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내 인생의 시계추는 20대 후반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며 경력의 정점을 찍어야 할 나이임에도 취업전선에서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1년 전 무급 인턴상담원을 하면서 20대 동료들과 같은 선상에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스스로를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나이 좀 많은 청년이라고만 치부했었다. 하지만 인턴 생활이 끝나고 새로 지원했던 기관에 줄줄이 낙방하고, 설상가상으로 병원 신세까지 지는 시들시들해진 내 모습을 보면서 찬란했던 젊은 날이 지나갔음을, 이제는 중년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생의 절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인생이 꺾이는 지점에 서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되니, 그 전과 똑같이 살아간다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다. 생의 전반부에는 어찌 됐든 살아보겠다고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에 억지로 나를 끼워 맞춘 채 선택받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앞으로 살아갈 나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원래 나는 음악을 전공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운 음악만 가지고는 도무지 먹고살 길이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나의 전부와도 같았던 음악의 시간을 눈물을 머금고 도려내었고,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상담이라는 것을 공부했다. 상담은 자격증만 있으면 나이가 좀 있어도 취업을 할 수 있는 데다가, 평소에도 인간 심리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나마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덜 했다. 운 좋게도 공부한 지 1년 만에 조그마한 비영리 단체에 취업할 수 있었다. 직장에 다니며 내 일이라는 것도 생겼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다. 나도 이제 남들처럼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대출을 받아 내 집 마련도 하는 보편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러한 환상은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상사와의 감정적인 충돌은 퇴사로 이어졌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의 끝은 헤어짐이었다. 일과 사랑을 모두 상실한 절망의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꾸준히 글을 써내려 오게 되었다.
상담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들어갔다. 상담이론 수업에서는 매주 어빈 얄롬(Irvin Yalom)의 『치료의 선물』이라는 책을 한 챕터씩 읽고, 그에 대한 생각을 적어내는 과제가 있었다. 과제라는 딱딱한 형식에 어울리지 않게 나는 정현종의 시 「방문객」을 인용하기도 했고,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고, 글렌 굴드(Glenn Gould)의 피아니즘을 인용하기도 했다. 교수님께서는 "이거 책으로 내도 될 것 같은데요?"라는 반응을 보이며, 추후 수업 때 '과제의 모범 사례'로 사용하고 싶다고 내게 허락을 구하기도 했다.
조교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전공주임 교수님의 하소연에 대학원 2년 차부터 캠퍼스에 상주하며 조교를 했다. 그곳에서 나와 더불어 조교를 신청한 한 학번 아래 여자 후배를 만날 수 있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는 상황이라 드넓은 캠퍼스에 두 사람만 덩그러니 있는 시간이 많았다. 점심을 먹고 같이 산책을 하는 게 일과 중 하나였는데, 하루는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중에 제 이름을 달아서 책을 한 번 내보고 싶긴 해요." "쌤~ 그거 지금도 충분히 가능해요. 저도 부크크라는 자가출판으로 책을 냈어요." 그 후배는 내게도 책을 내보라며 부크크를 추천해 주었다.
대학원 졸업 후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서 무급 인턴상담원으로 일했다. 상담 분야에 워낙 남자가 적기 때문에 난 거기서 유일한 남자였다. 2학기가 될 무렵 전임상담원 선생님이 퇴사하게 되면서 새로운 선생님 한 분이 오게 되었다. 책임상담원 선생님은 내게 그 선생님도 남자라며 책을 두 권이나 쓴 작가이기도 하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무슨 책을 썼는지 찾아본 뒤 제목을 기억해 두었다. 새로운 전임상담원 선생님이 오던 날 난 자신 있게 말을 건넸다. "책을 내셨다고 들었어요. 『위로가 될진 모르겠지만』이라고." "아아아... 네. 어떻게 아셨어요?" 그 선생님은 토끼눈을 뜨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후로 그 선생님과 나는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브런치에 글을 쓰다가 작가가 되었다며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소개해 주었다.
인턴상담원 계약 만료를 앞두고, 경기도에 위치한 한 예술대학에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 대기장소에는 처음 본 나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친화력이 뛰어난 여성 한 분이 있었다. "댁이 어디세요?" "저는 서울에서 왔는데 1시간 40분 정도 걸린 것 같네요. 휴우... 머네요. 멀어." "집에서 먼데 지원한 이유가 있어요?" "저는 원래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라 예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공감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혹시 선생님도 저처럼 예술을 하신 건가요? 느낌이 그런 것 같은데?" "음... 이따가 면접 끝나고 봐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면접을 마친 후 버스정류장으로 가보니 정말로 그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집으로 향하는 길에 그분으로부터 등단 시인이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네이버 인물과 위키백과에 나오는 생각보다도 훨씬 유명한 시인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상담을 택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담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직장에 다닌 기간을 제외하면, 교육을 받기 위해 지출만 했지 수입은 전무했다. 그렇다고 상담을 하면서 유능감을 느꼈던 것도 아니었다. 면접만 보면 떨어지기 일쑤였고, 슈퍼비전을 받으면서도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말을 하는 영역이 아닌 글을 쓰는 영역으로 넘어오면 달랐다. 글로 나의 견해를 피력하는 페이퍼 과제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학위 논문과 학술지 논문 심사도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이것은 비단 공적인 영역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블로그에 쓴 내 글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존재했으며, 나름 까다롭다는 브런치 작가 심사도 단번에 통과했다. 무엇보다도 우연히 일어난 앞선 네 사람과의 에피소드는 마치 나를 글쓰기의 세상으로 인도하는 듯한 신성한 소명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나만큼 글을 쓰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사람도 드물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데, 20년 넘게 1인 가구로 살면서 한 번도 혼자가 아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이 바쁘면 글을 쓰는데 제약이 많을 테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그렇게 잘 보이질 않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글을 쓸 수 있다. 거기에 중년이라는 이점까지 더해졌다. 어떻든 인생의 반을 살아봤고 숱한 실패와 좌절, 갈등과 이별, 불안과 소외를 경험했으니, 그 캄캄한 그림자들이 글을 쓰는데 단단한 기반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남은 건 실천하는 것뿐이다. 이를 위해 마치 작가인 것처럼 자기 충족적 예언을 되뇌면서, 매일매일 걷고 읽으며 느꼈던 것들을 글로 옮겨 볼 작정이다. 그렇게 1년이고, 2년이고, 3년이고 반복하다 보면,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다른 차원의 변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아무렴 상관없다. 무엇을 바라고 하는 건 아니니까.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길을 향해 간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난 이미 만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