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채프먼의 '5가지 사랑의 언어'로 풀어보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오해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부모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느낀 적이 그리 많았던 것 같진 않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가슴까지 사랑이 느껴지는 일은 드물었다.
왜일까?
몇 가지 기억나는 일은 다음과 같다.
한 번은 엄마가 나를 씻겨주면서 샤워타월을 일부러 따뜻한 물로 적셔 거품을 냈을 때다.
내가 물었다.
“엄마, 왜 따뜻한 물로 하는 거야?”
엄마가 답했다.
“안 그러면 차가우니까.”
그때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꼈다.
두 번째는 엄마가 나를 무릎에 앉혀주고 친절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줬을 때다.
평소엔 무뚝뚝한 말투인 엄마는 보통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상냥해지곤 하는데,
이날은 책 전집을 판매하는 외판원이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책을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읽어줬다.
그때 너무 좋아서, 엄마가 날 사랑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언니나 동생 없이 나 혼자 엄마와 쇼핑을 나가 내가 필요한 것을 샀을 때 정도였다.
그럴 때면 다른 형제들과의 경쟁 없이 엄마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이렇게 적자면 우리 엄마가 천하의 야박한 엄마 같겠지만, 난 우리 엄마를 안다.
우리 엄마는 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희미할 정도로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사셨고, 우리 삼 남매는 커가는 내내 큰 모자람 없이 자랐다.
일례로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 때 미술학원을 다니는 동안 매일 손수 도시락을 싸서 차에서 먹이고 나를 학교에서 학원까지 데려다주셨다.
그런 행동 들은 모두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나도 부모가 되어보니 더욱더 이해한다.
내가 모자람이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고 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부모님의 노력이 뒤따르는지를.
그러나 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나를 최선을 다해 사랑해 주셨는데, 나는 내가 사랑받았다는 것에 확신이 없이 자랐다는 게.
그래서 아직까지도 자아가 불안정해서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을 하고 받지 않아도 되는 고통을 받는다는 게.
게다가 [똑똑똑, 나를 만나러 왔어요]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 하나가 부모님에 대한 양가감정이다.
왜 나는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을 머리로 잘 알면서 계속 나의 결핍을 토로하는가?
왜 나는 고마워할 줄 모르고 괴로워하는가?
이런 괴리가 날 힘들게 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집어보면 좋은 개념이 있다.
바로 게리 채프먼의 ‘5가지 사랑의 언어'이다.
게리 채프먼 박사는 30년 이상의 상담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사랑을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크게 5가지로 나뉜다는 것을 발견해서 [5가지 사랑의 언어(2010)]라는 저서에서 그 개념을 전달했다.
"사랑해", "자랑스러워", "잘했어", "고마워"
말로 표현되는 사랑이다. 격려, 칭찬, 감사, 인정의 말을 통해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따뜻한 편지 한 장이 비싼 선물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같이 있어줘", "나만 봐줘"
온전히 함께 보내는 시간을 통해 사랑을 느낀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집중하며 교감하는 시간이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맞추며 대화하는 것, 함께 산책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사랑의 증거다.
"널 생각하며 준비했어"
선물을 통해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비싼 선물이 아니어도 좋다. 길가에서 핀 꽃 한 송이, 좋아하는 간식, 기념일을 기억하고 준비한 작은 선물. 이들에게 선물은 "당신을 생각했어요"라는 가시적인 증거다.
"내가 해줄게", "도와줄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랑이다. 설거지를 대신해 주는 것, 고장 난 물건을 고쳐주는 것, 피곤한 날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 "사랑은 동사"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랑의 언어다.
"안아줘", "손잡아줘"
따뜻한 포옹, 손 잡아주기, 어깨 토닥이기, 하이파이브. 신체적 접촉을 통해 사랑과 안정감을 느낀다. 이들에게 스킨십은 감정적 연결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게리박사는 사랑의 언어를 알 수 있는 테스트도 공유했는데, 이는 인터넷에서 [5가지 사랑의 언어 테스트]를 검색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나의 1순위는 함께하는 시간, 그리고 2순위는 인정하는 말이다.
나는 삼 남매 중에 둘째로 태어났고 우리 엄마는 독박육아로 애 셋을 키우느라 매우 바빴기 때문에 나와 1:1로 충실히 보내는 시간은 매우 적었다.
