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만발한 캠퍼스 여기저기서 사랑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누구랑 누구랑 사귄대,라는 앞말과 누가 누가 더 아깝다, 하는 뒷말 사이를 당당하게 가로질러 가는 커플들은 그 무엇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나영과 이나가 속한 신문방송학과 안에서도 핑크빛이 돌았다. 심상치 않은 기류가 느껴지던 남녀 선후배는 마침내 캠퍼스 커플로 탄생했다.
사람들은 커플에도 이름 붙이길 좋아했다. 소희와 주영이 사귄다고 해서 소주커플, 현승과 유리가 사귄다고 해서 승리커플, 나중엔 둘만 붙어 다닌다며 나영과 이나를 두고 나나커플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걸 곧이곧대로 듣고 진지하게 레즈비언커플이라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나영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대학에 온 후 전보다 다양한 인간군상을 접하긴 했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타이틀을 뒤집어쓰려니 억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나영은 술을 한잔도 입에 대지 않아 강한 인상을 남겼다. 강단 있는 그녀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다가서는 남자들이 종종 있었지만 나영은 철벽녀에 가까웠다. 그런 나영과는 달리 이나는 오는 사람 마다하지 않고 가는 사람 막아서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취향은 있어서 이나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일 적마다 나영이 대신 방어해 주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저기 혹시 번호 좀..."
홍대역 3번 출구 앞에서 나영을 기다리고 있던 이나에게 어느 남자가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한걸음 늦게 도착하여 포착한 이 장면에서 왠지 빠져줘야 할 것 같아 느린 걸음을 하던 중이었다. 평소 자신의 이상형과 아주 대척점에 서 있던 자의 뜬금없는 플러팅에도 이나는 모나리자같이 엷은 미소만 지을 뿐 직접적인 거절의 뜻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걸 보다 못한 나영이 무 자르듯 잘라주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렸다.
"제 친구는 남자친구가 있어서요."
"이건 미안하다는 뜻이에요."
"얘는 사실 레즈예요."
마음을 들이민 자의 곁에서 들이댄 핑계의 이유는 점점 더 성의가 없어졌다. 주인을 통과하지 못한 말은 스쳐가면서도 상처를 남겼다. 거절은 어떤 형태로라도 상처가 남는 법이라고, 당사자도 아니면서 굳이 칼을 빼 든 나영은 스스로와 상대방을 달래 가며 이나를 곤란으로부터 구해냈다. 거절을 어려워하는 친구를 대신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라는 이유가 더 타당했다.
네가 뭔데,라고 되묻기에는 상당히 닮은 꼴이라서 자매인가 싶어 일단 후퇴하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중에 친구사이라는 걸 알게 된 뒤에는 우습게도 방향을 바꿔 나영에게 접근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나영은 그런 남자들에겐 가차 없이 냉정해졌다. 처음엔 친구로서 에둘러 거절했다면 이번엔 그런 우회와 핑계도 없이 직설로 선을 그었다. 배려할 가치도 없는 놈들이야, 나영은 야멸차게 혐오감을 내뱉었다. 이성에 대한 나영의 기준은 높고도 높아서 또래 사이에선 그 기준을 충족하는 남자를 찾기가 힘들었다. 나영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일반의 남자들이란 그저 애송이거나, 이리저리 찔러보는 얼간이들일 뿐이었다.
이나가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게 되면서 나영도 학과사무실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조교 선생님은 선생이라기보단 선배에 가까웠다. 같은 과를 졸업한 선배로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과 대표와 함께 학과 행사를 운영하며 교수들을 대신한 잡무와 기자재 관리까지 도맡았다. 그는 학생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고 특히 신입생들을 챙기는 것에 열심이었다. 나영과 이나를 비롯한 신입생들이 학과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살뜰히 챙기는 모습이 퍽 어른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너희 진짜 사귀니?"
공강 시간에 이나를 만나러 학과 사무실에 들렀을 때였다. 이나가 우편물을 부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조교 선배가 은근슬쩍 나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예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핸드폰을 하던 나영이 고개를 돌리며 응수했다. 마음에 들지 않은 남자가 시답잖은 추파를 던질 때처럼 나영은 조교 선배의 질문을 가볍게 뭉갰다.
"네가 그랬다면서. 이나가 사실 레즈라고. 타과 학생이 이나한테 관심 있어서 다가간 모양인데 까인 것보다 그게 더 충격이었나 보더라."
건이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같은 단과대라 그런지 조교들끼리 알고 지내며 종종 학생들 이야기도 한다고 했다. 나름 가볍게 둘러댄다는 게 너무 경솔했나 싶어 후회가 밀려오려던 찰나 별안간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완곡한 거절의 의미로 그냥 둘러댄 건데 그걸 떠벌리고 다닐 일이에요?"
자신의 입에서 나간 말이라도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진짜로 나와 이나 사이를 그렇게 오해했나, 이렇게 헛소문이 퍼지는 건가, 그래서 우리를 나나커플이라고 놀리는 건가. 아 진짜 이 사람들... 나영은 인상을 쓰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진지하게 해명이 필요한 사람은 나영이었다. 그러나 건이의 눈빛은 그보다 더 진지했다. 나영은 문득 궁금해졌다. 떠보듯 던진 질문을 뭉갠 그 자리에는 어떤 진심이 포개져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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