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희의 방문
서울시립미술관에 다녀왔다. 서울에 십 년 동안 살면서 멀지도 않은 이곳에 처음 가봤다. 무려 무료 전시인데도. 아이들 키우느라 바빴다고 핑계를 대봤지만 그냥 그림에 관심 없던 거다.
그런데 갑자기 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냐면, 독태기가 와서다. 독서 권태기를 줄여서 독태기. 이번엔 어떤 책을 읽어볼까 해도 흥미가 생기질 않았다. 문자라는 기호를 읽어내고 그 의미를 해석해 내는 과정이 왠지 피곤하게 느껴졌다.
나도 내 속에 있는 것들을 글로 표현해 내는 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다른 표현방식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그래서 찾게 된 강명희 전시회는 내게 좋은 안식이 되었다. 작가의 초기 작품에도 구상화와 추상화가 섞여있었는데, 자연의 색감을 소재로 한 최근 작품들의 추상적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을 즐겨 감상하진 않았어도 정물화라던지 초상화 같은 것보단 실제적이지 않은 표현들을 선호했다. 해석해 낼 필요가 없는 감상, 내 멋대로 해석해도 상관없을 추상화가 좋았다. 그러면서도 작가와 아주 동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도슨트보단 글자로 된 팸플릿을 선택했다.
지나친 추상이 아니면서도 색감으로 구상한 캔버스 위 그녀의 그림 속으로 나는 풍덩 빠져들었다. 바다. 깊은 속만큼이나 까맣게 타들어간 듯 시커먼 바다. 하늘의 빛을 그대로 받아먹고 푸름을 띠는 바다. 바다와 맞닿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나무를 보며 바다는 이렇게 말하고 있겠지.
여기서부터는 뭍이다. 이곳은 바다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삼킬 수 없다. 나는 여기서 나로서 존재하고, 당신은 거기서 그대로 살아있으라.
그녀가 보고 그린 바다에서 나는 내가 보고 쓴 바다를 떠올렸다. 마음으로 그 풍경을 소환했다.
그리고 만약 당신 말의 기억이,
어떤 존재의 흔적이,
거리와 지속시간을 손수건으로 묶어주는 것이,
황혼의 수백 가지 화음보다 나를 더 감동하게 한다면?
그렇지 않다면, 나는 돌 중의 돌이 되고, 파도 중의 파도가 되어 어떤 포옹도 거부하리라.
그렇게, 무심한 자연과 하나가 된다면,
숨이 찰 이유가 없지 않은가?
- 강명희, 중국해를 그리며 쓴 편지
강명희 화가는 글도 잘 쓴다. 당연하게도 그림뿐이라 생각했던 그림 전시회에서 강명희 화가의 문자 기록을 발견하고선 내심 반가웠다. 그리고 내가 독태기, 글태기를 겪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텍스트 속에서 숨이 찼구나. 강명희 작가도 살다가 숨이 찼겠지. 그러면 무심한 자연과 하나 되길 선택하고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느낀 만큼 표현할 수 없는, 혹은 세상과 사람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종종 무능함과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뭐라도 쓸까 하고 끄적거려도 내 속에서 나오는 게 다 거기서 거기 같고. 지겹기도 하고 그렇다.
그런데 한 편의 시 같기도 한 강명희 작가의 편지를 읽고선 '내 안에서 끄집어낸다'라고 표현했던 나의 자만을 반성했다. 내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내가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잠시 내 안에 머무른 것이었다. 내 안에 머물렀던 것은 내 시선이 머물렀던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천상의 공증인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실을
킬로미터 길이의 도서관에 보관하면서
매 순간 기록한 버전을 받아들인다.
마침내 눈(目) 속에서 색(色)이 탄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화가들이 살고 있는 바로 그 눈 속에서.
그러므로 천지개벽 이래, 여전히 세상은 세상이다.
이 밤의 향연이 계속되는 동안
비전을 원하는 자는 이미지를 버려야 한다.
이미지를 원하는 자는 아무것도 보지 않기를 선택해야 한다.
눈먼 자와 볼 수 있는 자,
취한 자와 망각하는 자들이 리듬에 맞춰 쓰러진다.
- 강명희, 중국해를 그리며 쓴 편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실, 천사가 매 순간 기록한 버전, 그것은 바로 자연의 움직임, 자연의 색이었다. 자연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했다. 여전히 세상은 세상이니까.
비전을 원하는 자는 이미지를 버려야 하고, 이미지를 원하는 자는 아무것도 보지 않기를 선택해야 한다. 강명희 화가의 그림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었구나.
조심스레 대입해 보았다. 텍스트를 원하는 자는 아무것도 쓰지 않기를 선택해야 한다. 다만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것도 보지 않기를 선택했던, 다만 자연의 움직임과 색의 변화를 가만히 받아들였던 강명희 화가처럼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한쪽 벽면을 전부 차지한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 나는 되려 뒷걸음질을 쳤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 작품을 좀 더 멋지게 감상하는 법을 터득했다. 멍 때릴 때와 같이 눈의 초점을 일부러 흐리게 하는 것. 그렇게 보니 오히려 내가 그 풍경 속에 자리한 기분이 들었다. 동백의 계절이 나를 둘러쌌다. 어떤 것은 오히려 선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과 생각과 상황들에 대해서, 이제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세밀한 표현력이 내게 없더라도, 또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더라도 괜찮다고. 내가 그것을 오롯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만이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여전히 세상은 세상인 것처럼, 여전히 나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