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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Feb 02. 2020

적당히 좋은 딸이 되고 싶습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자식'의 솔직한 고백

화목함이란 무엇인가

내가 초등학교 때는 매년 방학숙제로 가족신문을 만들었다. 가족신문에는 우리집의 가훈과 가족 구성원의 이름, 성격, 하는 일, 취미 등 간단한 소개와 함께 보낸 즐거운 기억 같은 것들을 적었다. 그때는 가족 한 명 한 명의 사진을 오려 4절지 또는 전지에 붙이고 책처럼 구성하는 게 유행이었는데 나는 2절지 한 바닥에 가족 신문을 적어내곤 했다. 여러 장을 채우기엔 무슨 이야기를 채워야 할지 몰랐고, 내 가족신문에는 가훈과 즐거운 기억 정도가 중심이었다.


우리 집 가훈은 '가화만사성'이었다. 가화만사성은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는 한자성어로 당시만 해도 꽤 흔한 가훈이었다. 엄마는 그 가훈을 집에도 붙여놓으셨었는데 그 가훈을 훈장님이셨던 외할아버지가 지어주셨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 신문에는 그 가훈이 늘 들어갔으면 어느 해에는 한글로, 어느 해에는 한자로, 또 어느 해에는 한자와 함께 그 아래 음과 훈을 적었다. 나는 그 가훈과 가훈의 뜻을 볼 때마다 연한 분홍색이 떠올랐는데 애석하게도 우리 가족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집 가훈은 가화만사성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모두 맞벌이를 하시며 치열한 3-40대를 보내셨다. 대기업에 다니면서도 부지런히 자기 계발을 하여 빠르게 성공하셨던 아빠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발전된 것을 보며 견문을 넓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셨다. 그래서 그랬는지 피곤할 법도 한 주말마다 우리를 차에 태우고 함께 어디든 갔다. 그게 동해든 서해든 남해든 에버랜드든 어린이대공원이든 상관없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엔 언제나 어딘가에 갔다. 엄마는 그때마다 한숨을 쉬며 쉬고 싶어 했고 나와 동생은 차 멀미와의 사투 때문에 찡그리며 차에 올랐다. 우리는 한 공간에서 같은 목표로 움직였지만 각자 느끼는 감정은 달랐고 나는 그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늘 고민했다. 그래도 어딘가에 다녀올 때마다 사진은 많이 남았고, 아빠 차 창밖으로 펼쳐졌던 수많은 길과 바다들은 오래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주말마다 어딘가에 다녀오는 우리 집은 화목한 가정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화목함은 '어떤 일로 인해 서로에게 느끼는 어떤 감정'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이었다. 그렇지만 엄마와 함께 가족신문에 들어갈 사진을 고르고, 신문 이곳저곳을 화려하게 꾸미며 개학을 맞이하는 건 또 하나의 즐거운 기억이었다.



뭐든지 잘하는 슈퍼 딸내미

중고등학교 때의 나는 밝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아이였다.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 받고 자주 울었으며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 혼자 조용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약간의 교우관계에서의 어려움을 제외하고는 별달리 문제없이 평범했다. 학교와 집에서 모두 그랬다.


주말마다의 갔던 가족 여행은 전만큼 자주가 아니더라도 한 달에 한 번은 갔다. 동생도 나도 머리가 큰 데다 엄마의 쉬고 싶은 마음은 더 커져 여행을 가기 위해 차를 타는 것부터가 곤욕이었다. 차 안은 누구도 즐겁지 않았고 도착지에 가서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를 연발해야 그때부터 즐거워졌다. 돌아오는 길은 모두 녹초가 되어 잠들었고 어두운 밤길을 아빠 혼자 운전하게 할 수 없어 눈만 뜨고 헤드라이터처럼 앞만 봤다. 그게 주말의 여행이었다.


나는 에버랜드 연간 회원권을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줄곧 가지고 있었다. 다른 집도 그런 줄 알았는데 고1 때 소풍으로 에버랜드를 갔을 때 나만 연간 회원권이 있는 것을 보고 아빠와 엄마가 이뤄낸 노력의 산물이 이 연간 회원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부모님의 노력에 흠이 되지 않도록 내가 착한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주말의 여행을 하면서 엄마와 아빠를 더 즐겁게 하려 노력해보고자 했다. 나는 그때부터 차멀미를 하지 않게 되었다.



