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부터였다. 조교 선생, 아니 조교 선배의 마음을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 이나에 대한 그의 호의는 종종 정도를 넘어섰다. 이나의 생일을 챙겨주는 것도 모자라 성년의 날에는 향수를 선물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안나수이 향수는 병 모양부터 향까지도 이나에게 퍽 잘 어울렸다.
질투일까.
나영은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평소 모두에게 친절한 건이었지만 이나에겐 특별한 애정을 쏟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이나가 그런 애정 공세를 어떤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걸치고 다니는 것들이 사실은 언니 것이라는 말을 하듯, 이나는 건이로부터 받은 물건의 출처를 나영에게 스스럼없이 밝혔다.
"쓰-읍." 나영이 심상치 않은 기류를 입으로 빨아들이며 방울뱀 지나가는 소리를 냈다. 이어 한숨을 내쉬듯 물음표를 그려냈다.
"흠...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조교 선배가 아무래도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넌 어떻게 생각해?" 나영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나에게 물음표를 던졌다.
"선생님? 아니야~" 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으로 일축했다.
"그럼 이런 선물을 왜 하는데? 그것도 너에게만?"
"이건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 그럼 뭔데? 너 모르는 거야, 아님 모른 척하는 거야?" 나영이 답답하다는 듯 이나를 몰아붙였다.
"선생님은 내 멘토야. 내 사정을 다 알아."
사정을 다 안다는 사정인즉슨 이나가 어려운 형편에서 자랐다는 것, 건이가 그걸 알 뿐만 아니라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이나의 입시를 도왔다는 것이었다. 한부모 가정의 자녀였던 이나는 가정지원센터를 통해 진로에 대한 상담을 할 수 있는 멘토링 서비스를 신청했고, 당시 멘토로 연결된 사람이 건이라고 했다.
"검정고시에 합격하긴 했는데 막상 수능을 보려니 막막했거든. 그런데 선생님이 무료로 과외를 해주셨어."
"그렇게까지?"
"그러게. 선생님이 멘토로서 할 일은 진로상담이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거든. 엄마도 선생님을 은인으로 생각하셔. 과외도 선생님이 먼저 제안하신 거야. 내 실력이 아깝다고..."
이나의 진로보다는 과외비와 대학 등록금을 먼저 걱정하던 이나의 엄마에게 건이는 무료 과외를 제안했고,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한국대학교의 장학제도를 소개했다. 당시에는 건이도 졸업 예정자인 학생이어서 정식 조교는 아니었지만, 몸담고 있는 학교에 대해서는 자신이 아는 바를 상세하게 알려줄 수 있었다. 마치 친오빠처럼 이끌어주는 건이의 영향을 받아 이나는 한국대학교의 같은 과에 지원했고 운 좋게 합격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뜻밖의 인연에 나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와... 조교 선배, 아니 조교 선생님이 완전 너의 키다리아저씨네. 그런데 왜 진작 말 안 했어?" 나영이 멍한 눈빛으로 허탈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나 원래 물어보기 전엔 말 잘 안 하잖아." 이나가 미워할 수 없는 무해한 표정으로 코를 찡긋하며 말했다. 참 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라고 중얼거리는 나영의 혼잣말 위에 이나가 조심스레 말을 얹었다.
"그래도 너에겐 숨길 생각은 없었어. 언젠간 알게 될 거라 생각했고. 무엇보다 선생님은 좋은 의도로 도와주신 건데 혹시 오해 살까 봐... 그러면 내가 너무 죄송할 것 같아서. 나에게 선생님이 특별한 존재는 맞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야. 선생님은 오래 만난 여자친구도 있어. 곧 결혼도 하실걸."
사랑과 우정, 연인과 친구 사이 외에도 수많은 관계들이 있다는 걸 나영은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가령 멘토와 멘티 같은. 은혜를 입은 까치처럼 사람 간에도 그런 형태의 관계가 있겠구나 하고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래도 나영이 간과할 수 없었던 한 가지는 조교 선배가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한쪽이 완전한 어른의 역할을 한다면 모를까, 나영은 남녀 사이에 완전한 친구는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건 순수성의 결여라기보단 본능적인 경계심에 가까웠다. 미성년 시절 멘티와 멘토로 만난 관계는 대학생과 조교 선생님의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스무 살에게 스물일곱 살은 완전한 어른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경계가 허술해 보였다.
'여자친구가 있단 말이지... 그것도 오래 만난.'
나영은 과연 건이의 여자친구가 이나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녀가 알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남자친구가 멘토로서 멘티에게 베푸는 호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어쩌면 그녀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오래 만난 여자친구라는 존재가 오히려 둘 사이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만들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오래 경험한 이나의 입장에선 자신에게 베푸는 남자 어른의 자상한 호의가 필요했을 것이고, 오랜 연인의 존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찜찜한 감정을 합리화하는 장치일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이성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일차적인 오해는 풀렸으나 나영이 보기에 일반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일방적인 관계도 아니었지만 이 관계를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인식이 같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영은 그들 사이의 관계를 함부로 단정 짓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자꾸만 적정선이 어디일지 가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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