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s Spirit 9. 삼성전자가 빠져버린 함정과 탈출의 실마리
지난 달 28일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지원법 세부계획을 발표했다. 시설투자 390억 달러를 포함한 527억 달러를 미국 내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에게 지원하겠다는 인센티브와 함께 우려대상국 거래 및 투자 금지, 초과이익 환수 및 공유 요구, 공동 기술연구 참여, 사내 어린이집 설치 등 독소조항을 담아서 말이다. 미국에 170억 달러를 투자해 선단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인 삼성전자나 150억 달러를 투자해 첨단 패키징 공장을 건설하려는 SK하이닉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칩4 동맹을 외치던 미국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 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 지점에서 예외조항을 통한 협상 카드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놓은 함정에 빠져버린 대한민국 기업들이 덫에서 탈출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미국은 보조금을 받는 기업이 향후 10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우려대상국에서 반도체 제품 거래나 시설 투자를 못하도록 하는 가드레일 조항을 명시했다. 쉽게 말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게 중국에서 발을 떼라는 것이다. 이 조항이 특히 치명적인 이유는 중국은 대한민국 반도체의 최대 생산 거점이자 소비 시장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시안 NAND 공장, 쑤저우 패키징 공장을 가동하고 있고 SK하이닉스는 우시 DRAM 공장, 다롄 NAND 공장, 충칭 패키징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 NAND의 40%, SK하이닉스 DRAM의 50%가 중국에서 생산된다. 게다가 그 비중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기업의 중국향 매출은 전체에서 30%에 육박한다. 중국을 떠나라는 말은 대한민국의 두 반도체 기업에게 사업을 접으라는 말과 같은 셈이다.
사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력 제품인 DRAM과 NAND는 반도체 기술 패권에서 중요성이 높지 않다. 미국이 이렇게 악랄하게 대한민국 메모리를 괴롭히는 것은 아마도 삼성전자의 선단 파운드리나 SK하이닉스의 첨단 패키징이 탐나기 때문일 것이다. 메모리는 원하는 카드를 얻기 위한 인질에 불과하다. 반대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게도 믿을 구석은 있다. 두 기업이 전세계에서 차지하는 메모리 반도체 생산량은 DRAM의 경우 70%, NAND의 경우 50%를 웃돈다. 이들이 없으면 미국이 자랑하는 로직 반도체도 발전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따라서 공장 건설이라는 패를 보여주며 메모리에 묶인 족쇄를 풀어낼 수 있다. 다만 미국이 언제든지 메모리를 인질로 잡을 수 있는 만큼 공장 건설이라는 패도 시의적절하게 적정량만 꺼내야 할 것이다.
한편 미국이 밝힌 가드레일 조항에는 '특정 조건을 제외하고'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우려대상국이라는 단어에서 미국 중심의 질서를 위협할 우려가 없다면 예외를 적용할 수 있는 특정 조건에 해당됨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미국 역시 거시경제 우려가 지속되는 마당에 중국을 자극해서 공급 사슬을 붕괴시키거나 소비 심리를 위축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미국이 유례없이 강경하게 나오는 이면에는 미국 역시 내부 위기에 떨고 있으며 정부에 쏠려 있는 시선을 중국이라는 외부로 돌리기 위함임을 추론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잘 이용해서 대한민국 정부와 기업들은 안미경중 기조를 유지해나갈 수 있다. 물론 어느 한 쪽이 무너질 때까지 끝나지 않을 지정학 리스크에서 탈피하기 위해 장기적으로는 생산 거점을 다변화할 필요도 있다.
