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0일 : 24시간 간병하는 엄마
지난주 화요일 일반병실로 옮기시고, 주치의는 미음 정도의 식사를 허용했다.
말기암 환자이기에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할 수도 없는데 엄격한 금식은 매정하기만 했다.
한동안 식사를 하지 않고 영양제로 연명하신 아버지는 그 미음도 몇 숟갈 드시지 못했다.
수분섭취량을 체크해야 하는데, 물병에 냄새가 나서 싫다, 죽에서도 냄새가 나서 싫다 하시면서 먹지 말아야 할 것만 계속 얘기하셨다,
시락국(시래깃국), 물김치 국물, 떡볶이.. 자극적인 맛이 당기는 것 같았다.
일반병실로 옮긴 첫날부터 집으로 가자고 밤새 들들 볶아서 또 한바탕을 했단다.
엄마는 큰언니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하고(엄마, 정말 그럴 줄 모르셨어요?)
의사 선생님이 “지금 집에 가시면 죽습니다.”라고 직접적인 선고를 듣고서야 멈추었다.
엄마가 몰래 준 요구르트에 몸이 반응했다. 복부에 가스가 차고 통증이 있어서 가스를 빼내고, 이뇨제를 맞는 등 처치가 이어졌다.
또 답답한 나는 엄마를 나무랐다. 그렇게 막 주면 안 된다고, 더군다나 유제품... 미음만 먹이라는데..!
전화를 끊고 다시 나를 자책했다. 엄마에게 화낼 일이 아닌데, 나는 또 못된 딸이 된 것 같아 하루 종일 가슴이 먹먹했다.
금요일엔 내가 오후출근을 해서, 오전에 엄마와 교대를 해주었다.
엄마는 집에 가서 씻고 쉬면서 빨래를 해놓고 아버지가 드실 미음을 끓여 왔다.
그동안 나는 아버지 다리를 주무르고, 눈가와 얼굴을 조금 닦아주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틈틈이 잠들기도 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아버지가 안쓰러워 보이고.. 슬펐다.
어떤 마음으로 아버지를 대해야 할지 날마다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날은 다정한 셋째 딸이 되어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잘 버티셨다고, 잘했다고 격려도 하면서..
엄마가 돌아오시고 얼마 뒤, 아버지가 드시던 약을 챙겨 오시기로 했는데 잊어버리셨다고 한다.
집에 가려던 차에 다시 택시를 타고 본가에 가서 약을 챙기고, 또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져다주었다.
오후 3시가 다되어서 대충 요기를 하고 출근을 했다.
마음이 복잡하고.. 무거웠다.
마음을 더 쓰면 주말도, 저녁 시간도 함께 할 수 있겠지만, 더 내 시간을 양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꾸준히 지켜왔던 하루의 루틴은 이미 깨어졌고, 일도 해야하고 에너지는 금세 고갈되곤 했다.
조금은 모든 상황에 눈감고, 잊고 내 삶을 챙기고 싶은 욕망과 조금이라도 도와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마음이 나뉘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죄책감, 미안함이 들다가도 외면하고 싶고, 반항하고 싶은 맘, ’이 정도면 충분해‘ 선을 긋고 싶은 마음…
오늘은 엄마가 일하는 곳에서 보수교육이 있다고, 나에게 아버지를 봐달라고 해서 왔다.
주 6일 일하는 나는 하루 쉬는 날을 또 반납했다. 시간을 낼 사람이 나 밖에 없다.
누룽지를 쑤어 올 수 있냐고 했다.
아침에 누룽지를 끓여서 한 그릇 담아갔다.
엄마가 지나가듯 “편의점에 구운 달걀 사려니까 너무 비싸더라” 하기에 달걀도 삶아서 챙겼다.
누룽지 두 숟갈에 찬물을 타서 묽게 만들어 성치 않는 이로 열심히 씹어드셨다.
먹는 모습에서 살고자 하는 매서운 기운을 느꼈다. 뭔가 그 눈빛이 싫었다.
완고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어린 눈빛.. 내가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한 면일지도 모르겠다.