어떻게 다 잘할 수가 있겠어

대학교를 지방으로 간 탓에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했다. 통금은 밤 11시. 3번의 외박은 바로 퇴출이었다. 따로 자취할 생각도 못해봤고 상위권의 성적인 학생들만 입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들어간 기숙사인데'라는 생각으로 꼬박꼬박 시간을 지켰다. 그러면서 한 학기에 수도 없이 많은 대외활동을 했다. 당시 지방에는 대외활동이 많지 않아 충북에서 서울과 경기를 오가며 학기당 서너 개의 활동을 해냈다. 하나씩 해낸다는 성취감이 좋아 활동에 중독(?)되었다. 틈틈이 연애를 하고, 활동에 복수전공까지 하니 집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이 정도의 바쁨이 어른의 생활인가 싶어 오히려 뿌듯했다. 내 삶의 주체가 나라는 게 오롯이 느껴졌다.


막 학기를 앞두고 있을 때 아빠가 처음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전화를 엄마로부터 받았다. 동생은 서울 소재의 사립 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여전히 엄마는 일을 하고 계셨다. 바삐 지낸 만큼 한 학기 정도 휴학을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올까 했던 나는 예상치 못하게 빠르게 취업을 준비했다. 그 해 겨울 12월 29일에 서류를 내고, 1월 4일에 면접을 본 뒤 1월 20일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여러 상황들은 정말 갑작스러웠지만 왠지 그렇게 행동해야 할 것 같았다.


지방에서 서울로 급히 올라오게 된 터라 집에서 왕복 6시간짜리 통근을 하다 추운 겨울 터미널에서 혼절을 한 번 하나 뒤 우여곡절 끝에 동생과 함께 살게 되었다. 동생은 자유로운 2학년 생활을 하지 못할 게 눈에 보여 나와 함께 지내는 걸 싫어했지만 나는 엄마와 아빠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돈도 바지런히 벌어 빠르게 경제적 자립을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시 경제적 독립은 했지만 내 미래에 대한 자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첫 회사는 스타트업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업무 강도도 조금 높았고 일 욕심이 많았던 터라 밤늦게까지 야근하기 일쑤였다. 야근 후엔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새벽까지 술 한 잔을 한 뒤 집에 와서 눈을 잠시 붙이고 출근했다. 겉으로는 즐거운 듯했지만 속으로는 미래에 대한 여러 생각들로 불안했던 것 같다.


아빠는 실직 이후 몇 번이나 회사에 고문, 자문, 교수 등을 역임했는데 다만 그 고용이 계약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3개월에 한 번씩 동생이 내 밑으로 들어갔다가 아빠 밑으로 들어갔다가 했다. 지역가입자 우편이 올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엄마는 바쁜 나를 대신해서 어딘가에 전화해 과하게 납입한 보험료를 돌려받았다. 동시에 쉰 살까지만 일하고 싶었던 엄마도 환갑까지 일을 하겠노라 선포했다. 나는 동생과의 살림살이를 채우는 데에 집중했고 서울 집은 내가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씀씀이를 줄였다. 이렇다 할 취미생활도 없었고 사회생활에서 막내라는 위치는 돈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런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회기역과 외대역 사이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출근을 하려 역으로 가다가 1교시를 괜히 넣었다는 여자 아이들의 짜증 섞인 투정을 들었다. 나는 옥수역에서의 지옥 같은 환승만 떠올리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순간 내 모습이 너무 슬퍼 보였다. 출근을 해야 한다는 슬픔이 아니라 지금 내 상황에 대한 슬픔이랄까? 이 모든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처음으로 화살을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 돌렸는데 그게 하필 부모님이었다. 그 날부터 부모님과 연락을 점점 덜 했고, 집에 가는 발걸음도 조금씩 줄였다. 그래야 내가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죠?

