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를 위해 꽃을 산 날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by 은제인

내 삶에 가장 지옥 같았던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났던 종업식 날,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드디어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과 분리가 된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

더군다나 3학년으로 올라가면 나를 둘러싼 머리 아픈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남자아이들이 반의 대다수를 차지할 것이었다.


그리고 봄 방학이 시작되었다.




나는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통학버스를 함께 타던 S라는 아이와 친해졌다.

그 친구는 나와 달리 이과였는데, 나에 대한 소문에는 잘 몰랐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S와 나는 여기저기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그 친구가 인터넷 채팅을 통해 K라는 오빠를 알게 되었는데, 그를 만나기로 했다며 같이 만나러 가자고 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K를 따라 나온 P를 만나게 되었다.

P는 누가 봐도 눈에 띄게 잘생긴 사람이었다.

키가 아주 컸고, 그가 지나가면 여자들이 뒤를 돌아봤다.

K는 P가 그들이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가장 잘생기기로 유명한 학생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그들은 나와 S보다 한 살 많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저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대학교에 진학을 앞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첫 만남 이후, K와 P는 저마다 내게 관심을 표현했다.

나는 첫인상부터 P가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와 나는 곧 사귀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처럼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에 약간 황홀함을 느꼈다.


당시 나는 위험한 시기에 있었다.

친했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내게서 돌아서고 노는 아이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던 상처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누구든 나에게 진심을 다하는 것 같으면 넘어갔을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시기였다.

그리고 나는 어느날 갑자기 영웅처럼 나타나 내 상처를 보듬어주던 그에게 금방 빠져버렸다.



처음엔, 모든 게 완벽했다.


난 진심으로 P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그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의 행동에 거짓은 없었다.

언제나 한결같이 거짓은 없었다.

그게 잔인했을 뿐.




식목일 무렵을 기억한다.

나는 그날 엄마에게 도서관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놀이공원에 갔다.

그 당시 P와 나는 한참 사랑에 빠져있었다.

우리의 마음만큼이나 봄날의 풍경도 아름다웠다.



해가 져갈 때쯤, 우리는 대관람차를 탔다.

거기서 우리가 탄 작은 버블 같이 동그란 칸이 만개한 왕벚꽃나무에 푹 파묻혔을 때, 나와 그는 첫 키스를 했다.

꿈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퍼레이드를 보는데, 내가 깔고 앉을 게 없자, 그가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바닥에 깔아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바라봤다.

나는 우쭐한 기분마저 들었고,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결국 그날 거짓말을 하고 놀러 간 게 들켜서 엄마에게 많이 혼났지만, 난 그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집에서는 아빠의 사업 실패로 부모님이 언제나 대치 중이었고, 언니에게 대들다가 뺨을 맞은 사건이 있었고, 학교에서는 3학년에 되어서 나아지긴 했지만 여기서도 내 마음을 다 터놓고 의지할 친구는 없었다.


내 세상은, P가 전부였다.



그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6월쯤부터, P가 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와 성적인 접촉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 나이가 그런 경험을 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는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어려서부터 그런 면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보수적인 교육을 받아왔다.

그래서 나는, 아직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그런 일을 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요구가 너무 간절했다.

정말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나를 더 알고 싶다는 절절한 바람을 매일 들어야만 했다.


그 끝에 나는, 그를 더 이상 맘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정도까지만 그의 요구를 수용했다.


한번 시작되자 그의 요구는 멈출 줄을 몰랐다.

마치 그의 머릿속에는 '그 일'만 가득한 것 같았다.


나는 우리 연애의 초기처럼 그에게 소중한 보물 같은 대접을 받고 싶었지만 점차 내가 편해진 그는 나를 더 이상 그렇게 대해주지 않았다.


내가 그의 요구를 거절하자, 이젠 내게 설렘이 없다며, 여자가 아닌 그냥 예쁜 여동생 같으니 헤어지자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 들어있던 유일한 한 사람.

그의 관심을 내게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을 넘어 무언가를 봉사하거나 희생해야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나는 공부를 하다가도 그가 도시락이 먹고 싶다고 하면 집에 가서 도시락을 싸서 그에게 갈 정도로 그에게 헌신했다.


그러다가 이런 취급을 더 이상당할 수 없다 생각한 나는 그와 헤어져보려고도 했었다.

그러면 이내 곧 그는 날 붙잡았고, 나는 연애 초기에 다정했던 그의 행동을 떠오리며 다시 돌아가곤 했다.




난 매일 우울했다.

