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묵자흑, 먹을 가까이하는 자가 왜 검게 되는 것일까. 먹을 가까이하는 자는 학문을 가까이하는 자가 아니던가. 그것도 정도껏이지 너무나 지나치면 영혼까지 흑화 된다는 것을 옛 선조들도 알았던 걸까.
교육열이 높은 대한민국에서 학생 혹은 학부모로 산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경쟁이 싫다는 명목으로 일찍이 내 안의 불씨마저 꺼뜨려버린 나는 어떤 아쉬움과 두려움으로 이 사회와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건, 다른 사람을 이기려는 것을 목적으로 둬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물리쳐도 물리쳐도 계속 나타나는 악당을 아이 앞에 두는 것과도 같다. 비교우위에 서는 방식으로는 자칫해선 쉽게 교만해질 수도 있고, 쉽게 좌절할 수도 있다.
아는 엄마는 자녀에게 경쟁의식을 대놓고 심어준다. 네가 이렇게 해야 쟤를 이기지! 라며. 이 사회는 경쟁사회니까,라는 논리에 나는 맞서고 싶었으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분명 경쟁이 일상화된 사회다. 우후죽순 생겨난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여전히 인기를 끌 만큼 국민들은 경쟁에 익숙하고, 그 심리전에 공감하고, 결과에 집착한다.
승부욕이 있는 아이의 경우, 성향에 따라선 경쟁의식이 효과적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쟁에 취약한 '루저'형 인간인 나는 결코 간과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아이에게 대놓고 친구를 이겨야 한다고 말하는 그녀의 방식이 이 땅에서 살아남는 법은 될 수 있겠으나,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오히려 죽어가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정신질환 진단자가 300만 명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 이제 우리는 이 사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
손자병법같이 이기는 법은 중요하다.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며, 자기 이익을 위해 나를 헤집고 뒤집는 적군들이 사방을 둘러싼 상황에서 살아남는 방식을 반드시 터득해야만 한다. 착하다는 게 만만하다는 말과 같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경쟁을 피한답시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분투하는 것을 생략해선 안될 일이다.
그러나 싸움의 기술이라던가 맷집을 키우는 것도 스스로 해야 한다. 전략도 중요하지만 생존하기 위한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생존에 대한 의지력을 키워줘야 한다. 그런데 무력한 갓난아이에게도 젖을 빠는 힘이 있다. 아이를 최소한으로 먹여주고 입혀주다 보면, 제 힘으로 고개를 가누고 걷고 뛰어보려는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어쩌면 성장에 대한 의지, 스스로 살아남고자 하는 자생력은 이미 우리 안에 주어졌을 것이다. 단지 잃어버리고 빼앗겼을 뿐.
적어도 그것을 빼앗는 데 일조하는, 남들 하는 만큼만 하라는 말을 쉽게 하는, 그런 마음을 품고 사는 어른은 되고 싶지 않다. 지금은 내가 돌보는 것 같아도, 내 품을 떠난 뒤에 매일매일 생존하기를 선택하는 것은 아이 스스로 해야 한다. 그 결정에 내가 개입할 수 있겠는가. 아이는 나의 방식으로 생존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기 살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야 할까.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데, 무엇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게 할 것인가.
실제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목이 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지켜낼 가족을 이루기도 전에 스러져간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이 세상에서 아이가 매일을 살아가길 선택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건.
세상은 어떤 면에선 전쟁터와 비슷하다. 이 사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것은 중요한 삶의 태도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분명 유토피아는 아니지만, 매일 전쟁터로 스스로를 내몰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동물의 세계와 비슷하다. 그러나 짐승이 아닌 이상 매번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를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은 이 외에도 자존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글을 쓰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 음악을 만드는 것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그렇다. 창조적 행위에서마저도 경쟁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극복하는 힘을 기르는 것과 이기는 것은 다르다. 첨예한 경쟁구도 속에서도 타인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것, 우리가 서바이벌 프로그램 속에서 열광하는 캐릭터의 요소이기도 하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단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는 삶이 아니라, 내 텃밭을 잘 가꾸는 삶이 되길 원한다. 누군가 밭에 불을 지르고 심어놓은 작물들을 훔쳐간대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밭을 기경할 수 있는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올까. 누군가의 밭에 활짝 피었던 예쁜 꽃을 보고 달콤했던 밭의 열매들을 먹었던 경험, 싱싱하고 탐스러운 작물들에 대한 기억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선행학습의 일환으로 '먼저' 경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반복하고 시도해 보는 동기부여를 위한 경험이다. 이는 저보다 앞서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형아나 누나를 본 동생들이 똑같이 스스로 해내보려 하는 것과 같다. 작은 성공의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또 다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러나 극복이란 내 삶을 살아내는 것부터 시작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바탕과 경계를 끊임없이 마주하는 일이고, 다른 사람의 밭에 없는 작물을 거둬내는 일이며,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곡괭이를 잠시 빌려서 내 밭을 기경하는 일이다. 다른 밭에서 사용되었다는 농기계 다루는 법을 공부하고 구매하는 일이며, 그것을 살 능력이 없다면 맨손으로 일궈내야 하는 일이다.
결국 내 아이는 맨손으로 일구지 않고, 좋은 농기계를 사고, 열매 맺는 밭을 갖게 하기 위해 이토록 앞다퉈 열심히 살아보는 거겠지만,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밭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내가 평생 가꾼 좋은 밭은 물려주더라도 마찬가지다. 그가 그 밭에서 좋은 경험을 했다면 소중하게 가꿔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망쳐놓을 수도 있다. 자신의 삶도, 부모의 삶도. 그러니 자기 그릇만큼 가꿔가면 될 일이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살아가면 될 일이다.
종국에는 비록 내 밭에서 열매 맺는 것을 못 보더라도 가시덤불을 파헤치고, 자갈밭을 갈아엎는 과정 속에서 좋은 밭이 될 거라고 믿는다.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을 테니 이후에 누가 씨를 뿌리든지 좋은 땅이 먼저가 아니겠는가. 또 모르는 일이다. 밭을 뒤엎는 과정에서 땅 속에 묻힌 보화를 발견할지도.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라 했으니, 천국에서 온 아이들이 천국을 발견하는 셈이다.
"CCM곡 <소원> 가사를 인용했습니다.
* 좋은 밭, 천국의 비유는 성경구절을 인용했습니다.
*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