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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 Jan 10. 2019

토해내지마

글은 다듬는거야

고등학교때 영어선생님이 에세이를 쓸 때, 일필휘지로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토해내지 말라고 하셨다.

글은 다듬고 정제해서 제일 좋은 버전을 독자에게 읽히게끔 말끔해야 한다고 했다.

그 시기 많은 것을 배웠지만 유일하게 기억남는 글쓰기 방법론이다.


그러나 시험시간이 다가오면 그게 쉬운일이 아니었다.

대학교 시험시간에 아는 것을 최대한 다 쓰고 나와야 점수를 받을거라는 믿음으로 생각나는 대로 '나 이것도 알아요, 저것도 알아요.' 이런식으로 쓰고 제출하기 일쑤.

일기를 쓸때도 그날 그날 하고 싶었던 말을 쓰지, 생각을 정돈해서 쓰지 않았다.

하루를 복기하며 정리하는 시간에도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듯 쓰는게 아니라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흘려썼다.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내가 느낀 것, 배운 것, 경험한 것을 찬찬히 그림그리듯 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타이른다.

'괜찮아, 괜찮아. 하루 아침에 잘 되진 않을거야.'


박완서 작가가 가독성이 좋은 글을 만들기 위해 퇴고에 퇴고를 거듭했다고 하던가.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라는 소설을 읽을 때,

화자가 한가지 주장을 끌고 그 주장을 관철시키려 설득력있게 글을 끌고 나가는 문단을 볼때 생각한다.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지?

 

도서관에서 나는 잡지류를 먼저 뒤적인다. 기사 중에서 가장 흥미있게 찾아보는 것은 인터뷰류이다. 운이 좋다면 그중에서 나의 고객을 찾아낼 수 있다. 대중적이고 저열한 감수성에 물든 기자들은 내 잠재 고객의 성향을 행간에 감추어버린다. 그들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껴본 적은 없나요?' 같은 질문을 절대로 던지지 않는다. 당연하게 '피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따위의 질문도 하지 않는다. 다비드나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 감상을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인터뷰는 인생에 대한 아무 의미 없는 언급들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나를 속일 수는 없다. 나는 그들이 의미 없이 내뱉는 말 속에서 가능성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즐겨 듣는 음악, 언뜻언뜻 내비치는 가족사, 감명깊었다던 책, 좋아하는 화가 등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내고야 만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내면의 충동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들은 나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p10-11]


부활에서는 카츄샤가 재판받는 장면에서 남자주인공인 네흘류도프 생각을 묘사한다. 여기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문단이 있다. 그 부분을 읽을 때엔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써도  지탄을 받지 않았을까? 200년 후에 작가 대신 걱정해주는 독자가 됐었다.

 

직접 그 인물이 되어야 보다 현실적으로 쓸 수 있는걸까? 역시 다독, 다작이 정답이겠지. 대장장이가 명검을 만들때까지 두드리고 담금질하듯이 오늘도 두드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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