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s Spirit 14. 삼성전자 실적이 반등하기 위한 요건
이번 주 금요일 삼성전자가 2023년 1분기 잠정실적을 발표했다. 매출액은 63조 원으로 나름 선방했지만, 영업이익은 6000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95.75% 감소했다. 증권사에서 실적 추정치를 계속 낮췄음에도 불구하고 하향된 컨센서스를 재차 하향하는 어닝 쇼크를 기록한 것이다. 업황이 좋을 때에는 분기 당 10조 원씩 버는 삼성전자가 적자를 겨우 면할 정도로 반도체 시장의 상황은 좋지 않다. 그런데 누군가는 삼성전자가 최악의 실적을 발표한 지금이 반도체 업황의 바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악이라는 부정론과 바닥이라는 긍정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과거 네 차례의 반도체 사이클을 근거로 반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산업 리포트도 발간되었다. 하지만 반도체 시장의 겨울이 끝났다고 단정짓기에는 아직 싸늘한 기운이 남아있다.
삼성전자의 분기 영업이익은 1조 원을 하회하면서 14년 만에 LG전자에게 밀리는 수모를 겪었지만 정작 시장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동안 경쟁사들과 다르게 인위적 감산은 하지 않겠다고 굳게 버티던 삼성전자가 드디어 감산을 공식화했다. 삼성전자의 감산 소식에 주가는 4.33% 급등하며 올해 최고치를 경신했고, SK하이닉스의 주가도 덩달아 6.32% 상승했다. 앞선 반도체 사이클에서 공급업체들의 감산이 업황 반등의 신호탄이었다는 교훈을 얻은 투자자들이 반도체 바닥론에 베팅한 것이다. 일단 반도체, 특히 메모리 반도체는 재고가 줄어야 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공급 사이드에서 감산이라는 이슈는 분명 좋은 뉴스다. 하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공급 축소가 곧바로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때로는 시간차를 두고 변화가 이루어진다.
삼성전자가 감산에 동참했지만 기우제를 지낸다고 곧바로 비가 내리지 않듯이 업황이 반등하는 시점은 3개월 뒤가 될 수도 있고 1년 뒤가 될 수도 있다. 삼성전자의 2022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재고자산은 29조 원에 육박한다. 대부분 메모리 반도체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적정 재고 수준보다 4배 가까이 된다. 메모리 반도체를 구매하는 기업에서는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가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굳이 나설 필요가 없고, 이 와중에도 공장에서는 메모리 반도체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가격은 더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공장을 멈추면 더 큰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팔 때마다 손해인 걸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생산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감산은 이 엄청난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멈춰야 한다는 생존의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삼성전자는 DDR5나 HBM 같은 최신 제품을 위주로 생산을 유지하고 나머지 제품군에서는 유의미한 수준으로 감산하겠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감산 자체보다 중요한 건 감산을 의미 있게 만들어줄 소화력이다.
