게임의 규칙이 없다면 테니스도 없다. 현대의 진보에 대한 이 가혹한 결론을 생각할 때 <리어 왕>에 나오는 대화가 불현듯 내 머릿속에 떠오른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켄트 백작이 에드거에게 "이것이 약속한 결말인가"라고 묻자, 에드거는 슬프게 이렇게 대꾸한다. "아니면 그것이 얼마나 끔찍할까를 보여주는 표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