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의 백점, 일등이 주는 기분

짜릿함이 대견함보다 앞서지 않게

by 조이


아이의 노력이 수치화되어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는 몇 살부터일까. 각종 레벨테스트(일명 '레테')를 통해 일찍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치화되는 순간 부모로서 마음이 복잡해질 것이 분명했다. 매일 책을 읽어주다가 아이가 한글을 깨쳐서 책을 스스로 읽는 것에 만족하던 나였다. 여전히 우리 아이 짝짜꿍만 해주고 싶은 마음과, 아직은 알고 싶지 않은 세계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하게 내 아이의 '점수'를 접하게 된 건, 아이가 등원하고 있는 기관에서 공인 한자 자격시험을 준비하면서부터였다. 학교 입학을 앞두고 졸업 전에 거치는 통과의례인 모양이었다. 물론 가장 낮은 급수였지만 아이가 스스로 몇 개를 맞았고 몇 개를 틀렸는지 알 수 있고, 점수에 따라 합격과 불합격이 정해지는 엄연한 공인 자격시험이었다.


기관에서 자체적으로 일과시간 내 준비를 해주었고, 여러 번 풀어서 보내주는 모의고사 시험지를 받아보면 합격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아이가 지문을 읽고 알맞은 답을 골라내어 번호에 체크하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두 개 틀리는 것도 '이왕이면' 다 알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책을 읽어주듯 여러 번 묻고 체크해 주었다.


아이도 인생 첫 시험이라고 나름 긴장했을 테니 실수로라도 한 개 틀릴 법 한데, 60문제 모두 맞춰서 만점을 받아왔다. 그때 느꼈던 감정이란 아이가 첫걸음마를 떼고 처음 문장을 말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일곱 살이라 그 시기를 지나온 지 오래되어서 더 대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내 내뱉은 질문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


"백 점 맞은 아이들 몇 명이야?"


아이고오... 내 아이가 한자를 모두 익히는 것만으로 성이 안 차는 건 왜일까. 내 아이가 그중에서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알고자 하는 건 부모의 본능일까, 아니면 K-학부모만이 갖는 비교의식일까. 나는 주입식 비교의식에서 비롯된 궁금증을 이기지 못했다. 졸업식 때 백점을 맞은 세 명의 아이들을 굳이 최우수상이라고 구분하여 상장을 수여한 것에서도 나는 은근히 뿌듯해했다. 이후 또 다른 백점 맞은 엄마가 아는 척할 때는 기분이 묘했다.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도 아니고, 문화자본도 아닌 고작 한자 8급 백점에서 나는 뭔가 다른 낌새를 감지하고 말았다.


내 아이의 백점, 일등이 주는 기분은 짜릿했다. 아이가 걸음마를 떼고, 문장을 말하고, 백점을 맞아서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을 땐 그저 대견함이 앞섰다. 그러나 그것이 몇 명이서 획득한 점수인지, 내 아이가 상위 몇 퍼센트 안에 들어가는지 아는 순간 짜릿함이 따라온다. 모든 아이들과 부모들이 모인 자리, 공동 일등이라는 위치에서 최우수상을 수여받는 순간의 자랑스러움은 말해 무엇하랴.


나처럼 일등을 해본 경험이 많이 없는 사람일수록 그 짜릿함이 더할 거라 생각하지만, 주위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스스로 일등을 많이 해 본 부모들은 성취감이나 뿌듯함을 느끼는 역치가 높아서 노력의 정도부터 다를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과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이 주는 짜릿함에 이미 중독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해가 지나고 어느새 둘째 아이도 인생 첫 시험을 치렀다. 다치거나 흘리는 일이 잦아서 평소에 워낙 무슨 기대를 안 하는 편인데 백 점을 받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몇 명이나 백점을 맞았는지' 궁금한 건 아직도 비교의식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엄마들과 갖게 된 자리에서 그 '명단'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 엄마의 입에서 우리 아이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곧 있을 졸업식에서 알게 될 거란 생각에 말하지 않았다. 그때도 짜릿함 비슷한 감정이 일었는데, 이내 무슨 비릿함이 올라왔다.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자는 거지.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의 어머니들(일명 고등어맘)들이 이 글을 읽으면 박장대소할 일이다. 수능이라는 거대한 시험을 앞둔 수많은 시험들 속에서 받아보는 아이의 점수와 등급, 그 수치의 절대적인 위력 앞에서 겪는 감정들을 내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과거의 내가 이미 지나온 길이라 해도 부모로서 맞이하는 내 아이의 점수는 어떤 오디션 프로그램의 결과보다도 민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이는 나보다 더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학창 시절의 나보다 혹은 나만큼이나 공부를 잘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본연의 소망, 아이가 잘 살았으면 하는 그 바람이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이라면 아이가 노력할 수 있게 격려하고, 노력에 대해 손뼉 쳐주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대견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기어코 짜릿함까지 느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짜릿함이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이겼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아이가 느끼는 뿌듯함이 좀 더 강하게 표현된 감정일 수는 있겠으나 부모가 느끼는 짜릿함은 그것을 조금은 비껴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아이가 낸 결과가 남들보다 조금 더 우세한 것에서 비롯되는 짜릿함에는 필연 비릿함이 따라온다. 내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내가 느끼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라도 느낄 수 있는.


앞으로 펼쳐질 아이의 지난한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부모로서, 아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서 아이가 낸 좋은 결과에 대해 감격을 넘어 느끼는 전율 같은 짜릿함은 응당 허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까지나 성실한 관찰자 혹은 조력자로서의 포지션을 잃지 않으리라 다짐해 본다. 아이의 실패를 나의 실패로 여기지 않고, 아이의 성공을 나의 성공으로 돌리지 않겠다고. 그렇다면 내가 느낄 감정은 안타까움 혹은 대견함 정도뿐일 것이다. 비릿함이 따라오는 짜릿함은 내 것이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한다.



*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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