올해 최악의 한파를 보내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과는 다르게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는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생성 AI 테마로 인공지능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최대 수혜 기업인 엔비디아의 주가는 올해 90% 가까이 상승했다. 그리고 인공지능 반도체를 위탁생산하는 TSMC와 노광장비를 납품하는 ASML의 주가도 좋은 흐름을 보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 벌이고 있는 AI 전쟁 덕분에 연산 처리를 하는 시스템 반도체를 보조하기 위한 메모리 반도체 수요도 자연스레 증가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뿐만 아니라 자율주행과 확장현실이 상용화에 근접하면서 스마트폰 이후로 인류의 삶을 바꿀 디바이스가 출격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인류는 다 같이 인공지능이라는 마법에 걸려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반도체 역사에는 크게 세 차례의 빅 사이클이 있었다. 1990년대 PC, 2000년대 스마트폰, 2010년대 데이터센터가 각각의 빅 사이클을 주도했던 수요처다. 물론 세 가지 응용처는 2020년대에 접어든 현재까지도 반도체 수요의 가장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수요가 거품처럼 끼었다가 빠지면서 반도체 하락 사이클의 폭을 키우고 속도를 높이고 있다. 특히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PC와 스마트폰은 교체 주기가 길어졌다. 기능이나 디자인에서 엄청난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당분간 이쪽에서 반도체 수요 증가는 크지 않을 전망이다. 또한 작년부터 명실상부한 반도체 최대 수요처로 부상한 데이터센터 역시 하이퍼스케일러 업체들의 인력 구조조정이 끝나기 전까지는 유지 보수만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PC, 스마트폰, 데이터센터가 전부 부진한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AI, 자율주행, 확장현실이 새로운 반도체 수요처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반도체 기업, 그리고 대부분의 대한민국 기업들에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미국 경제가 안정화되고 중국 경제가 활성화되는 것이다. 3년 간의 팬데믹발 양적완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작년부터 전세계 중앙은행은 금리를 급격하게 올렸다. 하지만 물가는 좀처럼 잡히지 않은 채로 높은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고 오히려 민간의 소비가 축소되고 투자가 위축되는 경기 불황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미 시장에서는 경기둔화 내지는 경기침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만약 Fed가 물가와 경기 사이에서 조율에 실패해 미국 경제가 경착륙(Hard Landing)한다면 반도체 수요는 예상보다 더 꺾이면서 메모리 제조사의 공급 조절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매크로 경제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지금은 개별 기업보다 전체 경제를 유심히 봐야 하는 시점이다.
중국에서는 시진핑이 3연임에 성공한 이후 제로코로나 정책을 폐지하고 글로벌 외교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경제가 빠르게 살아나고 있다. 미국이 자국 중심으로 글로벌 경제 생태계를 구축하려고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최대 고객이다. 한편 SVB와 크레디트스위스가 파산했음에도 불구하고 Fed는 미국 경제가 강력하다면서 추가 금리인상을 시사하고 있다. 물가를 잡기 위해서라면 실업률이 올라가고 소비와 투자가 줄어드는 것을 어느 정도 감수하겠다는 통화정책은 미국 경제가 연착륙(Soft Landing)할 수 있다는 Fed의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도체를 수출하는 입장에서는 고금리가 유지되더라도 물가가 잡히고 경기가 살아나야만 실적과 함께 심리가 회복되면서 AI, 자율주행, 확장현실 같은 꿈을 다시 외쳐볼 수 있다.
최근에는 미국 경제가 경착륙도 아니고 연착륙도 아닌 무착륙(No Landing)할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가 눈길을 끌고 있다. 일부 기업과 가계는 물가와 금리를 이기지 못하고 파산하겠지만 미국의 고용 시장은 강력하기 때문에 국가 전체적으로는 경기침체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이 전망은 시장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고용 지표는 경기에 가장 후행하는 지표이며 장단기 금리차 역전 현상이나 ISM-PMI 지수 하락을 감안하면 경기침체는 예고되어 있다는 견해가 주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히려 바닥을 쳐야 돌아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시장의 바람대로 올해 2분기에 바닥을 다지고 하반기부터 공급 축소와 수요 확대 효과가 동시에 나타나며 반도체 업황이 본격적으로 턴어라운드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어릴 적에는 우리나라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라고 배웠는데 최근 몇 년 들어서는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봄과 가을은 짧게 끝나고 여름과 겨울은 길게 이어지는 극단적인 환경이 되면서 계절 순환 주기가 빨라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도체 시장도 마찬가지다. 메모리 반도체는 물론이고 시스템 반도체까지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기업이 위기에 대처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호황과 불황의 주기가 단축되고 저점과 고점의 진폭이 확대되고 있다. 시장에서 기대하는 대로 올해 하반기부터 업황이 반전되면서 성장 국면에 접어들 수 있지만 과거와는 달라진 시장 환경 때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원래 겨울이 지나간 줄 알고 방심하면 꽃샘추위에 당하는 법이다. 반도체의 봄이 왔다고 호들갑 떨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