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어둠 속에서도 살아남기를
조금은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왔다.
동생이 탈장수술을 해서, 하루 내내 보호자로 있으며 챙겨주고 저녁에 돌아오기도 했고.
밀린 이불빨래를 하고, 밑반찬도 만들고, 시험기간인 아이에게 잔소리도 잊지 않고.
저녁엔 프로야구를 보면서 가만히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글을 쓰면서 마음이 다소 정리되었는지, 감정도 가라앉고 생각도 추려졌다.
과거는 나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기록되기에, 그 기억이 완벽한 진실은 아닐 수 있으나
나의 고유한 경험이자, 지금까지 나를 만들어온 과정 속 내면에 기록된 것이기에 부정할 수는 없다.
가끔은 과거를 청산하는 마음으로 용서와 이해의 시선으로 과거를 재해석해보기도 했다.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툭 튀어나오는 아픈 경험들이-나는 지금 아무렇지도 않아서 한 이야기지만- 같이 있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긴 했다.
그렇다고 내 모든 시절이 어둠이었을까. 정말 좋았던 기억들이 없었나 떠올려 보곤 했다.
추운 겨울을 지나고 봄이 오듯, 잠시 따뜻했던 시절도 있었겠다.
어린아이니까, 주변 환경에 갇히지 않는 천진난만함이 나에게도 있었을 게다.
시골에서 친구들과 산도 타고, 가재도 잡고, 땅을 헤집으며 놀았던 것도..
평상에 누워 수많은 별들 중 별자리를 찾아보던 여름밤.
새벽기도를 간다고 친구들과 졸린 눈을 비비고 걷던 시골길, 그 뒤를 따랐던 영민한 강아지 한 마리.
죽고 싶고, 우울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개그맨 흉내를 내며 웃어제끼고, 노래를 부르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었던, 위로와 힘이 되었던 사람들과의 추억도 있다.
적당히 감추고, 적당히 웃는 낯으로 가려가면서..
가정형편이나 놀고 먹는 아버지나 매일을 쉬지 않고 일하는 어머니나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지만
해가 저물어 어슴푸레해진 하늘에 살짝 빛을 드러내는 몇 개의 별처럼
나의 어둠 속에도 별빛 같은 추억은 있었다.
오늘 읽은 김애란 소설 <안녕이라 그랬어> 중에 은미와 로버트의 마지막 대화가 인상 깊었다.
로버트는 어느 날 아버지의 부고를 전했었는데, 마지막 대화에서 그 아버지가 '길러주신' 분이라고 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
“ ............ “
" 모든 어른이 좋은 부모는 아니라는 거, 특별한 뉴스는 아니지" 나는 잠자코 있었다.
" 그런데 내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봤나봐. 왜 그런 거 있잖아. 누군가의 부고로 시작되는 이야기. 혹은 끝나는 이야기.
그로 인해 남은 이들이 고인을, 또 인생을 전과 달리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말이야. 마치 '도미도미도미.....' 오직 두 음으로만 구성된 구급차 소리가 어느 날 의미 있는 선율로 바뀌듯이.
(...) 사실 그래서 나, 내게도 그런 일이 생길 줄 알았어."
순간 "나도"라고 답할 뻔한 걸 겨우 참았다. 큰 교훈 없는 상실. 삶은 그런 것의 연속이라고.
그걸 아는 사람을 만나 정말 반갑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 아무튼 별거 없었어. 우리 아버지 부고 안에는. 그 사람이 그렇게 좋은 부모가 아니었다는 거.
전혀 몰랐던 사실도 아닌데, 이미 알고 있던 걸 한번 더 확인한 것뿐인데, 그런데도 이 허전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런 걸로도 뭔가 배우는 게 인생일까?”
“하긴 뭘 꼭 배우지 않으면 또 어때.”
안녕이라 그랬어 245-246쪽
내 아버지의 부고는 그런 끝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나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다. 일종의 아름다운 이별과 과거의 사연들이 더이상 소환되지 않아도 좋을 후회없는 이별.. 그렇게 끝나는 이야기.
그런데 그 기대를 벗어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음을 이미 알고 있던 걸 한번 더 확인하게 되는 것뿐인데, 그 허전함이란…
'큰 교훈 없는 상실'이라는 말이 슬프게 와닿았다.
병원비와 보험료 청구 등을 목적으로 하는 통장이 있다.
보험료는 2015년부터 자매들이 납입하고 있고, 암 진단 후 자녀들이 백만 원씩 모아 넣고 초기치료비용을 해결했던 그 통장.
매번 병원을 다녀오면, 서류를 모아 청구를 하는 일은 큰언니의 일이었다.
언니가 오늘 보험료 청구에 문제가 있어서, 입금확인을 하려고 통장정리를 해보려고 했단다. 지면을 다 할애해서 재발급을 받아야 하는데, 도장이 없었다.
'거래내역조회'를 하려고 하니 비밀번호가 틀렸다고 했다. 어제 그 보험금 문제 때문에 아버지 전화기를 켰다가 본 문자메시지가 떠올랐다
'9월 23일’, ‘농협은행', '비밀번호가 변경되었습니다’…
아버지가 9월에 병원에 계셨던 시점에 온 문자였다.
아니, 왜? 설마.. 무엇 때문에?? 처음엔 비번이 헷갈리셔서 잘못 누르셨나 했는데.
모바일인증번호나 스마트뱅킹비밀번호가 아니라 통장비밀번호이다.
정확한 의도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인이 비번을 변경한 것은 사실이다.
당황한 언니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서 알게 되었다 . 남겨주실 재산도 없지만, 그 통장에 아버지의 지분 은 1도 없는데.. 어이가 없다.
다음 주 월요일에 1인실 자리가 나서, 주간에는 엄마가 아버지를 돌보시고, 야간에 간병인을 부르기로 했다.
벌써 중환자실 입원만 3주가 되는데.. 각종 비급여 항목은 늘어가고.. 간병비까지, 재정적 부담은 커져 간다. 산정특례를 받아 지난번 병원비도 130여만원 밖에 안 나왔지만,
이번에는 또 얼마가 필요할지... 조금은 걱정되는 상황에서 비밀번호 변경은 허탈한 마음을 남겨주었다.
"이런 걸로도 뭔가 배우는 게 인생일까?"
"하긴 뭘 꼭 배우지 않으면 또 어때."
소설의 이야기에 기대어 내 이야기를 풀어본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해도... 이 이야기가 '끝나는 이야기'로 남게 되길 바랄 뿐이다.