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읽어내는 힘을 가진 작가님께 나를 맡겨보고 싶은 날에
불행과 비극은 온전히 타인의 것일 때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불행과 비극은 온전히 타인의 것일 때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았다.
사람은 결코 자신과 닮은 타인을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과 닮은 이들 - 가난하고 억압받고 무시받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인간이 그처럼 한없이 나약하다는 것, 저 불결하고 끔찍한 인간과 내가 전혀 다르지 않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50p. <이슬람 정육점>
이슬람 정육점. 제목부터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유일하게 돼지고기를 만지고 써는 무슬림, 하산아저씨. 이유도 모른 체 하산과 함께 살게 된 어느 고아.
그 아이의 몸에는 누구로 인한, 어떤 이유로 인해 새겨진 것인지도 모를 깊은 흉터들이 있다.
어쩌면 이 흉터는 영혼까지 파고들어 부서진 아이의 내면과 망각 속에 묻어버린 기억의 흔적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고 긴 여운이 있었다.
인간의 나약함, 불행과 비극을 피하고 싶은 마음… 내 마음 바닥에도 있는 마음일지도.
화자는 제삼자의 시선으로 대상을 읽어내는 듯이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담담한 어투가 더 많은 감정의 동요를 일으켰다.
불행과 불행이 서로를 바라보는 이해, 비극과 비극이 서로에게 묵묵히 기댈 벽이 되어준다.
마음껏 울고, 무너지는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 수렁에서 끌어내어주는 견인이 아니라 같이 머무는 것.
그럼에도 서로를 껴안고 살아가게 되는 ‘삶’이라는 운명이 참 서럽고도 영롱한 빛을 내는 것이었다.
모든게 해피엔딩인 아름다운 결말은 아니지만, 보다 깊은 여운을 남긴 마무리에서 다시금 느낀다.
손홍규 작가님의 문체는 정말.. 설명할 수 없는 강한 힘이 느껴진다.
다시 이 책의 문장을 곱씹어보게 된 건,
요즘 친구와 주고 받았던, 조금은 닮은 듯한 이 문장 때문이었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찰리 채플린
이 말에서 어느 단어에 무게를 두어야 할까. 희극?비극?..
우리는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며,
조금은 떨어져서 보면 동정과 이해가 가능하고 웃어넘길 수 있지만,
가까이서 경험하게 되면 복장 터지고, 슬픈 한계 때문에 무너지게 되는 마음을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여러 번 내뱉었었다.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입은 쓰고, 마음은 웃지 못하는 일들…
뭐가 그리 힘든건지, 기운이 떨어지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 때문에 스스로를 계속 꾸짖는다.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은데 잘 되지 않고, 체력적으로도 회복이 잘 안 되고..
구구절절 사소한 이유들이 보태고 뭉쳐져 큰 눈덩이가 되어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 든다.,
인생은 희극과 비극 사이에 있는 것일까. 인생은 한 장르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겠지만.
매일 밭을 가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도 날씨 따라 쉬어가는 날도 있어야 하는게 인지상정 아닌가.
소란스러운 마음을 풀어헤치며 끄적이다, 다시 지우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문득 손홍규 작가님이 쓰시는 소설의 인물 중 한 명이 된다면, ‘지금의 나’를 어떻게 읽고 써 내려가실까? 잠시 상상해 봤다.
사람을, 삶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 그리고 글로 풀어내는 그 대단함.
그런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닐 것이지.
겨우 나 자신도 제대로 읽어내고, 써 내려갈 수 없는 나는 여기까지…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