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중반 나는 은둔생활 비슷한 걸 해봤다. 완벽한 은둔생활은 아니었지만 은둔-고립 청년의 심정을 약간이나마 공감한다. 숨어들고 숨어들어도 숨길 수가 없어서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자주 솟았다. 연락을 일부러 받지 않아 놓고는 자느라 못 받았다고, 일부러 전원을 꺼놓고는 배터리가 없었노라고 둘러대는 것으로도 나의 비정상적인 생활을 숨기진 못했다. 버려야 할 쓰레기들로 가득한, 그러나 엄마로 인해 무엇 하나 정리할 수 없던 그 집에서, 방문이 꼭 닫힌 두 평 남짓한 내 방은 나의 유일한 은둔처이자 안식처였다. 그 속에서 심장이 쪼그라드는 경험을 20대에 해도 힘들었는데 10대, 그것도 중학생이라니.
TV상담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그 아이는 심각해 보였다. 마음에 난 어떤 길을 따라 문제 행동으로 가는 수순에 가족들은 익숙한 듯 보였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시간들 조차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그 영상을 시청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일시정지를 한 뒤 무릎을 꿇었다. 엎드려 부르짖는 마음은 엄마의 마음이자 아이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자기를 억누르는 감정으로 몰고 가는 사람(엄마)에게 보이는 그의 행동은 공격적이면서도 방어적으로 느껴졌다.
일상대화를 하다가도 갑자기 아이가 돌변하는 모습들이 있었는데, 엉켜있는 어떤 감정의 근본이 바뀌지 않는 이상 그것은 반복될 수밖에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나온 엄마의 '평범을 연기하라'는 말에 그는 크게 분노했다. 당연히 그의 엄마는, '엄마아빠도 노력하고 있으니 너도 노력해 줬으면 좋겠다'는 의도로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평범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그로서는 그에 대해 넘치는 절망감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도 바라고 있지만 방법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는 아이에게 그 말은 일종의 트리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어린애같이 굴지 마, 빅토르. 마지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줄게. 어제저녁에 일어났던 일은 사고일 뿐이야. 병이 재발한 거지. 네 책만 끝나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누난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 200페이지는 다른 책들 속에 있는 걸 베낀 거라고. 내가 창작한 것은 단 한 줄도 없어."
"난 네 작업을 위해서, 네 책을 위해서 모든 걸 희생했어. 그런데 넌 여기 온 지 이 년이 다 되어가도록 단 한 줄도 안 썼다고? 넌 먹고 마시고 피우는 일만 했어! 넌 게으름뱅이, 술주정꾼, 식충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는 그렇게 해야만 했어요.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것만이 내가 책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거든요.'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타인의 증거 6
우연히도 며칠 째 읽고 있는 소설 속에서 비슷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누나의 희생은 부모의 희생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동생에게 거는 기대는 동생의 현실에 기반하지 않았다. 그녀는 동생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믿음은 맹목이고 허상일 뿐이다. 그녀가 믿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동생의 글이 책이 되어 나오고, 그것이 누나의 자랑거리가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어두웠던 나의 이십 대 중반 시절을 돌아보았다. 굳게 닫혀있던 그 공간으로 똑똑,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벌컥벌컥 함부로 문을 열던 엄마에게 노크 좀 하라고 외치는 내가 보였다. 우리 집 문은 고장 나서 문고리에 잠금 기능도 없었다. 그나마 공기가 들어오지 않을 만큼 문을 꽉 닫고 있는 게 되려 나를 숨 쉬게 했는데, 엄마는 그 숨구멍을 자꾸만 끊어놓았다.