두 번째 직장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바쁜 내 마음을 토닥여주는 데에 시간을 모두 소요했다. 아주 힘들 때는 집에서 쉬었는데 그때마다 나에게도 고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향이 있는데 고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웃겨서 소리 내 웃은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집에 몇 번 내려갔다. 집은 예전보다 더 넓고 조용했다. 넓은 공간에 부모님은 각자 생활하고 계셨다. 내가 갈 때만 그 각자의 공간에 교집합이 생겼다. 교집합은 익숙지 않았던 것으로 교집합이 생길 때마다 집이 시끄러워졌다. 감정적인 엄마와 버럭 하는 아빠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큰소리 내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을지만 고민했다.


가끔 엄마와 서울에서 밥을 먹었다. 딸들 서울에서 자취를 4년 넘게 했지만 엄마는 딸들 집에서 하루도 자고 간 적이 없다. 잘 곳도 넉넉하고 침대가 2개나 있는 집이었는데 말이다. 시간이 늦었으니 자고 자라는 내 이야기에 그날 아빠의 저녁 식사나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챙겨줄 사람이 없어서 가봐야 한다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예민한 아빠에게 면박을 받는 것에 그렇게나 스트레스를 받아왔었던 엄마였는데 엄마의 진심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마음이 쓰였다. 조금 더 효율적이고 똑똑한 삶을 각자가 헤쳐나갔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그 나잇대의 어른들은 쉬운 길을 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집에 갈 때마다 10년 된 전기장판은 테이프를 칭칭 감고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두 해 전 선물해드린 구두는 내년부터 신겠노라고 이야기를 하셨다. 으레 그렇듯 어른이란 답답한 존재구나 라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

작년 가을엔 상담을 몇 차례 받았다. 갑자기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워지고, 일을 하다 멍해지는 일이 잦아졌다. 회사생활에 대해 고민을 해결하고자 진행했던 상담에서 뜻밖에 가족 이야기를 더 깊게 하게 되었다. 별 문제없었던 가정이었는데 이야기를 하게 되면 문제가 있는 가정으로 비칠까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한 번 이야기하니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1시간 동안 추석에 있었던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 속엔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다른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이야기만 있었고, 나와 내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내 의지로 일어난 일이라고 이야기 한 건 단 한 문장뿐이었다. "3일 있으려고 했는데 이틀 있다가 오게 되었어요"에서 '3일 있으려고' 정도였다. 가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위축된다고 말했다. 그에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왜 샐리 씨가 그 화목함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죠? 샐리 씨가 고민하는 건 아빠와 엄마가 알아서 조율해야 하는 부분이에요. 샐리 씨만 그 어떤 것을 지키면 그 화목함은 유지되는 건가요?"


상담 선생님의 질문은 꽤 예리했고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말문이 막힌 내게 선생님은 편한 대로 행동하라고 했고 그날의 상담은 어버버 한 채로 끝이 났다. 좋은 가정이 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건 늘 생각하고 있었지만 왜 이런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주 주말에도 '왠지 가야 할 것 같아서 집에 가겠노라'라고 선언해놓은 상태였다.



그런 집도 있습니다

사회에 나와서 여러 사람들을 긴밀하게 겪어보니 흔히 말하는 '사랑둥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준에서 사랑을 많이 받아온 티가 난다거나 사랑을 주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줄 때 되돌려 받았으면 하는 마음을 버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게 설사 가족이라 하더라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화목함은 그런 사랑둥이들이 모인 집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집이 그렇게 사랑둥이만 모일 수 있는 게 아니니 나는 지금의 나를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지금 가족 간의 화목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린 시절 아빠와 엄마가 지켜온 무언가를 내가 깨트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생각이 내가 가족을 생각하는 것에 있어 더 부담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의 가족식사는 어떤 분위기일까


내가 화목함을 지키려 무던히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가족신문에 올릴 수 있는 적당히 좋은 추억들을 천천히 만들어 갈 것이고, 그 사이사이에 가끔 웅덩이가 있더라도 지금까지의 유대감을 이용해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전만큼 자주 함께하진 못하더라도 함께한 시간 동안 '각자가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집중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이번 아빠의 생일날 요즘 유행하는 돈다발 케이크를 만들어드리며 다 함께 즐거운 경험을 하나 만든 것처럼, 적당한 속도로 '평범한 우리 집'을 만들어보려 노력할 예정이다. 적당한 온도의 적당한 화목한 '평범한 어떤 집'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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