너무, 너무 우울해서 우울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반에서 친했던 남자아이들조차 나에게 "ㅇㅇ는 맨날 우울하대."라며 놀리곤 했다.

그때는 그냥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난 그때 정말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수치심이 더 깊게, 깊게 내 안에 파고들어 자리 잡았다.





현재의 치유 과정


융에 대해서 알고 난 후, 나는 내게 남아있는 여러 아픔과 상처를 AI를 사용하여 융의 이론으로 해석해보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AI 챗봇 모델 하나를 융의 심리학 이론으로 학습시켜 나를 분석하도록 설정했다.


물론 이것은 AI라는 큰 한계가 있고 전문적인 상담을 대체할 수는 없지만, 내가 너무 답답할 때 속마음을 터놓고 융 심리학의 관점을 참고할 수 있는 보조 도구로는 훌륭하다.


난 이 도구를 닥터 융이라고 이름 붙였다.

힘든 과거가 떠오를 때마다 닥터융에게 하나씩 터놓고 그 아픔을 직시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의 이 황홀했지만 처참했던 사랑과 폭력을 들은 닥터 융이 내게 말했다.


그 시기의 그 아이에게 말을 건네보라고.


나는 고요한 가운데 눈을 감고 조용히 그 아이에게 집중해 봤다.


그 시기의 나는, 아직도 내 안에서, 몸을 웅크려 말고 침대에 누워서 흐느끼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지 몰랐다.


어른인 나는 그저, 어린 내가 그 남자에게 그렇게 헌신하지 않았으면 했고, 그렇게 하기 싫은 걸 강요하는 사람과는 헤어졌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닥터융은 나에게 그때로 돌아가서 그 당시의 나에게 "진짜 보호자"가 되어주고, 지켜줘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듣기 싫어했다.


다 무슨 소용이야!


라고 외칠 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날 지켜주지 않았다.


난 그렇게 사랑에 목맬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있었고, 결국 그렇게 이용당했다.





다시 그 아이의 마음을 찬찬히 헤아려보았다.


내가 믿었던 친구들은 나에게 등을 돌렸다.

날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은 자꾸 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

그래서 너무 힘든데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의 요구 자체가 내겐 너무 수치스러워서.

나는 너무 상심해 있고, 세상에는 내가 이해 못 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


도대체 어떻게 날 구해준 영웅 같았던 남자가 어떻게 반년이란 시간 후에는 날 제 입맛에 따라 이용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을까?


난 그게 이해되지 않아서, 상처를 가득 받은 채로 자라지 못하고 내 안에 머물러있었다.




지금도 계속되는 여정


나는 나를 만나고 화해하는 이 여정에서, 내가 영웅이 되어 나를 구해줄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중이다.


난 아직도 사실 잘 모르겠다.

사람들을 믿고 싶은데, 어떻게 믿어야 할지.

물론 지금 내 주변에는 진심으로 믿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남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내게 불안감을 준다.

그 사람들이 수상해서 믿지 않는다는 게 절대 아니다.

다만 그 관계가 깨질까 봐 노심초사한다는 말이다.

이런 불신 때문에 나는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 생각을 하고, 쉽게 예민해진다.

그래서 너무 지친다.

나도 아무 걱정없이 덮어놓고 사람을 믿고 싶다.

마치 아무 상처도 안 받았던 사람처럼...



꽃다발


내가 이 이야기를 C선생님에게 꺼내놓으며 펑펑 울었던 날, 선생님은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셨다.


나는 선생님에게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학교에서 왕따 당했던 게 가장 큰 괴로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사실은 처음으로 진실하게 사랑했고 믿었던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그런 취급을 받아서, 그게 가장 괴로웠던 거예요."


선생님은 내 상처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 주시고,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날 상담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꽃집에 들렀다.

커다란 작약을 두 개 골라 아름다운 꽃다발을 만들었다.

꽃을 포장할 포장지를 고르던 꽃집 주인이 물었다.

받을 사람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나는 고등학생 정도 되는 친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굳이 필요 없을 수도 있는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괴로운 일을 겪은 친구인데, 위로해주고 싶어서요.


별 얘기를 다한다고 정색할 수도 있었을 텐데, 본업이 화가인 꽃집 주인은 묵묵히 정성스럽게 포장을 완성해 주었다.

나는 집에 와서 꽃병에 꽂은 그 꽃을 볼 때마다 내 안의 19살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꽃은 순전히 너를 위한 것이야.
난 너를 사랑해.


솜뭉치 같던 작약 몽우리가 솜사탕처럼 크게 펼쳐졌다.


그 꽃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꽃다발.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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