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절망이었다가 그다음엔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없었다. 결혼생활은 서로에 대한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던 인생선배의 말이 옳았다. 결혼은 미친 짓, 결혼은 지옥행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분명 행복으로만 인도하는 문은 아니었다. 결혼은 상대방의 민낯을 보는 동시에 나의 민낯을 보게 되는 여정이었고, 그것을 피하고 싶은 자에게는 지옥의 관문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혼이 아니더라도 인생에서 타인이나 나의 민낯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어떻게든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인간이란 존재는 성숙할 수 없다. 이것이 내가 굳이 '기회'라고 표현한 이유인데, 기회가 될 수 있는 민낯이 스쳐 지나고 말 인연들에 의해서만 드러난다면 여기저기 수치스러움만 묻힐 뿐이다. 소중한 관계로 발전된 인연도 있지만 대부분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길 바라게 된다. 결국 악연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의 연이 악연이 되어버릴 수도 있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건 한 끗 차이다. 헤어지면 악연이고 그렇지 않으면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부부사이다. 그 한 끗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지속성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속성에 대한 서로의 의지에 달린 셈인데, 나는 이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 극강의 효율적인 생각을 했다. 헤어지지 않는 이상 나는 평생 이 한 사람과만 부대껴도 성숙된 인간으로 자라 갈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나의 수치는 한 사람에게만 집중해서 보여주겠다는 의지였다. 민낯을 드러내기 위해 본격적으로 세수를 해야 한다면 바로 여기다 하는. 나의 구정물은 여기서만 흘려보내자 하는. 발 뻗을 자리를 보는 것, 이것은 감정쓰레기통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민낯으로도 사랑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적당히 씻다 만 얼룩진 얼굴이 아닌 말간 얼굴로 마주 보기 위해서는 씻어내는 과정이 필요했다. 물을 받고 흘려보내는 과정까지 기꺼이 기다려줄 수 있어야 했다.
결혼의 시작이 아닌 결혼생활의 지속성에 대한 의지란 이런 것이다. 나도 그의 하수구가 되어주고, 그도 나의 하수구가 되어 끊임없이 씻고 흘려보내는.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있다는 것은 그의 오물마저도 담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그가 오물을 씻어내는 동안 내 안에도 그의 오물이 흐른다. 식은땀과 눈물이 함께 흐르는 것은 당연지사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말들도 부지기수다. 다만 우리는 흐르고 흘러 어딘가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결혼을 바라보는 다각적인 시각은 일종의 정신승리와도 같았지만 실제로도 결혼생활은 다면적이다. 남편과 밑바닥까지 드러내며 서로의 민낯을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처음에는 절망이었다가 그다음엔 오히려 위로였다. 이 세상에서 내 밑바닥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온통 가면이 판치는 세상에서, 나조차도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데, 내 민낯을 봐놓고도 나를 다시 보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문득 위로가 되었다.
몇 번의 절망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중요한 건 여전히 그와 내가 일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커다란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는 일상으로의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가린 채 지속하는 일상은 쇼윈도부부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을 잇기 위한 부부의 노력은 가치가 있다. 덮어두는 것이 상처가 아니라 허물이라면.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끌어안는다면. 그것은 습한 곳에 곰팡이가 피는 것과 같지 않으며, 캄캄한 밤을 뒤로하고 다시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을 것이다.
* 사진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