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강 에세이 - 이 별에 관하여 ,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버스가 도착하고 나는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그녀는 나를 쳐다보진 않았다. 버스에서 앉을자리를 찾으려 한 게 아니고 나를 외면하고 싶었던 걸까? 사실 나는 이때가 우리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작별의 여운을 남길 만큼 진한 포옹을 문 앞에서 이미 나눴기 때문에 그걸 이별에 대한 그녀의 대답으로 생각했다. 허기가 전혀 생기지 않는 저녁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거울 속의 나를 멍하니 바라보며 이를 닦고 샤워를 했다. 침대에 누워 망설이다가 그녀가 집에 잘 들어갔는지 물어본다. 배고플 텐데 뭐라도 챙겨 먹으라는 메시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길고 긴 하루가 지나가는 듯했다.
나는 당연히 깊게 잠들지 못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누구나 그렇듯 하루아침에 이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아침에 눈을 떠 출근을 준비하고 차를 몰아 회사로 출근하는데 그녀에게 먼저 메시지가 왔다. 늘 내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면 그녀가 내게 전화하는 우리만의 패턴이 있었다.
“어제 잘 잤어?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어제 우리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 걸까? 애써 태연한 듯 나도 전화를 걸었다.
“어제 잘 잤어? 출근 잘하고 있어?”
이런 일상의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건 어찌 보면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좋은 신호가 아닐까?라는 생각했다. 간단하게 통화를 마무리하고 나는 회사에 출근했다. 늘 하던 것처럼 커피머신으로 커피를 내리고 얼음트레이에서 얼음 빼 아이스커피를 만들고 얼음트레이에 물을 채워 냉동실에 넣었다.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어제의 눈보라처럼 차가웠던 그녀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리기를 그래서 우리가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아홉 시가 다 되어서 회사에 잘 도착했는지 메시지를 보냈다. 잘 도착했다는 답변이 오고 우리는 오늘도 서로 힘내자는 말을 힘겹게 건넸다.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나는 그녀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기 전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헤어지자고 말했던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내 마음은 조울증에 걸린 환자처럼 기분이 계속 요동쳤다. 그러다 금요일이 되었을 때, 그녀는 주말까지는 각자 쉬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처음 그녀가 헤어지자고 이야기했을 때 시간을 좀 더 가져보자고 한 게 나였기에 나는 그녀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내가 본인을 너무 좋아해 주고 잘해줘서 헤어지자는 말을 못 했다고 했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해줬었는지 다시 되뇌어 보면 지금의 만남을 유지할지 말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이건 순전히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명확하게 헤어져야 할 이유를 만들 시간을 준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말 동안 하루에 한두 번 정도의 연락을 유지하고 주말이 지나갔다.
다가오는 주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어 평일에 하루 쉬는 날이 생겼다. 일주일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날 각자 투표를 하고 만나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투표는 언제 할 예정이냐고 묻는 질문에 투표소 앞에 줄 서 있는 사진을 보냈다. 아침 겸 점심으로 냉면을 먹을 거라는 말까지. 우리는 투표를 하고 각자 집에서 좀 쉬다가 오후 4시쯤 보기로 했다. 나는 그녀에게 줄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 다름 아닌 귀걸이였다. 그녀에게 선물을 줄 때는 헤어지자고 말하기 전에 이미 산거라고 거짓말을 했지만 사실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 난 후, 귀걸이를 샀다. 귀걸이를 선물로 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그 안에 정성스러운 편지로 내 마음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집 앞 주차장에서 기다리는데 그녀가 내 차로 무언가를 들고 차에 탔다. 하얀색 작은 종이가방이었다. 조수석에 타자마자 종이가방을 뒷좌석에 던졌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물어봤고 그녀는 별것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다시 만나 예전의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어도 상관없었다. 나와의 추억을 없애거나 지우려는 어떠한 시도나 결심만 아니라면.
나는 미리 저녁 메뉴를 찾아 서너 개를 그녀에게 추천했지만 그녀는 구운 고기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원래 가려던 방향을 틀어 고깃집으로 향했다. 오후 4시, 저녁을 먹기에 조금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평소집에 혼자 있을 때, 아침 겸 점심을 애매한 시간에 먹어 저녁을 일찍 먹기도 했다. 나는 제때 점심을 먹어 허기진 상태는 아니었지만 저녁을 조금 일찍 먹는다 생각하고 고기를 구워 그녀의 접시에 올려주고 오물조물 씹고 있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렇게 우리는 한산한 고깃집에서 나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대규모 아파트단지 주변에 만들어진 인공호수였다.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고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일전에 그녀가 가지고 있던 캠핑 장비(그래봐야 의자 2개, 테이블로 쓸 수 있는 플라스틱 박스가 전부였지만)를 가지고 와 같이 치킨에 맥주를 마신 적이 있었다. 나는 운전을 해야 해서 치킨만 먹었고 그녀는 맥주 몇 캔을 빠르게 들이켰었다. 봄이었지만 그늘에 있으면 쌀쌀한 날씨였고 벌벌 떨며 다 식어버린 치킨을 빠르게 먹고 집으로 돌아왔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때의 일은 우리에게 추억이 되어 이후 몇 번이고 이야기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손을 잡고 천천히 인공호수 주변을 걸었다.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바닥은 걸을 때마다 조금씩 소리가 났다. 호수 뒤에는 제3경인고속도로가 있어 차들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몇 달 전 우리를 소개해준 부부를 만나러 저 고속도로를 타고 경기도의 어느 도시로 갔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에 대해 나는 말하지 못했다. 그저 우리는, 아니 나는 떨어질지도 모를 벼랑 끝에서 상대의 새끼손가락만 붙잡고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음료나 아이스크림을 권했으나 그녀는 딱히 당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끄러운 주변과 다르게 우리는 조용히 앉아 몇 마디를 나눴다. 4시에 만나서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를 태우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공원과 그녀의 집 사이의 거리는 차로 약 15분 정도였으니 억지로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발버둥 쳤을 내가 떠올랐다. 그녀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그녀에게 선물을 건네기 전, 오늘 집에서 나올 때 들고 나왔던 게 뭐냐고 물었다. 그녀는 우리 집에 있었던 내 속옷과 양말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애써 내게 불안함을 주지 않으려 겨울옷을 정리하고 여름옷을 꺼내는데 그것도 정리할 겸 가지고 나왔다는 말을 굳이 덧붙인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나.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줄 선물을 사 온 상태였다. 이 어찌 아이러니한 상황이란 말인가. 정갈하게 포장된 선물을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건넸다. 자신의 집에 있는 내 흔적을 지우려고 마음을 먹고 나온 그녀에게 나는 선물을 건넨 것이다. 그녀의 표정은 일그러졌다고 하기에는 조금 심한 표현이고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말한다.
"원래 자기 주려고 샀던 선물이야. 헤어지자고 말하기 전에 샀던 선물이고 그동안 내가 받은 선물도 많고 자기가 액세서리 차고 다니는 거 좋아하니까 자기가 하면 이쁠 것 같아서 샀어."
그녀는 바로 부담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