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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본주늬 Feb 25. 2023

한반도와 반도체, 흩어지면 죽는다

CEO's Spirit 8. 삼성전자가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진짜 이유

Keywords

-반도체 특화단지: 넘쳐나는 허브와 클러스터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와 인재

-구마모토: 실리콘아일랜드와 고객

-신주: 실리콘쉴드와 학생

-젓가락과 맨발: 이건희 회장과 이순신 장군


다가오는 27일에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지정하는 ‘전략산업 특화단지‘ 신청이 마감된다. 상반기에 특화단지가 선정되면 신속한 인허가와 함께 인센티브 지급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그 중에서도 반도체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대 수출 품목으로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노리고 있는데 경기도 용인시와 강원도 원주시 뿐만 아니라 인천, 대전, 대구, 광주, 부산 등 대부분의 광역시도 반도체 특화단지 유치전에 발벗고 나섰다. 전국적으로 반도체 산업에 관심을 갖는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자칫 넘쳐나는 반도체 허브와 클러스터에 지역 간 밥그릇 싸움으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 일본,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면 대한민국의 반도체 전략산업 특화단지도 어떤 방향을 추구해야 할지 보일 것이다.



1. 샌프란시스코, 인재는 인재를 부른다.


미국 동부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깔끔하게 수트를 차려입은 뉴욕 월스트리트의 IB 컨설턴트라면 미국 서부는 청바지에 후드티를 걸친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의 IT 엔지니어가 떠오른다. 보통 '실리콘밸리'라고 하면 애플이나 구글 같은 빅테크를 떠올리겠지만 사실 미국의 반도체, 아니 전세계의 반도체는 바로 샌프란시스코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초에 ‘실리콘’이 반도체의 원재료가 되는 규소를 뜻한다는 것부터 실리콘밸리는 반도체의 성지와도 같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윌리엄 쇼클리가 이곳에서 반도체 산업을 태동시켰고, 8인의 배신자가 뛰쳐나와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설립한 이후 현재는 실리콘밸리 안에서도 산타클라라 지역의 인텔, 엔비디아, AMD가 미국 반도체 산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유수의 반도체 기업들이 몰려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캘리포니아 특유의 쾌적한 날씨와 캘리포니아 주 정부의 세제 혜택도 한몫을 했지만 스탠포드대학교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훌륭한 인재들이 실리콘밸리에서 창업의 꿈을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UC버클리대학교나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 등 주변 대학교의 유능한 인재들까지 자연스럽게 실리콘밸리로 유입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인텔의 위대한 CEO였던 앤디 그로브가 저서에 남긴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인텔은 작은 회사였고 똑똑한 인재들은 HP나 델 같은 큰 회사로 가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대기업에 입사한 한 젊은 청년이 인텔에 다니는 친구들로부터 인텔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생겨서 인텔에 합류했다고 한다. 이처럼 인재는 또 다른 인재를 끌어당긴다.


대한민국의 주요 대학은 대부분 수도권에 있다. 따라서 수도권 대학에 반도체 인력 양성을 위한 보조금 혜택을 주는 것은 지방 대학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서 가장 효율적으로 인재를 길러낼 수 있는 방법일 뿐이다. 장기적으로 수도권 집중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교육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꿔야 한다. 표준화된 도제식 교육과 SKY부터 내려오는 수직적인 계급 구조에서는 흥미와 적성을 살리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고착화된 대학 시스템을 고치기보다 아예 새로운 스탠다드를 만드는 방법도 있다. 종합대학이 아니더라도 공학계열에서 만큼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새로운 학위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반드시 대학일 필요도 없다. 대학 졸업장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명예로운 증표를 만들면 된다.



2. 구마모토, 옆집에 고객이 지낸다.


지금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지만 1980년대 세계 반도체 기업 상위 10곳 중 무려 6곳(NEC, 도시바, 히타치, 후지쯔, 미쓰비시, 마쓰시타)이 일본 기업이었다. 이 당시 전세계 반도체 수요의 50%를 일본이 공급했고, 그 중에서도 일본의 규슈 지방에서 전세계 반도체의 10%가 생산되었기 때문에 규슈는 '실리콘아일랜드'라는 별칭을 얻었다. 원자폭탄 만큼이나 강력했던 플라자합의 이후 실리콘아일랜드 역시 외딴 섬으로 잊혀져갔지만,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규슈의 대표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는 후쿠오카에서는 로옴이 전력반도체 시장에서 활약하고 있고, 또 다른 도시 나가사키에서는 교세라가 세라믹 부품 생산을 위한 투자에 나섰다. 그리고 구마모토에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일본 반도체의 심장이 다시 뛰고 있기 때문이다.