미국은 보조금 1억5000만 달러 이상 받는 기업은 합의된 기대 수익을 상당하게 초과할 경우 미국 정부와 초과분 일부를 환수 또는 공유한다는 규정도 추가했다. 도로 뱉어내야 할 돈이라면 영양가가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테일러에 파운드리 공장을 지으면서 10억 달러의 인센티브를 받았고, 반도체지원법으로 25억 달러 가량의 보조금을 추가로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SK하이닉스도 패키징 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으로 미루어볼 때 1억5000만 달러 이상의 보조금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치사해서 보조금을 포기하고 싶을 수도 있지만 그러기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보조금 규모는 둘째 치고, 미국의 반도체지원법은 말이 지원이지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는 밸류체인에 들어오라는 강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일단 미국 반도체지원법의 자금의 출처부터 짚고 넘어가야 문제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도 국가 주도 사업이 효과를 보지 못하면 '국민의 혈세를 어떻게 이토록 낭비하냐'는 식의 거센 비난 여론이 생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대급 규모의 이 법안이 훗날 긍정적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정책 효과가 가시적으로 발현되어야 한다. 따라서 미국이 이 단서 조항을 내민 것은 기업들로 하여금 보조금 지원의 예상 효과를 합리적으로 계산해서 필요 이상으로 받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임을 이해할 수 있다. 보조금을 배당금 지급이나 자사주 매입에 활용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자유주의의 대명사이자 자본주의의 선봉장인 미국이 특별한 명분 없이 기업의 이익을 탈취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이 조항에도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보인다. '합의된' 기대 수익을 '상당하게' 초과한다는 문장에서 모호한 단어들을 노려볼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서 다소 걱정되는 부분은 CEO도 메모리 업황을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대 수익 산정 시 가급적 업황을 긍정적으로 전망하여 목표치를 상향 조정하는 게 사이클 리스크를 관리하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또한 초과이익이 당연히 생길 것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 이익이 목표치를 초과하면 박수받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이왕 초과이익을 미국 정부와 나눠야 한다면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서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 정부와 공유하는 초과이익의 일정 부분을 세제 혜택으로 돌려받거나,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에 재투자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번 반도체지원법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리쇼어 전략을 펼칠 것이다. 미국 상무부는 2030년까지 미국 내 로직 반도체 클러스터를 최소 두 곳 설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앞서 살펴본 우려대상국 투자 금지나 초과이익 공유 요구 조항이 대한민국 반도체 기업들의 현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가장 이슈가 되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훨씬 걱정스러운 조항들도 보인다. 예를 들어 미국 반도체지원법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은 미국 연구소와 공동 기술연구에 참여해야 한다거나 미국 사업장에 사내 어린이집을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항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이익을 당장 훼손하지는 않겠지만 기술과 인재가 점점 미국으로 유출되는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다가 재주는 대한민국이 부리고 돈은 미국이 벌게 생겼다.
얼핏 생각하면 미국은 도저히 공략할 수 없는 거인처럼 느껴지지만, 분명 그들에게도 약점은 존재한다. 미국이 표방하는 세계의 경찰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들은 선량한 시민들을 함부로 제압할 수 없다. 반대로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일본, 대만, 유럽 국가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적극적인 개선을 요구할 수도 있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극단적인 행동을 감행할 수도 있다. 즉, 품위를 지켜야 하는 미국이 욕심을 내면 가만히 있던 다른 국가들을 자극하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한 미국은 그들 입장에서 악당에 해당하는 중국을 잡으려다가 그들이 그동안 애써 지켜온 영웅이라는 지위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동맹국들이 반도체지원법의 압박을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수준까지만 밀어붙일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의 리쇼어 전략에 대한 해법은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와 역학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일본은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에서 미국의 유일한 대체국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은 일본이 중국 편에 서지 않도록 길들여야 한다. 다음으로 대만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기지이므로 미국은 대만의 보호자가 되어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유럽은 반도체 산업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은 작지만 중국과 러시아 연합전선에 맞설 세력의 균형추로서 미국은 유럽과 발맞춰야 한다. 이쯤에서 대한민국이 반도체 산업에서 갖는 전략적인 위치를 고민할 때다. 메모리 반도체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는 국가, 멀티 파운드리 전략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라는 점을 강조하며 본질적 리스크를 제거한다면 대한민국은 미국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
미국의 반도체지원법 가이드라인은 얄미울 정도로 자국의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와 의회에서도 미국이 경제안보 공동체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을 어겨 신뢰를 깨버렸다며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다. 하지만 축구에서 심판에게 파울이 아니냐고 따지기보다 파울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골문을 지키는 게 선수의 도리인 것처럼 지금은 승패가 좌우되는 위기이므로 불평불만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정치인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찾아내서 책임을 묻지만, 기업인은 어디서 문제가 생겼든지 풀어내는 사람이다. 대한민국 기업이 미국 정부의 속사정을 이해하고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합리적인 반도체지원법 세부지침을 이끌어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