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s Spirit 15. 삼성전자가 준비하는 공정과 경쟁사의 행보
우리나라에서는 시스템 반도체라는 용어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로직 반도체라고도 불리는 이 시장은 수많은 기업들이 다양한 비즈니스모델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이곳에는 공장 없이 칩만 설계하는 팹리스, 자체 칩 없이 팹리스의 칩을 생산하는 파운드리, 칩을 설계하는 IP만 제공하는 칩리스, 칩을 만들기 위한 장비나 소재를 제공하는 소부장 기업들이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분업과 특화라는 경제학의 논리에 따라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던 이 판이 격동하고 있다. 몇몇 기업들이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반대로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손에 손잡고 뭉친 여러 진영들 가운데 로직 춘추전국을 통일할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번 주 반도체 시장을 뜨겁게 달군 뉴스는 인텔과 ARM이 파운드리 동맹이다. 이 동맹이 눈길을 끌었던 이유는 이들이 한때 설계 아키텍처 표준을 놓고 싸웠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인텔은 모바일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ARM에게 시장을 내어줘야만 했다. 하지만 현재 인텔은 설계와 생산 양쪽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고, ARM은 RISC-V라는 새로운 경쟁사가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기 때문에 서로에게 칼을 겨눌 여력이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두 기업은 인텔의 1.8나노 공정에서 모바일AP를 생산하는 데 협력하고 향후 데이터센터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인텔은 ARM 기반 모바일AP 업체들의 수주를 받을 수 있고, ARM은 나스닥 상장을 앞두고 기업가치를 올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동맹으로 보인다.
작년 11월 인텔은 ASML의 차세대 EUV 장비(High NA EUV)를 가장 먼저 도입한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누군가는 설계에서 고전하는 인텔이 생산까지 재진출한다는 것을 두고 실패가 뻔하다고 비난했지만, 엔지니어 출신 CEO가 이끄는 인텔에게 ASML의 최신 장비가 제일 먼저 들어간다면 얼마든지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인텔은 적극적인 영업을 통해 퀄컴과 아마존을 고객사로 확보했고, 미국과 유럽 정부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인텔의 현재 주력 공정인 인텔7은 10나노 공정이고, 본격 출시를 앞두고 있는 인텔4는 7나노 공정이기 때문에 3나노에 진입한 두 경쟁사에 뒤쳐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ARM과 ASML이라는 유럽의 두 반도체 기업과 함께 하는 인텔은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IDM 2.0의 시대를 열 수 있다.
TSMC의 성공 비결을 두고 비즈니스 모델이나 대만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꼽을 수도 있겠지만 애플이라는 만능 키를 쥐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로직 반도체 시장에 돌연변이처럼 등장한 TSMC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철학으로 전체 반도체 기업 매출 1위의 자리까지 올랐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경쟁하고 있는 애플도 TSMC 파운드리를 선호했기 때문에 TSMC는 엄청난 규모의 애플 칩 물량을 캡티브 마켓처럼 가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애플의 아이폰마저도 경기침체 우려로 수요가 꺾이자 TSMC의 실적에서도 경고음이 나고 있다. TSMC는 자율주행, 확장현실, 인공지능 시장에서 누가 승리하든지 돈을 버는 매력적인 사업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경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력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는 한계점도 지니고 있다.
올해 초 TSMC 공장에 엔비디아 칩 1만 개 긴급 발주가 들어갔다. 작년 하반기에는 잘나가던 빅테크마저도 직원들을 해고하기 시작하며 반도체 시장 역시 경기침체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완전히 틀린 전망이었다. 시장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변수는 ChatGPT와 생성AI 열풍이었다. 엔비디아는 마치 이런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인공지능 솔루션을 풀 패키지로 출시하고 있다. TSMC 입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엔비디아가 AI 시대의 최강자가 되든, 아니면 혜성 같은 기업이 나타나서 시장을 교란하든 반도체 시장의 불씨가 꺼지지만 않으면 된다. 애플이 밀어주고 엔비디아가 끌어주는 TSMC는 중국이라는 변수만 제외하면 가장 안전하게 오랫동안 살아남는 왕조가 될 수 있다.
메모리 반도체 감산 이슈에 다소 묻히기는 했지만 삼성전자 역시 AMD와의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삼성전자의 엑시노스에 AMD의 그래픽 솔루션인 라데온 IP를 적용하는 게 핵심이다. 올해 2월 출시한 갤럭시S23의 흥행에도 삼성전자가 함박웃음을 짓지 못했던 이유는 엑시노스의 참패 때문이다. 설계 역량이 부족했던 탓도 있겠지만 공정 열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심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3나노 공정 양산을 가장 먼저 시작하고 GAA라는 혁신적인 기술을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형 고객사의 물량을 수주받지 못하는 현실이 이를 반증한다. 삼성전자와 AMD의 협업은 GPU부터 시작했지만 이를 계기로 엑시노스의 성능이 개선된다면 삼성전자 파운드리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하고 로직 반도체 기업들이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삼성전자에게 퀄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애증의 대상이다. 스마트폰과 네트워크 사업부에게는 서로를 보완하는 협력사이자 든든한 고객사이지만, 반도체 사업부에게는 서로를 대체하는 경쟁사인 동시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얄미운 고객사이기 때문이다. 퀄컴은 스냅드래곤8 Gen1+부터 삼성전자에서 TSMC로 공정을 옮겼는데 2024년 출시될 스냅드래곤8 Gen4까지 TSMC 공정에서 진행한다는 루머가 벌써 제기되고 있다. 공정을 한번 옮기면 되돌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TSMC의 2세대 공정에서 GAA 기술이 자리잡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대형 고객을 받아서 수율을 잡아야 한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AMD와 퀄컴을 파운드리 생태계에 확실하게 가두고 준비하면 삼성전자에 대한 비아냥과 비웃음이 사라지는 순간이 올 수 있다.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길이의 단위는 고작 센치미터와 밀리미터 수준이다. 그런데 반도체 세계에서는 육안으로 구분하기도 어려운 밀리미터보다 1000배 짧은 마이크로미터 시대에서 또 다시 마이크로미터보다 1000배 짧은 나노미터 수준까지 도달했다. 앞으로는 팹리스가 설계한 칩을 파운드리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생산할 수 있는지에 따라 로직 반도체 시장의 흐름이 움직일 것이다. 삼성전자는 3나노미터 시대를 열고 업그레이드 버전 출시를 앞두고 있고, TSMC는 살짝 주춤했지만 양산에 돌입했고, 인텔은 마의 10나노미터 벽을 넘었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나노미터보다 10배 짧은 옹스트롬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시장에서 규정했던 한계를 보기 좋게 깨버리며 발전을 거듭했던 반도체 기업들이 나노를 넘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