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선 들킨 적이 있다. 그땐 어떻게 알았지라고 생각했는데, 부모가 되고 보니 아이의 거짓말이 훤히 보인다. 그렇게 훤히 내다보는 부모의 손바닥 안에 있다 보면 아이는 거짓말하기를 포기하게 된다. 나의 경우엔 혼나는 게 무섭고 정직해서라기보단(그랬다면 애초에 거짓말을 안 했으리라) 어설프기를 포기했던 것 같다. 의심받고 추궁받고 까발려지는 그 모든 순간이, 그럼에도 옷자락 하나 걸쳐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며 고집부리는 모양새가 비참하고 비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도 거짓말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 어디까지 거짓말을 하는지보다도 거짓말을 얼마나 능청스럽게 하는지를 중점적으로 지켜봤다. 친구들의 의심 어린 눈총과 추궁을 어떻게 견디고 감당해 내는지도. 그것을 전부 자연스럽게 해낸(?) 아이에 대해서는 마음을 주진 않았어도 속으로 나름의 인정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들은 확실히 남들과는 다른 구석이 있었다. 간이 크거나 매끈하거나.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그러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오고야 만다는, 동화책의 교훈 같은 사실을 일찍이 받아들인 건 꽤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런 척, 안 그런 척하는 부분이 내게도 있었다. 누군가 집에 데려다준다고 해도 초라한 집 앞까지는 인도하지 않는 과정에서 그랬고, 연락이 오는 걸 알면서도 무응답으로 일관하고선 자느라 못 받았다고 둘러대는 거짓말도 수없이 했었다. 그 외에도 좋아하면서 관심 없는 척,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 아는 척, 척척척...
당시엔 취약한 나를 지켜내기 위해서 취했던 방어적 행동이라 생각했지만, 내가 먼저 받아들이지 못한 현실에 들이민 방패는 되려 나를 겨누는 창이 되었다. 결국 자기기만적이라는 점에서 진실되지 못한 말과 행동은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고, 지금도 치르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나 스스로를 속일지언정 남을 속일 만큼 간이 크거나 매끈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소설은 허구의 세계지만 진실을 담는다. 진실을 담기 위해 허구의 세계를 창조한다. 허구이기에 진실을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익명에 기대는 것보다 효과적인 방법일 수도 있다. 실명과 실존을 다루는 다큐의 매력은 생생한 진실성에 있지만 어디까지 다룰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느냐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나라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는 점을 떠올려볼 때, 소설은 오히려 부담 없이 현실적인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하는 매체가 될 수 있다.
네가 나일 수도 있고 내가 너일 수도 있는 복합적인 인간이란 존재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소설 속 인물에 시선을 두기로 할 때 되려 진실해지는 경향이 있다. 소설을 읽는 입장에서도, 쓰는 입장에서도 그러한데 쓰는 입장이 되어보니 진실하기 위해 설득하는 과정이 있다. 인물의 서사마저도 허구일 뿐이지만 그 속에 진실을 담기 위해, 한 방울도 흘리지 않기 위해 그물을 촘촘히 짜듯 고민하는 시간이 있다.
무엇을 가리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들고 완벽한 거짓말을 궁리할 때와는 다르다. 무엇을 드러내기 위해 탄탄한 서사를 만들고 인물을 탐구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서사라도 인물의 성격상 이런 선택이 가능할까 하는 질문들, 이런 상황에서 이 인물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하는 고민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그것은 나를 설득하는 과정이자 독자를 설득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설득의 목적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다만 진실해지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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