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였을 때는 어른이 되면 쉽게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살아있다면 수시로 상처받을 수 있다. - 매들렌 렝글 -
나이가 많다고, 돈이 많다고, 지식이 많다고, 힘이 세다고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산다는 것은 서서히 태어나는 것이다. - 생텍쥐베리 -
[ 100미터 미인 같은 부부 ]
입사 동기들 중에서 결혼이 이른 편이었다. 대학 졸업 즈음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싸움이라는 걸 몰라서 우리는 천생연분인 줄 알았다. 그러나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 티격태격 하더니만 결혼 후 1년은 정말 많이 지겹도록 싸웠다. 우리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왔었고 달랐다. 결혼 전에는 그게 매력이고 좋았는데 결혼 후에는 그것이 신발 속에 있는 작은 모래알처럼, 때로는 손에 박힌 가시처럼 서로를 불편하게 했다. 어떻게 서로 맞춰서 행복하게 잘 살아갈까를 고민하기 보다는 그저 나 자신을 지켜내기에 급급하여 싸우고 싸우면서 나의 방식을 상대에게 관철시키고 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방법만을 찾았던 듯하다. 우리는 둘 다 DTS (Discipleship Training School)라는 예수제자훈련학교에서 12주 강의와 12주 전도 여행으로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하나님, 자신,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세우고 헌신하는 소위 훈련받은 신실한 크리스천 대학생이었다. 선교 단체에서 리더였고, 간사였다.
그런데, 이혼하는 사람들이 너무 이해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고갔다. 내가 이것 밖에 안 되는 수준의 사람이었나 싶은 나의 밑바닥 어두운 그림자를 보게 되었고, 그림자를 보게 될 때마다 보고 싶지 않아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나 싶은 상대방의 그림자를 알게 되는 것도 작은 실망과 좌절이 계속해서 없어지지 않고 쌓여만 가서 힘들었다. 진짜 힘들었다. 그런데, 이런 결혼 생활의 속내를 이야기하거나 조언을 구할 곳은 없었다. 아니, 입 밖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 놓을 처지가 못 되었다. 스스로를, 서로를 보듬어주면 단련했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서로 생채기만 내고 각자의 그림자 민낯을 마주하며 믿음의 가정에 대한 이상과 현실의 갭이 점점 커지고 멀어지면서 서로 절망하며 지쳐가고 있었다. 결혼 전에는 이상과 현실의 거리가 그렇게 짧았었고 아무리 먼 거리도 우리가 가진 믿음과 사랑으로 다 메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거리의 양쪽 끝이 점점 멀어져서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살아가는 동안에 그 거리를 과연 좁힐 수 있을까라는 짙은 실망과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1999년 <광수생각>이라는 연재만화에서 이런 글이 있었다.
‘옆집 남자는 기념일을 절대 잊지 않는다. 옆집 남자는 때가 되면 아내에게 꽃도 선물하며 술도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담배도 안 핀다. 뭐 그딴 자식이 있지? 화가 난다. 옆집 남자도 살아봐야 압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보여도 겪어보면 못 보던 부분도 보이기 시작한다. 겪어보지 않고 판단한 모습은 한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 되기 어렵다는 의미다. 눈으로 확인하고 머리로 판단한 한 사람의 모습은 단지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이미지만 포착한 것 일수도 있다. 하지만 몸으로 겪어보고 가슴으로 느낀 모습은 꿈꾸던 이상과는 다른 현실의 모습이다. 바라보는 눈은 이상에 가 있지만 겪어내는 몸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나의 모습도, 그의 모습도 어쩌면 현실이 진실이다.
[ 한밤중, 얼떨결에 수술을 하다 ]
이런 좌충우돌의 삶에 뜻하지 않은 임신이 찾아왔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기쁘지 않았다. 마치 이제 겨우 서핑 기초를 배운 초보 서퍼가 서핑을 하는 중에 갑자기 심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세져서 겨우 겨우 중심을 잡으며 적응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내 보드로 살짝 뛰어 올라타서는 ‘나 좀 잡아주세요.’ 하는 것과 같았다. 청천벽력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각지도 못한 때에 발생했다. 준비도 되지 않았고, 감당할 능력도 없었다. 더구나 새로운 생명을 품고 함께 살아갈 자세와 태도는 물론 준비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임신해서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제도적으로는 가능했지만 그때만 해도 중소기업은 임신하면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고 출산휴가는 단 2개월이었다. 그래서 언제 회사에 소식을 알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혹시 다른 피해가 있을까 하는 마음에 동기들에게도 숨겼다. 그러면서 남편과 말다툼을 하고 나면 스트레스를 엄청 받아 어지럽고 힘도 없어지고 얼굴은 시커멓거나 창백해져서 몸 상태가 안 좋아짐을 느꼈다. 가끔씩 피가 비치기도 했다. 이렇게 티격태격 하고나면 뱃속의 아이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쑥 불쑥 올라왔다. 계획되지 않은 임신이어서 인생에 선물이 아닌 방해꾼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되지 않아 혼란스러웠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 몰랐다.
6주째 되던 날, 정기 검진에서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늦은 한밤중에 아랫배가 너무 많이 아팠고 내 몸 안에서 어떤 커다란 덩어리가 자궁 아래로 쑥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무서웠다. 그래서 얼른 그것을 싸서 휴지통에 버려버렸다. 그리고는 혼자 택시를 타고 응급실에 갔다. 내가 무서워서 버렸던 그것을 가져 왔어야 한다며 의사 선생님께 혼이 났다. 그러더니 곧바로 그 새벽에 홀로 덩그러니 싸늘하고 휑한 수술실 조명을 쳐다보며 수술실 침대에 눕게 되었다. 깨어나 보니 지방에 있던 남편과 가족들이 와 있었다. 나중에서야 담당 의사가 빠르게 수술 조치를 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란 것을 알았다. 수술 후 쉬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회사에 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회사를 어떻게 다녔는지 무슨 업무를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겹도록 많이 싸웠고 그리고 유산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부부에게 하나의 매듭이 되어 주었다. 죄책감도 가져다주었고, 생명이 무엇인지 다시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며, 생명을 기다리는 소중함을 알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짙고도 짙은 잿빛과 같이 우울한 시간이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뭔가 탈출구를 찾아야 했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교회 주일 학교 아이들에게 기도란 무엇인가를 쉽게 설명할 때면 나는 이런 방식으로 접근했다. 어떤 꼬마가 자기보다 훨씬 힘이 세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와 싸움을 할 때, 꼬마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이 가진 모든 내부와 외부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는 방식이다. 혼자 안간힘을 써서 싸우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때로는 부모님과 형제의 도움, 힘, 지혜, 응원을 빌릴 수도 있다. 기도란, 이렇게 전지전능한 존재인 하나님께 지혜와 능력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나는 내가 가진 모든 힘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사용할 생각조차 못했고 그저 가장 최소의 힘으로 버티기만을 했다. 어려움을 이겨낸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요청하기 보다 혼자의 힘만으로 꿋꿋이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언뜻 매우 책임감이 강해보이지만 세상에는 나를 진정으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세상에 대한 불신과 교만의 결과였다.
책임감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책임을 진다는 말은 발생한 모든 문제를 혼자 뒤집어쓰라는 말이 아니다. 책임감은 나에게 맡겨진 본분을 다하되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주어진 일을 끝까지 완수하려는 끈질긴 노력을 의미한다. 책임감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마음을 끝까지 가져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람이, 나의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 가장 겸손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리라. 기꺼이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짊어지되 그것이 내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주어진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최적의 대안을 선정해 끝까지 해결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