엄마의 눈을 피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노크해 달라'라고 아무리 말해도 지키지 않고(이 쉬운 것 하나 지켜지지 않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엄마의 변하지 않는 태도에 숨이 막혔다. 그 시기에는 오히려 아빠의 무관심이 내게 유익했다. 아빠는 꼭 해야 할 말이 있을 때만 똑똑, 노크를 해주었다. 그 문은 반드시 '네'라는 나의 대답을 거쳐야만 반쯤 열렸다. 나갈 땐 '쉬어라'라는 말과 함께 문을 다시 꼭 닫아주는 아빠의 행동에서 나는 다정함을 느꼈다. 내가 아빠에 대해 좋게 기억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누워있고, 하루 동안 어딜 나가지 않았는데도 아빠는 내게 쉬라고 했다. 나는 그것이 '마음 편히 쉬라'는 말처럼 들렸다. 도망자는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법이니까. 큰 죄를 짓고 몸을 숨기는 사람처럼 나는 숨고 싶었으나, 반대로 숨어들며 하게 되는 거짓말 따위가 나를 괴롭게 했다. 궁금하고 걱정되어서 연락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쫓아오는 사람은 없는데도 늘 쫓기는 마음으로 살았다. 쫓는 자는 없으나 감시자가 있었다.
엄마는, 엄마의 트로피인 내가 망가질까 봐 전전긍긍했고 수시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유난히도 버거워했던,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이 담긴 특유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든 '알아서 잘' 하는 것 같이 보였으나 사실은 아는 척하고 질문하지도 않는 아이였다. 충분히 이해하지도 헤아리지도 못한 채 고개만 끄덕거리며 받아내느라 바빴고, 그렇게 받아들이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어리석은 아이였다.
그러나 도무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지능이 모자란 건 아닐까 늘 의심했다. 메타인지가 부족한 건 확실했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손바닥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 속으로 다시 숨어버리고 싶던 날들이었다. 이제 와서 속 빈 강정 같은 내가 엄마에게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도 뭘 가르쳐주진 못할 터였다. 나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잘못된 것이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는 것도 말할 수 없었다. 모든 것에 자신이 없었다.
'걱정하고 있는 거 알아. 그런데 제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지 말아 줘.'
어둡고 축축했던 작은 방, 그곳에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만큼이나 괴로워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왜 밤에 잠들지 않고 낮에 자냐던 PD의 물음에 답하던 그 아이의 마음을 안다. 밤은 모두가 자는 시간, 아무에게도 어떤 눈빛과 소리에도 노출되지 않는 시간이니까. 이것은 분명한 회피성 태도다. 그러나 이 아이가 왜 피하는지, 왜 사회의 관계를 피하고, 왜 부모의 품에서조차, 집에서조차 안식하지 못하고 피해 다니는 것인지. '내 방에서 나가'라는 외침이 왜 그리도 절실한 것인지.
나는 감히 알 수 없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그렇다고 받아들여지지도 못한 채 어딘가로 밀려가는 듯한, 그래서 떨어지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을 알고 있다. 믿음의 반대말은 두려움이다. 나를 향한 타인의 어긋난 믿음, 지금 내 상태를 온전히 알지 못한 채 막연하게 기대하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니었다. 부모의 믿음조차도 그러했다. 아이를 제대로 알아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주는 것이야말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를 건져낼 수 있는 믿음, 그 단단함에 기대 설 수 있게 만드는 믿음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믿어줄 수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어릴 적 아이가 아닌, 훌쩍 커버린 한 사람으로서 내 앞에 서 있을 때도. 밀려드는 배신감이 나의 해묵은 기대를 갈아엎고, 새롭게 믿음의 씨앗을 뿌려야 할 때 나는 아주 낯설고 새로운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주에 걸려서 야수로 변해버린 왕자를 다시 돌이킬 수 있었던 건 오직 사랑뿐이었다. 나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가 사실은 나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어준 사랑이었다. 믿음은 사랑이다. 믿음의 반대는 두려움이고, 두려움은 사랑이 내쫓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연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평범이라는 가치가 연기를 해야 할 만큼 어려워진 세상 속에서. 평범해 보이는 세상의 덫을, 특별해 보이는 허상을 구별하는 지혜를 간절히 구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한일서 4:18) 성경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