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자존감에 대한 책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그중 눈에 띄는 내용 중 하나는 부모의 자존감이 아이에게 대물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든 생각은 '내 자존감은 안녕한가'였다.
1.마트에서 우리 아이가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 곧 말도 안 되게 울고 떼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나는 아이를 다그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로 하여금 아이를 꾸중하도록 만들었다. 그 시선이 내가 못난 엄마라서 이 상황을 처리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 뛰고 싶은 아이에게, 떼쓰는 아이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없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2. 말이 안 통하는 아이가 손을 끌고 가 물을 달라고 했다. 내가 물을 주고 나니 그 물을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쏟아버렸다. 그리고 좋다고 박수를 치며 그 물을 손으로 만졌다.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고 아이는 울었다. 나는 왜 소리를 쳤을까?
나는 그 이후에 자존감에 대한 책을 읽으며 내 끓어오르는 분노의 중심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우선 내 생각과 다를 아이의 생각이 나를 분노하게 했다. 또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나를 분노하게 했다. 이 분노의 중심을 깨닫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어디서 화가 나는지가 분명해졌기에 이제 인정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기로 하고 방구석 구석에 "우리 00은 아이다. 어른이 아니다."를 붙여놓았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천한 나에게 포상으로 집안일을 포기하고 책 읽기와 티브이 보기를 선물하였다.
1. 마트에서 아이가 울었다. 난리를 쳤다. 하지만 "나는 저녁에 마트에 온 것은 엄마가 미안해. 대신 빨리 장을 보고 우리 집에 가자."를 몇 번이고 부드럽게 얘기하고 안아주었다. 그때 어느 아주머니가 우리 아이에게 작은 장난감을 주고 갔다. 차가웠던 사람들의 시선 사이에서 엄마 선배들의 안쓰러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나는 그다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눈총이 아니라 아이를 키운 선배로서 나를 안쓰러워하는 위로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물론 내가 사람들에게 느끼는 시선이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일이 없었다면 내 옆에 이렇게 많은 육아 선배들이 있다는 것을 잊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시선을 눈총으로 생각하면 부끄러움과 당황이 합쳐져 아이를 혼내게 할지 모른다. 아이를 안 낳는 이 시대에 나는 엄청 소중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고 나를 다독이고 아이에게 백 번, 천 번 이야기를 단호하게 하되 받아주는 부모다.내 무능함이 아니라 누구나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제지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고민하되 아이기 때문에 집중 시간이 짧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찌그러진 자존감으로 우리 아이는 내 눈치를 엄청 살피게 되었다. (오히려 너무 혼난 아이는 부모의 감정에 무뎌지기도 한다고 했다. 부모가 화를 내도 웃어넘기는 아이들이 그런 예가 될 것이다.) 되돌아가는 길은 매우 험난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나는 무능한 엄마가 아니고 육아는 성과를 내야 하는 일이 아니다.
2. 아이가 물을 쏟았다. 아이가 신나서 웃는다. 그리고 조금 기다렸다. 그리고 진정이 될 무렵 아이에게 물을 가지고 노는 것은 화장실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물을 밟아서 미끄러지면 아플 수 있다고 나름 애를 써서 보디랭귀지를 섞어 이야기했다. 그땐 "예"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여전히 물을 쏟는다. 하지만 이젠 '애니까.'라고 하고 닦는 것도 함께 한다. 청소도 놀이가 되었다.집이 엉망이면 내가 못난 주부인가? 아니다. 난 정리를 잘 못하지만 아이에게 관심이 많은 엄마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내 못난 점도 다 나임을 인정해 본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아이가 따라 한다. 내가 뒷짐 지고 걷거나 엎드려 책보거나 한쪽 다리를 올려 척추가 휘어지게 앉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하는데 결국 내가 원인이다.
아이가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따라 하는 건 내가 하는 행동을 관찰하고 배우기 때문이다. 내가 바뀌어야 아이도 바뀐다. 자존감도 마찬가지다. 내 아이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한 현대사회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