구마모토 기쿠요마치에서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대만의 TSMC는 이곳에 JASM(Japan Advanced Semiconductor Manufacturing) 공장을 짓고 있는데 그 규모가 무려 11조 원에 이른다. 공장 건설 자금에 일본 정부 뿐만 아니라 소니와 덴소 같은 대기업도 출자하며 실리콘아일랜드를 살리기 위한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다. 또한 JASM 공장이 완공되면 소니, 도쿄일렉트론(TEL)과 삼각형을 이루게 되는데 반도체를 설계하고 장비를 조달받아 생산까지 한번에 처리할 수 있는 구조가 완성되는 셈이다. 게다가 크고 작은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이 구마모토 반도체 허브에 자리잡고 있다. 심지어 규모는 작지만 세 기업 가운데에는 구마모토 현립 공과대학이 있는데 이곳의 학생들은 실리콘아일랜드가 다시 살아 숨쉬게 할 주역들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 또한 구마모토처럼 커다란 기둥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협력업체들과 교육기관이 공존하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향후 생산 거점은 각각 평택과 용인이 될 것이다. 경기도 평택시는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중심으로 브레인시티와 카이스트를 묶어 반도체 특화단지를 구축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경기도 용인시도 SK하이닉스 용인클러스터를 중심으로 플랫폼시티와 마이스터고등학교를 묶어 반도체 특화단지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런데 이때 자급자족이 가능한 반도체 특화단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절대로 소중한 자금을 여기저기에 흩뿌려서는 안 된다. 부모님의 직장부터 자녀들의 학교까지 가족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도시, 반도체를 위해 모였지만 반도체가 아닌 삶도 존중되는 도시가 절실하다.



3. 신주, 선택은 학생이 내린다.


대만에서는 반도체를 '호국신기', 다시 말해 나라를 지키는 신의 무기라고 부른다. 대만과 중국의 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되겠지만 대만에게도 반도체라는 확실한 비장의 무기가 있다. 반도체는 대만 경제를 순식간에 발전시킨 공격 무기가 된 동시에 이제는 대만 안보를 확실하게 보장하는 방어 무기, '실리콘쉴드'가 되었다. 시진핑이 3연임 성공 이후 대만 통일을 선언했지만 반도체가 있는 한 미국이 중국 침공을 바라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대만의 최첨단 반도체 공장이 미국으로 넘어가면 실리콘쉴드가 무력화될 수 있다. 따라서 대만 정치권에서도 반도체를 수호하는 법안이나 정책에는 초당적으로 합의한다. 이해관계에 누구보다도 민감한 정치인들조차 그들의 자리가 실리콘쉴드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주 공업단지에는 TSMC를 포함한 UMC와 PSMC 같은 파운드리 업체들은 물론 미디어텍을 비롯한 노바텍과 리얼텍 같은 팹리스 업체들도 본거지를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글로벌유니칩이나 알칩 같은 디자인하우스부터 케이던스와 시높시스 같은 EDA도 신주 공업단지에 입주하여 실리콘쉴드를 더욱 단단히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대만의 4대 대학 중 국립칭화대학과 국립교통대학이 신주 공업단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즉, 실리콘쉴드를 들고 반도체 전쟁의 최전방에서 싸울 전사들까지 신주 내에서 양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해 대만 최대 첨단기술 연구단지인 ITRI까지 신주 공업단지에 붙어있다. 국가, 기업, 학교, 연구기관이 함께 만들어가는 여야정산학연의 결정체가 어디냐는 질문에 신주 공업단지라고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이유다.


대한민국 정부도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각종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반도체특별법은 대기업 특혜라는 이유로 여야가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고 반도체 계약학과는 교수 확보 문제와 의대 쏠림 현상으로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가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수많은 포럼, 세미나, 컨소시엄에서 외치는 여야정산학연에는 정작 학생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모가 공부하라 해도 자녀가 공부의 중요성에 공감하지 못하면 소용없듯이 정부가 학생들에게 반도체가 갖는 소중한 의미를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반도체 인재 10만 양성',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 전략'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고 말 것이다. 반도체가 나라를 지키는 방패라고 포장하기 전에 학생 개개인의 행복한 삶을 지켜주는 방패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재벌집 막내아들’이 흥행하면서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서 삼성전자를 일으킨 이병철 회장의 추진력과 반도체의 성장성을 일찌감치 내다본 이건희 회장의 통찰력이 재주목받고 있다. 특히 이건희 회장은 섬세함과 청결함이 중요한 반도체 산업에서 젓가락을 쓰고 맨발로 다니는 한민족이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 그 비결은 바로 작디 작은 한반도에 오밀조밀 모여 살며 힘을 모은 한민족이 있었다. 삼성전자가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진짜 이유도 사실 반도체로 하나가 됐던 공동체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개인주의가 만연해진 2023년의 대한민국이지만, 반도체 특화단지 선정에 있어 민족 최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말을 명심하길 바란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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