몰래 주스도 먹여가며 먹고 싶다는 걸 주고 애써보았지만, 결국에는 그 양이 너무 적고 제대로 먹지 못해 다시 영양제를 달았다.
새벽에도 엄마를 깨워 무엇이 먹고 싶다, 다리를 주물러라, 등이 가렵다, 여기가 아프다, 집에 가고 싶다, 나 한쪽 다리는 멀쩡하니까 걸어보고 싶다..
먹는 것도, 무엇도 자기 뜻대로 안 되니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피곤하게 한다고 했다.
아버지의 왼쪽다리가 사흘 전보다 훨씬 부어있었다.
이뇨제를 맞는데도 부기가 빠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스스로 무릎을 굽힐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졌다.
몸은 좀 더 야위어 보이지만 혈색은 좋아 보이셨고, 다른 부분은 괜찮아지는 것 같은데 다리가 문제다.
이 상태를 유지하더라도 병의 진행은 알 수 없다. 봉와직염의 종착역은 괴사와 사망이 아니던가.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 같다..
부은 다리를 주무르면 좀 시원하다고 하셔서 한참 주물러 드렸다.
아버지에게 “어릴 때 맨날 아버지가 다리 주무르라고 하셨잖아요.”하면서 운을 띄웠는데 아버지는 딴소리만 하신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자주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하셨다.
양계일을 시작하셨을 때다. 내가 초등학교 4~6학년 시절 즈음이다.
막사에 사료를 주거나 물을 채우는 등 일은 엄마가 하고 아버지는 비디오를 빌려서 밤새 보고, 한낮에 누워 자는 날이 많았다.
물론 아버지의 역할도 있었겠지만 어린 내가 보았을 때, 일은 엄마가 거의 다 하시는 것 같은데 왜 아빠는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는지.
일은 안 하면서 왜 자식들에게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는지.. 한 번에 몇 만 원어치 비디오 빌려보는 돈은 아끼지 않으면서 우리들에겐 천 원짜리 한 장 주는 것도 얼마나 인색했는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나도 다리가 아플 때가 많다. 오래 서서 하는 일을 해서 더 다리가 아프고 발바닥이 저렸다.
누가 내 다리 좀 주물러 줬으면, 생각할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렸었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듯 말 듯… 씁쓸한 마음이 남았었다.
아버지, 이제는 좀 마지막을 생각하시면 안 되겠나요? 지금 당신의 상태를 받아들이시고..
가족들에게 좋은 모습 보여주시고, 엄마 말 좀 잘 듣고 미안하고 고마웠다, 다정하게 말씀하시고.
그래도 아버지라고 도우려고 애쓰는 자식들 마음도 좀 헤아려주실 수 없나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시면서 남은 시간을 좀 더 평안히 계시면 안 될까요?
아버지에겐 천국의 소망이 없나요?..
어머니가 교육을 마치시고 돌아오셨다. 휴직신청도 하셨다 했다.
차마 아버지 기저귀 가는 일은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시려고 미리 다 하시고 다녀오신 걸 안다.
물 챙겨드리고, 다리 주물러 드리고, 대화하고.. 그렇게 옆을 지키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바로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커피도 사 와 나눠마시고, 엄마와 이야기도 좀 하고 일어났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을 포함하면, 병원에서 집까지 1시간 반 정도가 소요된다.
왕복 3시간은 길에서 보내고, 병원에서 3~4시간 있다가 가면 하루를 다 쓴 기분이다.
병원에 오는 길이나 돌아가는 길이나 늘 마음이 무겁다.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면 명랑한 목소리로 통화도 하고
일하면서 재미나게 우스운 소리를 하지만, 틈마다 침묵과 함께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오는 나날.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도 힘이 들고, 사랑하는 것도 힘이 든다.
엄마를 이해하는 것도 힘이 들고, 다정하게 챙기려는 것도 힘이 든다.
지금 누구보다 힘든 건 아픈 아버지, 옆에 있는 엄마이겠거니. 그런데 나도 힘이 드네.
그렇게 투정 부리는 아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이런 투쟁 같은 자기 싸움의 연속이 괴롭기도 하다.
인생은 짧다.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 (*양귀자, <모순>에서 인용)
그렇네. 참 길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