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어떤 죄수가 목숨을 걸고 탈출했을지도...
알카사바를 오르며, 금방이라도 돌이 막 떨어질듯한 그 거친 폐허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900년 전, 누군가 여기서 몰래 연인을 만나 사랑을 속삭였겠지.
아니면 어떤 죄수가 목숨을 탈출했을지도..."
오래된 폐허 같은 유적지에는 그런 힘이 있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보는 드라마틱한 사화들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상상하게 하는 힘이.
알카사바가 지어진지 거의 1000년이 지났다.
11세기, 하망 무함마드가 이 지역의 방어를 위해 알카사바(요새)를 건축했다.
13세기, 기독교도들의 국토 회복 운동이 거세지며 카톨릭 왕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가 말라가를 침공해 알카사바를 함락했다.
18세기, 알카사바는 요새로서의 기능을 잃고 빈민가처럼 방치되었다.
한때는 알카사바 내부에는 가난한 주민들 수백 명이 거주하기도 했다.
그렇게 무너지고, 파괴되고, 훼손된 채 20세기 초까지 방치되다가 1930년부터 스페인 정부에 의해 복원 작업이 착수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말라가의 필수 관광지가 되었다.
그 많은 관광객들 사이에 나와 남편이 있었다.
말라가 성당 옥상에 다녀와서 신체적으로 지치고, 피카소 미술관에 가서 그 강렬한 공포심에 마음이 지치고,
남편은 커피로 나는 맥주로 에너지를 어떻게든 끌어모아서 알카사바의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하루 안으로 죄다 내몰지만 않았어도 괜찮았을 텐데.
하루는 여기 하루는 저기 하면서 여유 있게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이제 한국에 살고 있다.
고로 짧은 유럽여행동안 한 도시에만 있는 것은 상당한 사치란 말이다.
예전에 유럽 살 때는 한국 여행객들이 그렇게 여기저기 수밖에 겉핥기식으로 여행하는 게 참 못마땅했다.
근데 이제 알겠다.
옆동네 가듯 저가비행기 타고 수시로 오갈 수 있는 유럽인들과 달리,
한국사람들은 정말 바쁜 시간 내어 긴 휴가를 맞춰서 온 거고, 또 언제 올지 기약이 없기 때문에 바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이다.
그래도 나도 욕심이 생겨서 일정이 타이트해졌는데, 그러다 보니 체력적으로는 많이 무리가 되었다.
그래도 힘들게 오른 정상에서 보는 뷰는 모든 고생을 보상해 줄 만큼 아름다웠다.
날씨가 좋은 날은 아프리카까지 보인다고 하니, 알카사바라는 이름답게 훌륭한 요새 노릇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말라가의 작은 알람브라처럼 여겨지는 이 알카사바.
이곳 안의 길들은 이곳을 침범한 적들이 자기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게 하도록 얽히고설켜 있다고 한다.
그리고 통로를 계속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그 더운 지역에서 물이라는 귀중한 자원을 가지고 있음을 뽐냄으로 권력을 자랑함과 동시에 온도를 낮춰주는 역할을 했다고.
물줄기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생각했다. 900년 전 이곳의 주인들도 지금의 나처럼 이 뷰에 감탄했을까? 아니면 이미 너무 익숙해서 그저 일상이었을까? 결국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대를 살다 가는 과객일 뿐이구나
언젠가 또 다른 여행자가 이곳에 와서 '2025년, 어떤 한국인 부부가 여기서 맥주와 커피로 기운을 내며 이 길을 올랐겠지'라고 상상이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