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와 둘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불쌍한 삶을 살지는 않는다. 함께 해 주시는 부모님도, 가끔은 아이를 부탁할 수 있는 이모들이 있다.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덩달아 내 아이까지 사랑해주는 2배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아니 무엇이 비어 있더라도 나는 감사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이혼을 하고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많이 한 말은 "아이가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였다. 나는 그 말이 참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아이가 없었다면 내 삶이 정말 다 무너져 내렸을지 모를 것 같다. 삶의 원동력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삶을 모두 내려놓고 싶을 때 나의 첫 원동력은 아이였다. 그 아이로 인해 다시 일터에 나갔고 일터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바삐 살다 보니 또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또 아이를 키우면서 헌신, 봉사, 사랑 등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이혼을 하는 과정에서 내 주변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 난임휴가에서 막 복직하신 분이 내 회사 동료로 있었다. 동료라 하기에는 한참 나이가 많으셨지만 항상 내 말을 경청해주시는 속 깊은 분이셨다. 그분은 참 많은 경험과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지만 아이가 없어 항상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으셨다. 그래서 항상 배우는 자세로 살아가시고 마음수련을 많이 하셨다.
만약 평소의 나였으면 아마 아이 키우는 푸념을 달고 살았을지 모른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은 정말 녹록지 않으니까. 하지만 항상 직장에서 함께 있다 보니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이 누군가에겐 복에 겨운 혹은 자만한 생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하는 한마디 말이 그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창조성, 그리고 특별한 능력이다. 「시크릿」에서 말하는 우주에 전하는 간절한 바람도, 「모멸감」에서 인간에게 말이 주는 잔인무도함도 결국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 푸념을 하지 않고 살다 보니 아이 키우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화가 나는 상황을 조금씩 정리해 보았다. 스트레스. 그럴 때 나는 조금씩 타협을 해 가고 조정을 했다. 너무 힘들 땐 아이와 티브이를 보기도 하고 대신 끌 때 여러 번 끌 것을 예고하고 티브이가 꺼지면 다른 관심을 끌만한 것들로 그 반발 작용을 줄였다. 때론 매일 씻기지 못해도 때론 자는 시간이 조금 늦어져도 나에게 조금씩의 쉼을 허락했다.
예전의 나였으면 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작은 허점 따위 허락하지 않고 나를 괴롭혔을 것이다. 혹은 완벽주의적 성격 때문에 아이의 아이다움을 망가뜨렸을 수 있다. 때론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휘둘려 기준과 조건만 늘려갔을 수 있다.
하지만 내 동료를 통해 배운 것은 감사였다. 내가 이 아이로 인해 웃을 수 있음을. 그리고 부모가 된다는 책임감에 나의 미래를 아무 계획 없이 넋을 놓고 살아가지 않게 되었음을.
실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말조심한 작은 행동이었지만 나는 내가 가진 말의 힘을 느끼게 되었다. 말은 생각을 바꾼다. 생각은 행동을 바꾼다.
아이 양육으로 힘들다. 맞다. 힘들다. 그건 누구나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조금만 넓게 보면 우린 어른이 되는, 성장하는 성장통이라는 축복을 안고 있다.
이 축복이 축복으로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길 바라며 내 양육의 기록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경험을 담아 이 매거진을 써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