그리고 엄마는 성격상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말도 잘하지 않고 엄마 자신을 인정하는 말도 별로 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늘 전교 1등을 하는 언니에게 칭찬도 없이 “서울 가면 너보다 잘하는 애들이 더 많아.”라는 말로 깎아내릴 정도였다.
엄마는 자식들을 인정해 주는 말을 하면 어디 가서 교만하게 굴까 봐 걱정이 되어서 일부러 인정해 주는 말을 잘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결과로 우리 삼 남매는 결국 남의 인정에 목마른 어른이 되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했던 존재인 엄마의 인정과 칭찬을 충분히 받았으면 오히려 다른 사람의 평가에는 무딘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한다.
'남이 뭐라 한들 어떠랴, 우리 엄마가 내가 최고라는데?'라는 생각으로 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반면 우리 엄마의 사랑의 언어는 무엇이었을까?
확실치 않지만, 내 짐작으로는 봉사(Acts of Service) 일 것 같다.
여행에 가서도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서 식구들의 끼니를 다 챙기는 것.
너무 춥거나 덥지 않게 모든 것을 살피고, 모자람이 없도록 챙기는 것.
언제나 학부모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필요할 때마다 와서 도움을 주는 것.
그 모든 게 엄마의 사랑의 언어였던 것이다.
나는 그런 엄마의 사랑의 표현을 받으며 안락하게 지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아니 그것보다는 내게 통용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따뜻하게 느끼지 못했다.
내가 철이 없어서 생긴 문제였을까? 아니다.
이것은 철이 들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우리의 사랑의 언어가 달라서 생긴 비극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의 언어가 다른 부모와 자식, 그 간극을 좁히는 법은 무엇일까?
1. 부모님의 언어를 파악하고 번역하기
부모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해 왔는지 돌아보자.
항상 자식들을 위한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면 ‘봉사’, 선물을 자주 사주셨다면 ‘선물’ 일 가능성이 크다.
“엄마는 왜 늘 나에게 따뜻한 말을 안 해줄까?”가 아니라,
“엄마가 해준 집밥, 나를 위해 치운 빨래가 곧 ‘사랑해’라는 말이구나” 하고 번역해 본다.
2. 스스로 보충하기
부모님의 방식만 기다리다 상처받는 대신, 내게 필요한 사랑의 언어를 내 삶 속에서 찾아야 한다.
친구, 배우자, 심지어 나 자신에게서도.
내가 스스로에게 “수고했어,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3. 양쪽 언어를 모두 받아들이기
“내가 원하는 사랑”만 인정하면 늘 결핍이 남는다.
하지만 “부모님의 방식도 사랑이었다”라고 껴안는 순간, 빈자리가 조금씩 채워진다.
4. 나의 언어를 알려주기
때로는 부모에게 솔직히 전해야 한다.
“엄마, 나 칭찬 한마디가 참 힘이 돼.”
부모님이 서툴더라도, 몇 번의 시도는 관계를 조금씩 바꾼다.
나는 개인적으로 위에 제시한 선택지 중에서 4번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나도 엄마에게 내 사랑의 언어를 말해본 적은 있다.
엄마가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줄 때 사랑을 느낀다고.
하지만 엄마는 내가 원하는 표현방식은 엄마에겐 너무 이질적이고 힘들다고 했다.
그 말이 좀 서운했지만, 엄마에게 엄마가 원하지 않는 걸 요구하는 것도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약간은 체념한 상태다.
이제 나도 다 큰 성인이고 한 아이의 엄마이니, 내가 제대로 받지 못한 형태의 사랑보다는 내가 제대로 주지 못한 사랑에 대해서 더 생각해봐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사랑은 한 가지 언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번역이 필요하고, 때로는 내가 먼저 다른 언어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결국 더 넓고 깊은 사랑을 배우게 된다.
미래에는 나의 아이들의 사랑의 언어도 배워서 그 언어를 사용하는 연습도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언어로 사랑을 전달해 주고, 또 나의 사랑의 언어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그런 시간이 오리라 믿는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랑이 누락되지 않고 상대방에게 전해질 수 있는 그런 가정을 만들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